‘유독’ 싼 주유소, 비밀은 바지사장 돌려막기

입력 2023.03.1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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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진 한 장 보겠습니다. 위 사진 속에 주유소가 보이시죠. 전남 광양의 한 주유소입니다.

뭔가 좀 어색하죠. 흔히 보는 주유소와 많이 다릅니다. 간판도 없고, 로고도 없습니다. 브랜드 특유의 색상도 안 보입니다.

폐업한 주유소일까요. 아닙니다. 장사가 꽤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사진이 찍힌 시기는 2021년. 그해 하반기 이 주유소 매출은 23억 원이 넘었습니다.

통계청이 집계한 주유소 평균 반기 매출 19.5억 원보다 18% 많았습니다.

■ 매출은 23억, 매입은 1.5억

매입 매출 기록에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매입이 1억 5천만 원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1억 5천만 원어치 기름을 들여와서, 23억 원어치 기름을 팔았다는 얘기입니다.

주유소 땅 아래 기름 펑펑 솟는 유전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아귀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습니다.

일반적인 주유소의 영업이익률은 보통 3% 수준입니다. 기록대로 21억이 넘는 수익이 남았다면, 초우량 주유소였던 셈인데요.

그러나 이 주유소는 1년 만에 폐업했습니다. 석유관리원 단속에 적발됐기 때문입니다.


■ 비결은 '무자료' 기름

이 주유소는 불법적으로 빼돌려 기록이 남지 않는 이른바 '무자료 기름', 나아가 '가짜석유'까지 제조해 싸게 팔아 손님을 끌고 큰 차익을 남겼습니다.

세금이 안 붙거나 적게 붙는 농업용, 어업용, 군납용 '면세유' 등을 불법적으로 빼돌린 겁니다.

애초에 들여오는 가격 자체가 워낙 싸니, 차익도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자료는 뭐냐면 (부가세) 10%가 빠져요. 우리가 지금 1500원 팔고 있는데 150원이 빠진 금액에 사 와요. 그러니까 우리(합법 주유소)보다 훨씬 유리하죠."
- 인근 주유소 관계자

다만,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전국 주유소 수급보고는 주간 단위로 보고되기 때문에, 수상한 매입·매출 기록은 얼마 안 가 당국에 적발됩니다.

이 주유소 또한 '사업 정지' 2개월의 행정처분을 받았고, 석유사업법 위반으로 경찰에도 고발됐습니다.

■ 200km 떨어진 곳에 사는 사장님

경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대표를 추적해봤습니다.

주유소 위치는 전남 광양인데, 소환장이 날아간 곳은 대전의 A 씨, 부산의 B 씨였습니다.

2021년에 각각 반년씩 주유소 대표를 맡았던 이들인데, 자기가 운영하는 주유소와 200km 넘게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 까닭은, 이들이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빌려준 명의상 대표였고, 실사업주는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수사와 처벌은 사업자 등록을 기준으로 해서, 바지사장들만 경찰 조사와 벌금, 세금 독촉장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실사업주 일당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 "그 친구는 세상 떴어요"


바지사장 중 한 명인 A 씨와 인터뷰했습니다. 사건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인 C 씨를 통해 바지사장 모집책 '땅콩' 일당을 만났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블랙(신용불량)이냐"부터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돈을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요.

불법이냐고 묻자 다른 사람들도 문제없이 하고 있다며 A 씨를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신용불량자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나 (기초)수급자라고 그랬더니, 목돈을 해줄 테니 명의를 좀 빌려달라 해서...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 7~8명 더 하고 있다고 그때 그러더라고요 "
- 바지사장 A 씨

일당은 3개월여 만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약속한 '목돈' 대신 A 씨에게 남겨진 것은 2천만 원 넘는 체납 세금, 4천만 원대 주유소 채무 독촉장들.

A 씨는 거액의 돈이 통장에 입출금됐던 기록 때문에 포기했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자격을 회복하고 있지 못해 간단한 병원 치료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편, 일당을 소개했던 지인 C 씨는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였습니다.

C 씨 역시, 명의를 빌려줬다가 채권 추심에 시달렸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어디다가 저기 주유소를 차렸다더라, 원주인가, 조사받으러 다니고 그랬어 수원 경찰, 법원에...빚쟁이들 쪼이고 그러니께, 담뱃값이나 벌러 피시방 나가야겠다고 그러더니 9시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000 씨 잘 아냐고, 잘 안다고. 그래갖고 병원 거기 장례 치렀지..."
- 바지사장 A 씨

[연관 기사] [현장K] 취약층 꾀어 ‘주유소 바지사장’…불법영업 덤터기 씌우고 ‘교체’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25431

■ 산발적 수사, 꼬리끊기 넘을까

수사는 시작됐습니다.

전국의 여러 경찰서가 비슷한 문제가 포착된 여러 주유소를, 제각각의 혐의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광양경찰서에서 석유관리법 위반으로, 대전 유성경찰서와 부산 영도경찰서에서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주유소 관계자들을 수사 중인데요.

다만, 바지사장에 대한 수사가 초점일 뿐입니다. 그들을 꾀어 명의를 도용하고 무자료 기름으로 큰 차익을 누린 일당 '본진'까지 파고드는 기미는 아직 없습니다.

오랜 기간 관련 수사를 해온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현실적 한계를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청 광역 수사대에서 오랜 기간 수사를 해야 잡히는데, 한두 달만이 아니라 1,2년 끝까지 추적하더라고요... 근데 최고 상선은 또 못 잡아. 그냥 주유소에서 누가 줬다, 누가 줬다, 하다가 그 위로는 못잡더라고요."
- 00도 특별사법경찰관

■ 제보를 기다립니다

수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명의상 주인, 이른바 '바지사장'을 내세워 짧은 기간 내에 무자료 기름을 판매한 뒤 체납·폐업하고 도망가는, 정형화된 수법을 쓰는 일당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취재진이 닷새 만에 파악한 '명의도용 주유소'만 3곳입니다. 전국에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주유소의 특징은 ①가격이 유독 싸고, ②주유소 간판이 자주 바뀌며, ③길어야 1년 정도 영업한다는 점입니다.

불법과 탈세의 온상임에도 불구하고 처벌과 환수조차 어려운 '명의도용' 범죄.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 되고 있는데요.

'명의도용 주유소' 일당은 어디에서 또 '먹튀'를 계획하고 있을까요?

피해를 보셨거나 목격하신 분들의 추가 제보를 기다립니다.

[연관 기사] [현장K] 노숙인에게 세금 27억 원?…‘명의도용 탈세’ 범죄조직 활개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08449&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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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독’ 싼 주유소, 비밀은 바지사장 돌려막기
    • 입력 2023-03-15 13:34:56
    취재K

먼저, 사진 한 장 보겠습니다. 위 사진 속에 주유소가 보이시죠. 전남 광양의 한 주유소입니다.

뭔가 좀 어색하죠. 흔히 보는 주유소와 많이 다릅니다. 간판도 없고, 로고도 없습니다. 브랜드 특유의 색상도 안 보입니다.

폐업한 주유소일까요. 아닙니다. 장사가 꽤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사진이 찍힌 시기는 2021년. 그해 하반기 이 주유소 매출은 23억 원이 넘었습니다.

통계청이 집계한 주유소 평균 반기 매출 19.5억 원보다 18% 많았습니다.

■ 매출은 23억, 매입은 1.5억

매입 매출 기록에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매입이 1억 5천만 원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1억 5천만 원어치 기름을 들여와서, 23억 원어치 기름을 팔았다는 얘기입니다.

주유소 땅 아래 기름 펑펑 솟는 유전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아귀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습니다.

일반적인 주유소의 영업이익률은 보통 3% 수준입니다. 기록대로 21억이 넘는 수익이 남았다면, 초우량 주유소였던 셈인데요.

그러나 이 주유소는 1년 만에 폐업했습니다. 석유관리원 단속에 적발됐기 때문입니다.


■ 비결은 '무자료' 기름

이 주유소는 불법적으로 빼돌려 기록이 남지 않는 이른바 '무자료 기름', 나아가 '가짜석유'까지 제조해 싸게 팔아 손님을 끌고 큰 차익을 남겼습니다.

세금이 안 붙거나 적게 붙는 농업용, 어업용, 군납용 '면세유' 등을 불법적으로 빼돌린 겁니다.

애초에 들여오는 가격 자체가 워낙 싸니, 차익도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자료는 뭐냐면 (부가세) 10%가 빠져요. 우리가 지금 1500원 팔고 있는데 150원이 빠진 금액에 사 와요. 그러니까 우리(합법 주유소)보다 훨씬 유리하죠."
- 인근 주유소 관계자

다만,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전국 주유소 수급보고는 주간 단위로 보고되기 때문에, 수상한 매입·매출 기록은 얼마 안 가 당국에 적발됩니다.

이 주유소 또한 '사업 정지' 2개월의 행정처분을 받았고, 석유사업법 위반으로 경찰에도 고발됐습니다.

■ 200km 떨어진 곳에 사는 사장님

경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대표를 추적해봤습니다.

주유소 위치는 전남 광양인데, 소환장이 날아간 곳은 대전의 A 씨, 부산의 B 씨였습니다.

2021년에 각각 반년씩 주유소 대표를 맡았던 이들인데, 자기가 운영하는 주유소와 200km 넘게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 까닭은, 이들이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빌려준 명의상 대표였고, 실사업주는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수사와 처벌은 사업자 등록을 기준으로 해서, 바지사장들만 경찰 조사와 벌금, 세금 독촉장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실사업주 일당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 "그 친구는 세상 떴어요"


바지사장 중 한 명인 A 씨와 인터뷰했습니다. 사건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인 C 씨를 통해 바지사장 모집책 '땅콩' 일당을 만났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블랙(신용불량)이냐"부터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돈을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요.

불법이냐고 묻자 다른 사람들도 문제없이 하고 있다며 A 씨를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신용불량자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나 (기초)수급자라고 그랬더니, 목돈을 해줄 테니 명의를 좀 빌려달라 해서...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 7~8명 더 하고 있다고 그때 그러더라고요 "
- 바지사장 A 씨

일당은 3개월여 만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약속한 '목돈' 대신 A 씨에게 남겨진 것은 2천만 원 넘는 체납 세금, 4천만 원대 주유소 채무 독촉장들.

A 씨는 거액의 돈이 통장에 입출금됐던 기록 때문에 포기했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자격을 회복하고 있지 못해 간단한 병원 치료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편, 일당을 소개했던 지인 C 씨는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였습니다.

C 씨 역시, 명의를 빌려줬다가 채권 추심에 시달렸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어디다가 저기 주유소를 차렸다더라, 원주인가, 조사받으러 다니고 그랬어 수원 경찰, 법원에...빚쟁이들 쪼이고 그러니께, 담뱃값이나 벌러 피시방 나가야겠다고 그러더니 9시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000 씨 잘 아냐고, 잘 안다고. 그래갖고 병원 거기 장례 치렀지..."
- 바지사장 A 씨

[연관 기사] [현장K] 취약층 꾀어 ‘주유소 바지사장’…불법영업 덤터기 씌우고 ‘교체’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25431

■ 산발적 수사, 꼬리끊기 넘을까

수사는 시작됐습니다.

전국의 여러 경찰서가 비슷한 문제가 포착된 여러 주유소를, 제각각의 혐의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광양경찰서에서 석유관리법 위반으로, 대전 유성경찰서와 부산 영도경찰서에서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주유소 관계자들을 수사 중인데요.

다만, 바지사장에 대한 수사가 초점일 뿐입니다. 그들을 꾀어 명의를 도용하고 무자료 기름으로 큰 차익을 누린 일당 '본진'까지 파고드는 기미는 아직 없습니다.

오랜 기간 관련 수사를 해온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현실적 한계를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청 광역 수사대에서 오랜 기간 수사를 해야 잡히는데, 한두 달만이 아니라 1,2년 끝까지 추적하더라고요... 근데 최고 상선은 또 못 잡아. 그냥 주유소에서 누가 줬다, 누가 줬다, 하다가 그 위로는 못잡더라고요."
- 00도 특별사법경찰관

■ 제보를 기다립니다

수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명의상 주인, 이른바 '바지사장'을 내세워 짧은 기간 내에 무자료 기름을 판매한 뒤 체납·폐업하고 도망가는, 정형화된 수법을 쓰는 일당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취재진이 닷새 만에 파악한 '명의도용 주유소'만 3곳입니다. 전국에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주유소의 특징은 ①가격이 유독 싸고, ②주유소 간판이 자주 바뀌며, ③길어야 1년 정도 영업한다는 점입니다.

불법과 탈세의 온상임에도 불구하고 처벌과 환수조차 어려운 '명의도용' 범죄.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 되고 있는데요.

'명의도용 주유소' 일당은 어디에서 또 '먹튀'를 계획하고 있을까요?

피해를 보셨거나 목격하신 분들의 추가 제보를 기다립니다.

[연관 기사] [현장K] 노숙인에게 세금 27억 원?…‘명의도용 탈세’ 범죄조직 활개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08449&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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