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극비]② ‘500명이 수장된 제주 바다’…그날의 목격자들

입력 2023.04.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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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자주] 제주 4·3 75주년인 올해는 6·25전쟁이 멈춘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전쟁 직후 제주에선 4·3과 관련됐단 이유로 또다시 양민 학살이 자행됐는데요. 극비로 진행된 이 ‘예비검속’의 실체를 3차례에 걸쳐 조명해보겠습니다.


1950년 8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서 발생한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 사건은 주민들에게 발각되면서 그나마 실체가 드러났지만, 바다나 공항에서의 학살은 여전히 수면 아래 있습니다. KBS는 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끔찍했던 그 날을 떠올려봤습니다.


■ “알몸으로 바다로 끌고 가”…“총살하고 다리에 돌 묶어”

예비검속 학살의 슬픔이 서린 곳은 섯알오름뿐만이 아닙니다.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에 수감됐던 예비검속자 약 500명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군경의 기록은 없지만, 1950년 8월 제주항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국민방위군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KBS는 29년 전인 1994년 이 목격자를 직접 만난 채록자로부터 녹취록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장시용(1994년 채록)
“9시가 조금 지났어. 차가 오데. 배가 딱 데 있었어. 나는 확실히 본 거지. 여자고 남자고 옷 입은 사람이 없어. 이만한 줄로 두 손 묶어서 큰 줄에 전부 다 맸어. 한 시간쯤 작업하데. 차가 10대가 들어왔어. 차 안에 딱 50명이라. 바다에 하여튼 500명 들어간 것만은 이것만은 틀림없어.”

그날로부터 44년이나 지났지만, 기억은 또렷했습니다.

녹취록에서 장 씨는 “새벽 2시에서 2시 반쯤 배가 빈 채로 돌아왔다. 뱃사람하고 군인들 외에는 통행이 금지된 때여서 확실하게 본 건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라서 엊그제 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유족들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참혹했던 그 날의 실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유족인 강창옥 할아버지는 “그때 배가 열 몇 척인데 선주들이 ‘절대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얘기 안 한다’고 각서를 썼더라”며 “몇 년이 지나 배 선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장되는 과정을 전부 얘기해줬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배 선주의 증언에 따르면, 먼바다로 나간 예비검속자들을 3~4명씩 철사로 묶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총으로 1차 사살됐고 다리에 돌을 묶어 나올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취재진에게 증언을 전달하던 강 할아버지는 처참했던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 “쏘고 또 쏘고”…제주공항에서 발굴된 유해들

끔찍한 학살은 제주공항에서도 이어졌습니다.

KBS가 입수한 녹취록에는 1950년 8월 공항 주변에 살던 주민들의 생생한 기억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의협(2005년 채록)
“열 사람씩 탁탁 세워. 그럼 이제 군인들은 총을 둘러메고. 죽이는 사람은 따로 있고, 데려다 세우는 사람 따로 있고. 안 가려고 발버둥 치면 막 구둣발로 이렇게 해서 세워. 3~4분 간격으로 쏘고 나면 또 쏘고 한 거야.”

문병구(2003년 채록)
“저녁에 내가 화장실에 가서 본다는 것이 통시(뒷간)에 디딜팡(받침돌) 놓고 보잖아요. 이쪽에서 차들이 헤드라이트 켜서 여기로 막 와서 한참 있으니까 총소리가 팡팡하더라고.”

증언을 토대로 옛 제주공항 지적도에서 학살 장소를 특정했고, 2007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 지역을 발굴해보니 암매장된 유해 120여 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600여 점의 유류품 중 이름이 새겨진 나무 도장이 발견됐는데, 바로 서귀포경찰서 예비검속자의 것이었습니다. 서귀포에서 제주공항까지 끌려가 학살된 겁니다.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 당시 KBS 뉴스 화면.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 당시 KBS 뉴스 화면.

유족들의 채혈을 통해 유전자를 대조한 결과, 서귀포와 모슬포경찰서에 끌려간 예비검속자 40명의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간 아버지를 60년 만에 유해로 만난 고창남 할아버지는 “그렇게 그립던 아버지 시신이 앞에 있는데 손이 떨리고 마음이 떨려서 가까운데 갈수록 쓰러질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은 고 할아버지는 “8살 때 경찰이 아버지를 한밤중에 잡아가는 모습을 봤다”며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공항과 가장 가까운 제주경찰서로 끌려간 예비검속자 유해는 단 한 구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학살된 아버지와 임신한 채로 공항에 암매장된 어머니,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한 강창옥 할아버지는 “옛 공항 도면을 갖고 목격자들을 쫓아다니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이 어딘지 찾아다녔지만, 우리 어머니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올해로 여든여섯 살이 된 강 할아버지는 “아마도 영원히 못 찾을 것 같다”면서 제주 바다 위를 지나는 비행기를 쓸쓸히 바라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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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극비]② ‘500명이 수장된 제주 바다’…그날의 목격자들
    • 입력 2023-04-12 07:00:27
    취재K
[기자주] 제주 4·3 75주년인 올해는 6·25전쟁이 멈춘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전쟁 직후 제주에선 4·3과 관련됐단 이유로 또다시 양민 학살이 자행됐는데요. 극비로 진행된 이 ‘예비검속’의 실체를 3차례에 걸쳐 조명해보겠습니다.<br />

1950년 8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서 발생한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 사건은 주민들에게 발각되면서 그나마 실체가 드러났지만, 바다나 공항에서의 학살은 여전히 수면 아래 있습니다. KBS는 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끔찍했던 그 날을 떠올려봤습니다.


■ “알몸으로 바다로 끌고 가”…“총살하고 다리에 돌 묶어”

예비검속 학살의 슬픔이 서린 곳은 섯알오름뿐만이 아닙니다.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에 수감됐던 예비검속자 약 500명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군경의 기록은 없지만, 1950년 8월 제주항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국민방위군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KBS는 29년 전인 1994년 이 목격자를 직접 만난 채록자로부터 녹취록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장시용(1994년 채록)
“9시가 조금 지났어. 차가 오데. 배가 딱 데 있었어. 나는 확실히 본 거지. 여자고 남자고 옷 입은 사람이 없어. 이만한 줄로 두 손 묶어서 큰 줄에 전부 다 맸어. 한 시간쯤 작업하데. 차가 10대가 들어왔어. 차 안에 딱 50명이라. 바다에 하여튼 500명 들어간 것만은 이것만은 틀림없어.”

그날로부터 44년이나 지났지만, 기억은 또렷했습니다.

녹취록에서 장 씨는 “새벽 2시에서 2시 반쯤 배가 빈 채로 돌아왔다. 뱃사람하고 군인들 외에는 통행이 금지된 때여서 확실하게 본 건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라서 엊그제 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유족들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참혹했던 그 날의 실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유족인 강창옥 할아버지는 “그때 배가 열 몇 척인데 선주들이 ‘절대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얘기 안 한다’고 각서를 썼더라”며 “몇 년이 지나 배 선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장되는 과정을 전부 얘기해줬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배 선주의 증언에 따르면, 먼바다로 나간 예비검속자들을 3~4명씩 철사로 묶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총으로 1차 사살됐고 다리에 돌을 묶어 나올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취재진에게 증언을 전달하던 강 할아버지는 처참했던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 “쏘고 또 쏘고”…제주공항에서 발굴된 유해들

끔찍한 학살은 제주공항에서도 이어졌습니다.

KBS가 입수한 녹취록에는 1950년 8월 공항 주변에 살던 주민들의 생생한 기억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의협(2005년 채록)
“열 사람씩 탁탁 세워. 그럼 이제 군인들은 총을 둘러메고. 죽이는 사람은 따로 있고, 데려다 세우는 사람 따로 있고. 안 가려고 발버둥 치면 막 구둣발로 이렇게 해서 세워. 3~4분 간격으로 쏘고 나면 또 쏘고 한 거야.”

문병구(2003년 채록)
“저녁에 내가 화장실에 가서 본다는 것이 통시(뒷간)에 디딜팡(받침돌) 놓고 보잖아요. 이쪽에서 차들이 헤드라이트 켜서 여기로 막 와서 한참 있으니까 총소리가 팡팡하더라고.”

증언을 토대로 옛 제주공항 지적도에서 학살 장소를 특정했고, 2007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 지역을 발굴해보니 암매장된 유해 120여 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600여 점의 유류품 중 이름이 새겨진 나무 도장이 발견됐는데, 바로 서귀포경찰서 예비검속자의 것이었습니다. 서귀포에서 제주공항까지 끌려가 학살된 겁니다.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 당시 KBS 뉴스 화면.
유족들의 채혈을 통해 유전자를 대조한 결과, 서귀포와 모슬포경찰서에 끌려간 예비검속자 40명의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간 아버지를 60년 만에 유해로 만난 고창남 할아버지는 “그렇게 그립던 아버지 시신이 앞에 있는데 손이 떨리고 마음이 떨려서 가까운데 갈수록 쓰러질 것만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은 고 할아버지는 “8살 때 경찰이 아버지를 한밤중에 잡아가는 모습을 봤다”며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공항과 가장 가까운 제주경찰서로 끌려간 예비검속자 유해는 단 한 구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학살된 아버지와 임신한 채로 공항에 암매장된 어머니,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한 강창옥 할아버지는 “옛 공항 도면을 갖고 목격자들을 쫓아다니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이 어딘지 찾아다녔지만, 우리 어머니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올해로 여든여섯 살이 된 강 할아버지는 “아마도 영원히 못 찾을 것 같다”면서 제주 바다 위를 지나는 비행기를 쓸쓸히 바라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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