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6·25전쟁 속 야전외과병원 노르매시

입력 2023.06.24 (08:21) 수정 2023.06.2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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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내일은 ‘6.25 전쟁’ 7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으로 무려 70 만 명이 넘는 우리 국군과 UN 군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습니다.

당시 유엔 회원국 가운데 6 개 나라가 의료지원 병력을 파견했는데요.

노르웨이, 스웨덴, 인도, 덴마크, 이탈리아 그리고 당시 서독... 이렇게 6 개 나라였죠.

이 가운데 노르웨이가 운영했던 전시 ‘야전 병원’은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잘 보전돼 있다고 합니다.

이 노르웨이 ‘야전 병원’을 ‘노르매시’라고 부르는데요,

전쟁 시기는 물론이고, 전후에도 우리 보건의료 분야 증진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노르매시’ 에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사 최대 비극이 시작됩니다.

같은 해, 7월 13일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연합군을 보내기로 뜻을 모읍니다.

16개 나라는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노르웨이는 의료 요원과 위생병을 지원합니다.

그러면서 노르웨이와 이동외과병원을 뜻하는 매시가 합쳐진 ‘노르매시’가 활동에 나섭니다.

1951년 7월 19일 현재의 동두천 지역에 공식적으로 문을 연 겁니다.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지 70년이 됐지만 노르웨이가 당시에 야전병원으로 운영하던 노르매시는 이렇게 잘 보존이 돼있습니다.

작고 허름해 보이지만 이 목조건물은 6.25전쟁의 유산이자 노르웨이와의 혈맹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군부대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는데요.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노르매시는) 최전선 야전외과병원으로 부상자를 긴급후송하여 치료를 담당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에 노르웨이 의료진의 노고를 기억하는 장소이며 현재는 선배 전우들의 피와 땀을 기리는 장소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70여 년 전 당시 사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데 그 때 당시에도 여기가 문이 있었던 자리인가요?) 네 위치는 정확히 맞습니다."]

삶과 죽음이 뒤섞인 치열한 전투에서 다친 장병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분투한 노르매시.

목조건물의 최대 적인 습기와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물 보강은 물론이고, 전기를 공급해서 정기적인 건조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선배 전우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일 텐데요.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의료요원을 파견한 노르웨이는 물론 유엔군 장병들의 희생도 노르매시 야전병원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22개의 유엔 참전국 기념비 가운데 노르웨이 비석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안녕하세요. 저는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입니다."]

일어나선 안 될 6.25 전쟁은 역설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한국과 노르웨이를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저는 여기 올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연대를 상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전후 복구에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전투병 파병 등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다 보니 노르웨이 의회는 대신 의료지원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노르웨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의 단결과 국제적 협력을 핵심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한국에는 의료적 지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르매시는 1954년 11월 10일까지 3년 넘게 운영했는데요.

9만 명 이상의 환자를 돌봤고 만 사천여 명은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개원 초기부터 군의관으로 참여한 베른하르드 페우스 박사는 야전병원에선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노르매시를 찾아온 사람들은 98%의 높은 확률로 생존하였습니다. 이 간호사들은 병원에서만 환자를 치료한 게 아니고 일반 환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의료진 623명 가운데 두 명은 전쟁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요.

이 작은 박물관 한편에 자리한 노르웨이 참전비에서도 7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희생의 의미가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용했던 물품 중 일부가 이곳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전시가 돼 있는데요.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그 당시의 상황을 빛바랜 유물을 통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만나보실까요.

박물관 안에는 노르매시의 활약상이 담긴 사진과 각종 물품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기증과 수집을 통해,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병철/동두천시청 학예연구사 : "대부분 의료도구 같은 경우엔 1954년 전쟁 후에 미군에게 반환한 물품들이 남아있던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물품들을 수집하였고 그 이후에 있던 물품들 같은 경우엔 참전한 군인들이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와서 기증을 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서 저희가 수집하게 됐습니다."]

노르웨이 의료진은 부상자가 군인인지 민간인지, 전장이나 일상생활 어디서 다쳤는지 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은 모든 사람을 사랑의 의술로 대한 것입니다.

[김병철/동두천시청 학예연구사 : "간단한 치료도 있고 맹장수술을 했다는 것도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 다음에 출산과 관련된 내용도 있더라고요. 그 당시 민간인들도 같이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그때 태어났던 분들도 노르웨이에 대해서 좋은 인식을 갖고 있더라고요."]

각종 서적과 사진집, 훈장 사이로 무엇보다 당시에 사용했던 수술 도구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실 같은 경우는 꿰매는 용이고 이거 같은 경우는 (수술부위를) 자르는 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 썼던 것들인가요.) 네. 리포터님 혹시 이건 뭔지 아실까요? (수술대인 거 같은데 맞나요?) 네 수술대 맞습니다. 당시 사용했던 수술대인데요. 남아 있던 걸 저희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노르매시는 우리 사회에 크게 기여합니다.

UN 의료지원국의 공식 임무를 마친 이후에도 노르웨이 의료진들은 한국에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을 도운 겁니다.

그 시점이 전후 재건 사업이 한창인 1958년인데요.

그렇게 시작한 국립중앙의료원은 의료 체계가 변변치 않았던 그 시기, 국민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전쟁 이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와 유엔이 함께 한국의 의료 서비스 재건을 위해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공공의료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피어난 두 나라의 협력과 우정의 연대가 전쟁 이후에도 이어진 겁니다.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도 멀고 낯선 땅에 의료진을 보내준 노르웨이와 전후에도 기꺼이 한국에 남은 의료진들.

이 같은 노르매시의 유산은 두 나라를 지금도 굳게 연결해주며 한반도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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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6·25전쟁 속 야전외과병원 노르매시
    • 입력 2023-06-24 08:21:27
    • 수정2023-06-24 09: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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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내일은 ‘6.25 전쟁’ 7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으로 무려 70 만 명이 넘는 우리 국군과 UN 군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습니다.

당시 유엔 회원국 가운데 6 개 나라가 의료지원 병력을 파견했는데요.

노르웨이, 스웨덴, 인도, 덴마크, 이탈리아 그리고 당시 서독... 이렇게 6 개 나라였죠.

이 가운데 노르웨이가 운영했던 전시 ‘야전 병원’은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잘 보전돼 있다고 합니다.

이 노르웨이 ‘야전 병원’을 ‘노르매시’라고 부르는데요,

전쟁 시기는 물론이고, 전후에도 우리 보건의료 분야 증진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노르매시’ 에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사 최대 비극이 시작됩니다.

같은 해, 7월 13일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연합군을 보내기로 뜻을 모읍니다.

16개 나라는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노르웨이는 의료 요원과 위생병을 지원합니다.

그러면서 노르웨이와 이동외과병원을 뜻하는 매시가 합쳐진 ‘노르매시’가 활동에 나섭니다.

1951년 7월 19일 현재의 동두천 지역에 공식적으로 문을 연 겁니다.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지 70년이 됐지만 노르웨이가 당시에 야전병원으로 운영하던 노르매시는 이렇게 잘 보존이 돼있습니다.

작고 허름해 보이지만 이 목조건물은 6.25전쟁의 유산이자 노르웨이와의 혈맹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군부대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는데요.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노르매시는) 최전선 야전외과병원으로 부상자를 긴급후송하여 치료를 담당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에 노르웨이 의료진의 노고를 기억하는 장소이며 현재는 선배 전우들의 피와 땀을 기리는 장소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70여 년 전 당시 사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데 그 때 당시에도 여기가 문이 있었던 자리인가요?) 네 위치는 정확히 맞습니다."]

삶과 죽음이 뒤섞인 치열한 전투에서 다친 장병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분투한 노르매시.

목조건물의 최대 적인 습기와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물 보강은 물론이고, 전기를 공급해서 정기적인 건조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선배 전우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일 텐데요.

[김병민/상사/8사단 맹호대대 :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의료요원을 파견한 노르웨이는 물론 유엔군 장병들의 희생도 노르매시 야전병원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22개의 유엔 참전국 기념비 가운데 노르웨이 비석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안녕하세요. 저는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입니다."]

일어나선 안 될 6.25 전쟁은 역설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한국과 노르웨이를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저는 여기 올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연대를 상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전후 복구에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전투병 파병 등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다 보니 노르웨이 의회는 대신 의료지원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노르웨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의 단결과 국제적 협력을 핵심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한국에는 의료적 지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르매시는 1954년 11월 10일까지 3년 넘게 운영했는데요.

9만 명 이상의 환자를 돌봤고 만 사천여 명은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개원 초기부터 군의관으로 참여한 베른하르드 페우스 박사는 야전병원에선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노르매시를 찾아온 사람들은 98%의 높은 확률로 생존하였습니다. 이 간호사들은 병원에서만 환자를 치료한 게 아니고 일반 환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의료진 623명 가운데 두 명은 전쟁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요.

이 작은 박물관 한편에 자리한 노르웨이 참전비에서도 7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희생의 의미가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용했던 물품 중 일부가 이곳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전시가 돼 있는데요.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그 당시의 상황을 빛바랜 유물을 통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만나보실까요.

박물관 안에는 노르매시의 활약상이 담긴 사진과 각종 물품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기증과 수집을 통해,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병철/동두천시청 학예연구사 : "대부분 의료도구 같은 경우엔 1954년 전쟁 후에 미군에게 반환한 물품들이 남아있던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물품들을 수집하였고 그 이후에 있던 물품들 같은 경우엔 참전한 군인들이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와서 기증을 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서 저희가 수집하게 됐습니다."]

노르웨이 의료진은 부상자가 군인인지 민간인지, 전장이나 일상생활 어디서 다쳤는지 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은 모든 사람을 사랑의 의술로 대한 것입니다.

[김병철/동두천시청 학예연구사 : "간단한 치료도 있고 맹장수술을 했다는 것도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 다음에 출산과 관련된 내용도 있더라고요. 그 당시 민간인들도 같이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그때 태어났던 분들도 노르웨이에 대해서 좋은 인식을 갖고 있더라고요."]

각종 서적과 사진집, 훈장 사이로 무엇보다 당시에 사용했던 수술 도구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실 같은 경우는 꿰매는 용이고 이거 같은 경우는 (수술부위를) 자르는 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 썼던 것들인가요.) 네. 리포터님 혹시 이건 뭔지 아실까요? (수술대인 거 같은데 맞나요?) 네 수술대 맞습니다. 당시 사용했던 수술대인데요. 남아 있던 걸 저희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노르매시는 우리 사회에 크게 기여합니다.

UN 의료지원국의 공식 임무를 마친 이후에도 노르웨이 의료진들은 한국에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을 도운 겁니다.

그 시점이 전후 재건 사업이 한창인 1958년인데요.

그렇게 시작한 국립중앙의료원은 의료 체계가 변변치 않았던 그 시기, 국민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주한노르웨이 대사 : "전쟁 이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와 유엔이 함께 한국의 의료 서비스 재건을 위해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공공의료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피어난 두 나라의 협력과 우정의 연대가 전쟁 이후에도 이어진 겁니다.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도 멀고 낯선 땅에 의료진을 보내준 노르웨이와 전후에도 기꺼이 한국에 남은 의료진들.

이 같은 노르매시의 유산은 두 나라를 지금도 굳게 연결해주며 한반도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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