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금융 발작의 시간도 평등하지 않을 것이다

입력 2023.10.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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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가는 살얼음판이다. 장기금리 급등이라는 새로운 파도 때문이다. '어디서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대체 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놀란 건지, 이해를 돕는 게 이 기사의 목표다.

■ 긴축 발작의 기억 (2013~2018)

미국 경기가 나 홀로 좋으면 세계 경제는 발작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런 일이 세 번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렇게 했다. 기준금리를 끝까지(제로까지)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돈을 찍었다. (양적완화:QE) 돈이 안 돌면 돌 때까지 무제한으로 돈을 푸는 방식으로. 그게 어느 정도 먹혔다. 미국 때문에 일어난 위기였지만 중국을 빼면 미국의 탈출이 가장 빨랐다.

문제는 미국 혼자만 탈출했단 점이다. 그건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탈출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게 된 건 2013년 5월이다.

미국의 Fed가 '이제 곧 돈은 그만 찍고, 그 다음에 회수도 시작할께'라고 '말'을 했다. 양적 완화를 되돌리는 양적 긴축을 하겠다고 했다. 다만 '예고'였다. 돈은 계속 풀었다.

그랬는데도 세계 경제가 발작했다. 세계 신흥국들의 환율이 급등하고(강달러),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아무것도 안 했고 말만 했는데 '말빨'만으로 발작이 일어났다. 테이퍼텐트럼, 제1차 긴축발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 탓이다. 위기를 잠재운다고 '미국이 무제한으로 푼 돈' 이게 어디로 갔을까? 헤지펀드의 핫머니는 '고수익'을 찾아 신흥국 곳곳에 파고들었다. 시장 유동성을 줄이면 헤지펀드는 '가장 위험한 투자'부터 줄인다. 금융에서 '고위험'은 '고수익'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미 연준이 '회수한다' 하자, 신흥국을 파고들었던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진 것이다.

위기를 일으킨 미국이 홀로 회복되자, 나머지 세계는 따귀를 맞는다. 환율이 치솟고, 주가는 폭락하고, 곳곳에서 기업이 도산한다. 왜 원흉인 월가의 탐욕이 아니라 '나머지 세계'만 아파야 하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다.


2015년 두 번째 발작이 왔다. 같은 일의 반복이다. 미국 경기는 계속 회복해서, 이제 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기준금리도 올린다고 했다. 세계 금융시장이 또 발작했다.

2018년에는 세 번째 발작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다. 당시 미국 주가는 매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때 트럼프는 트윗에 매일 '내가 잘해서'라며 자화자찬을 늘어 놨었다. 과열되면 연준은 할 일을 해야한다. 양적 긴축을 했고 금리도 올렸다. 그리고 세계가 발작했다. (트럼프는 현 연준 의장인 파월 당시 연준의장을 '잘라버리겠다'면서 금리 내리라고 협박을 했다.)

다 같은 이야기다. 미국이 나 홀로 좋아지면 세계는 발작한다.

■ 사이즈와 무관하게, 세계는 같은 '옷'을 입는다

교훈은 이거 하나다. 금융의 관점에서 세계가 입는 '옷'은 하나다. 미국이 입는 옷을 모두가 입어야 한다. 그 옷이 너무 크고 맞지 않으면 미국 아닌 나라는 흘러내린다. 주가도 돈의 가치도.

신흥국의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수출은 하지만 단가가 오르지 않고, 수출량도 크게 늘지 않는다. 그냥 입에 풀칠만 하고 살고 있는데, 그 와중에 '돈을 빌리는 것'은 너무 쉽다. 특히 외국에서 들어온 돈이 '넘친다'. 이래서 금융이 중요한가보다, 하며 그 돈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그 돈은 미국의 상황이 조금만 좋아지면, (그래서 미국이 긴축을 해야 하면) 썰물처럼 빠질 것이고, 그때 '몸에 맞지 않는 옷'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안 그래도 아픈 몸은 더 욱신거린다. '너무 아프니 그만좀 해라'고 소리쳐봐야 소용없다. 미국의 연준은 "돈을 무제한으로 풀 수는 없다, 언젠가 이 돈잔치는 끝내야 한다, 지금이 그 언젠가다"면서 돈줄을 죈다.

그러니까 미국이 만드는 금융환경은 다른 모든 나라에 강제된다. 그리고 강제받는 나라들은 대부분 미국처럼 돈 푸는 방식으로 해결할 생각은 할 수 없다. 더 큰 폭풍에 빠져들 뿐이다. 그게 21세기의 세계 금융의 속성이다.

■ 이번엔 '수준에 맞지 않는 시장금리'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엔 달랐다. 앞선 세 차례 긴축발작은 '미국의 양적 긴축'이나 '기준금리 인상' 같은 이벤트가 촉발했다. 반면 코로나19 이후엔 '양적 긴축'을 해도 '기준금리 인상'을 해도 그런 긴축발작이 없었다. 위 그래프를 보면 연준은 이미 2022년 초부터 풀린 돈을 급히 죄고 있다.

워낙에 전 세계가 다 함께 인플레이션을 겪어서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미국이 기준금리를 5%p 넘게 올렸는데도 멀쩡했으니 분명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텐트럼은 없는 것일까 싶던 찰나에, 올 것이 왔다. 도화선은 다르지만, 지금 세계 금융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바로 '장기 국채금리'라는 화약고가 달아오르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그린 주요국가의 10년 장기 국채금리 추이다. 우상향하는 추세, 이건 고금리 때문이다. 올해 2분기까지 각국이 줄기차게 금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가장 최근, 그래프의 오른쪽 끝 부분이다. 최근 한두 달 급격히 꼬리가 위로 치솟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 그래프엔 없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장기금리가 치솟고 있다. 동시에 강달러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유는 다 알고 있다. 미국 연준이 '더 오랫동안 더 높은 금리(Higher for Longer)'를 외쳤기 때문이다. 미국 경기가 생각보다 더 좋아서 연착륙이 가능할 것 같다면서 '경기가 좋아서 고금리는 상당 기간 지속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을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아래 기사를 클릭하자.
☞ 연준의 ‘한 번 더’, 시장은 ‘글쎄’하면서도 머리가 아픈 이유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79588

이게 세계가 다시 한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체제 위기를 걱정하게 하는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독일은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다. 한국은 '상저하저'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너무 좋다. 그래서 '더 오래 금리 인상을 지속한다'는 언급이 나왔다.

그러자 그동안 참고 있던 장기금리가 '튀기' 시작했다. 미국이 예상보다 '더 오래 고금리'를 가져가게 됐으니, 이제 이 고금리가 잠시 그러고 지나갈 일시적 현상이란 기대를 접게 된 것이다.

신흥국과 돈을 찍어낼 수 없는 국가들의 고통은 언제나처럼 상수다. 금융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 '발작의 시간'은 장기 금리 급등이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렇다면 그 후폭풍도 앞선 세 발작과는 다를 것이다.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개를 5가지 상황을 통해 짚어보면, 그 심각성이 그려질 것이다.

■ 이탈리아와 일본이 루비콘강을 건너나?

1.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는 우선 이탈리아를 걱정한다. 위 장기금리 그래프에 어색하게도 '이탈리아'가 들어가 있는 이유다. 지금 이탈리아의 장기 금리는 4.9% 수준까지 치솟았다. 2012년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 수준이다. 이 환경에서 이탈리아가 빚을 온전히 상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이 저명한 영국잡지의 판단이다.

저성장 침체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 경제가 '갑자기 급격한 성장을 하거나, 아니면 정부가 급격한 긴축을 하거나' 해야 해결할 수 있는데 둘 다 가능성이 없다. 그럼 빚을 더 내야 한다. 이탈리아 국채 금리는 더 치솟을 수밖에 없고, 이탈리아에 돈 빌려준 투자자들은 '돌려받지 못할까봐' 잠을 못 잔다.

2.
일본도 요주의 국가다. 일본 중앙은행은 지난 4일 120억 달러어치의 자국 채권을 매입했다. 일주일 전 20억 달러어치를 매입했는데, 그 여섯 배를 더 샀다. 이런 경우 이유는 거의 하나다. 20억 달러는 약발이 안 받아서, 더 많이 샀다.

앞서 1년 전, 환율 방어를 위해 24년 만에 외환시장에 개입한 일본이다. 또 반복된 개입, 엔저가 오면 올수록 좋다며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던 일본이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환율이 너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달러당 150엔 선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또 장기채 금리도 심상찮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장에 직접 개입(YCC)해서 장기 국채금리를 0% 안팎으로 유지시키는데, 이 장기채 금리가 0.8% 수준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준금리 고공행진이 지속될 거라는 시장의 두려움이 '무슨 일이 있어도 꿈쩍 않던' 일본 시장금리까지 움직이고 있단 얘기다.

일본은 물론 기축통화 국가이고, 자산이 너무나도 많은 나라지만 나랏빚 또한 천문학적인 나라다. 시장의 금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면 빚더미 위 일본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래서 만약 '정말 저금리 시대가 끝난 것이라면, 조만간 금융의 루비콘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 좀비 기업, 취약 은행, 부동산 투자회사도 떨고 있다

3.
기업들은 2008년 이후 버티는 게 일이었다. 이윤으로 이자 내기 바빴다. 그나마 저금리가 지속되어서 사실상 이윤을 못내도 버틸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는 정부가 나서서 도와줬다. 일단 보릿고개를 버티고 보자고, 좋은 날이 올거라고 했는데, 온 것은 장기금리가 7~8%에 달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잠시 그러고 말 것이란 기대가 시장을 지배했는데, 이제 그 또한 사라지고 있다. 돈을 빌리기 자체가 어려운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의 전개과정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기업 채권시장에선 돈을 빌릴 수 없는 자금 경색이 지속됐다. 은행들이 은행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하고, 전기요금으론 기름과 가스를 살 수 없는 한전이 한전채를 찍어냈다. 대기업조차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 둔촌주공 같은 우량 건설 프로젝트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치솟았던 금리는 정부가 나서서 '돈을 대겠다'고 안심시켜준 뒤 가까스로 낮아졌지만, 이번 '고금리'는 사정이 완전 다르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릴래'라고 하기 전에는 이 고금리가 해소되기 어렵다. 세계 금융은 몸에 맞는지와 무관하게 미국이 주는 옷을 입는 곳이니까.

좀비기업 최후의 날이 도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온다면 좀비기업만 집어삼키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4.
취약은행에도 위기의 순간이 올 수 있다. 올 봄 실리콘밸리은행 SVB은 쉽게 현금으로 만들기 어려운 장기채권을 샀다가 뱅크런이 발생하자 파산했다. 비유동성 자산을 너무 많이 가졌다는 취약점이 도화선이 되었다.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이 그랬고, 그 와중에 스위스를 대표하던 양대 금융회사 가운데 하나인 크레디트스위스가 무너졌다.

이번 고금리 상황 역시 은행들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단순 비유동성 자산 문제는 크지 않다고 해도, 장기금리 상승으로 인한 보유채권의 미실현 손실은 거대해진 상황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미국 은행들의 미실현 손실이 역사상 최고 수준인 4,0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미국 은행 주가가 지난달 평균 8.5% 빠졌다. 큰 은행 가운데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손실이 크다.

5.
부동산 투자회사들의 고통도 본격화될 것이다. 이들은 주로 장기금리에 기반해 자산 평가를 받는다. 장기금리가 고공행진하면 만기 상환과 대출 연장을 앞둔 기업들은 자금 운영과 자산가치 평가 양 측면에서 압박받게 될 것이다.

일반 부동산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기준금리가 5%를 넘는데도, 미국의 주거용 부동산 시장이 받은 충격이 크지 않은 이유는 기존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이 대부분 장기 고정금리인 영향이 크다. 저금리 시절 받은 고정금리가 변하지 않아서다.

그러나 신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7~8% 대인 상황이 장기 지속하게 된다면, 미국의 주택시장 역시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그 때 미국 금융시장이 받는 충격은 오롯이 세계가 다 함께 겪는 충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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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온 금융 발작의 시간도 평등하지 않을 것이다
    • 입력 2023-10-10 08: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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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가는 살얼음판이다. 장기금리 급등이라는 새로운 파도 때문이다. '어디서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대체 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놀란 건지, 이해를 돕는 게 이 기사의 목표다.

■ 긴축 발작의 기억 (2013~2018)

미국 경기가 나 홀로 좋으면 세계 경제는 발작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런 일이 세 번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렇게 했다. 기준금리를 끝까지(제로까지)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돈을 찍었다. (양적완화:QE) 돈이 안 돌면 돌 때까지 무제한으로 돈을 푸는 방식으로. 그게 어느 정도 먹혔다. 미국 때문에 일어난 위기였지만 중국을 빼면 미국의 탈출이 가장 빨랐다.

문제는 미국 혼자만 탈출했단 점이다. 그건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탈출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게 된 건 2013년 5월이다.

미국의 Fed가 '이제 곧 돈은 그만 찍고, 그 다음에 회수도 시작할께'라고 '말'을 했다. 양적 완화를 되돌리는 양적 긴축을 하겠다고 했다. 다만 '예고'였다. 돈은 계속 풀었다.

그랬는데도 세계 경제가 발작했다. 세계 신흥국들의 환율이 급등하고(강달러),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아무것도 안 했고 말만 했는데 '말빨'만으로 발작이 일어났다. 테이퍼텐트럼, 제1차 긴축발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 탓이다. 위기를 잠재운다고 '미국이 무제한으로 푼 돈' 이게 어디로 갔을까? 헤지펀드의 핫머니는 '고수익'을 찾아 신흥국 곳곳에 파고들었다. 시장 유동성을 줄이면 헤지펀드는 '가장 위험한 투자'부터 줄인다. 금융에서 '고위험'은 '고수익'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미 연준이 '회수한다' 하자, 신흥국을 파고들었던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진 것이다.

위기를 일으킨 미국이 홀로 회복되자, 나머지 세계는 따귀를 맞는다. 환율이 치솟고, 주가는 폭락하고, 곳곳에서 기업이 도산한다. 왜 원흉인 월가의 탐욕이 아니라 '나머지 세계'만 아파야 하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다.


2015년 두 번째 발작이 왔다. 같은 일의 반복이다. 미국 경기는 계속 회복해서, 이제 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기준금리도 올린다고 했다. 세계 금융시장이 또 발작했다.

2018년에는 세 번째 발작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다. 당시 미국 주가는 매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때 트럼프는 트윗에 매일 '내가 잘해서'라며 자화자찬을 늘어 놨었다. 과열되면 연준은 할 일을 해야한다. 양적 긴축을 했고 금리도 올렸다. 그리고 세계가 발작했다. (트럼프는 현 연준 의장인 파월 당시 연준의장을 '잘라버리겠다'면서 금리 내리라고 협박을 했다.)

다 같은 이야기다. 미국이 나 홀로 좋아지면 세계는 발작한다.

■ 사이즈와 무관하게, 세계는 같은 '옷'을 입는다

교훈은 이거 하나다. 금융의 관점에서 세계가 입는 '옷'은 하나다. 미국이 입는 옷을 모두가 입어야 한다. 그 옷이 너무 크고 맞지 않으면 미국 아닌 나라는 흘러내린다. 주가도 돈의 가치도.

신흥국의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수출은 하지만 단가가 오르지 않고, 수출량도 크게 늘지 않는다. 그냥 입에 풀칠만 하고 살고 있는데, 그 와중에 '돈을 빌리는 것'은 너무 쉽다. 특히 외국에서 들어온 돈이 '넘친다'. 이래서 금융이 중요한가보다, 하며 그 돈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그 돈은 미국의 상황이 조금만 좋아지면, (그래서 미국이 긴축을 해야 하면) 썰물처럼 빠질 것이고, 그때 '몸에 맞지 않는 옷'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안 그래도 아픈 몸은 더 욱신거린다. '너무 아프니 그만좀 해라'고 소리쳐봐야 소용없다. 미국의 연준은 "돈을 무제한으로 풀 수는 없다, 언젠가 이 돈잔치는 끝내야 한다, 지금이 그 언젠가다"면서 돈줄을 죈다.

그러니까 미국이 만드는 금융환경은 다른 모든 나라에 강제된다. 그리고 강제받는 나라들은 대부분 미국처럼 돈 푸는 방식으로 해결할 생각은 할 수 없다. 더 큰 폭풍에 빠져들 뿐이다. 그게 21세기의 세계 금융의 속성이다.

■ 이번엔 '수준에 맞지 않는 시장금리'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엔 달랐다. 앞선 세 차례 긴축발작은 '미국의 양적 긴축'이나 '기준금리 인상' 같은 이벤트가 촉발했다. 반면 코로나19 이후엔 '양적 긴축'을 해도 '기준금리 인상'을 해도 그런 긴축발작이 없었다. 위 그래프를 보면 연준은 이미 2022년 초부터 풀린 돈을 급히 죄고 있다.

워낙에 전 세계가 다 함께 인플레이션을 겪어서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미국이 기준금리를 5%p 넘게 올렸는데도 멀쩡했으니 분명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텐트럼은 없는 것일까 싶던 찰나에, 올 것이 왔다. 도화선은 다르지만, 지금 세계 금융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바로 '장기 국채금리'라는 화약고가 달아오르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그린 주요국가의 10년 장기 국채금리 추이다. 우상향하는 추세, 이건 고금리 때문이다. 올해 2분기까지 각국이 줄기차게 금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가장 최근, 그래프의 오른쪽 끝 부분이다. 최근 한두 달 급격히 꼬리가 위로 치솟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 그래프엔 없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장기금리가 치솟고 있다. 동시에 강달러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유는 다 알고 있다. 미국 연준이 '더 오랫동안 더 높은 금리(Higher for Longer)'를 외쳤기 때문이다. 미국 경기가 생각보다 더 좋아서 연착륙이 가능할 것 같다면서 '경기가 좋아서 고금리는 상당 기간 지속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을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아래 기사를 클릭하자.
☞ 연준의 ‘한 번 더’, 시장은 ‘글쎄’하면서도 머리가 아픈 이유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79588

이게 세계가 다시 한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체제 위기를 걱정하게 하는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독일은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다. 한국은 '상저하저'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너무 좋다. 그래서 '더 오래 금리 인상을 지속한다'는 언급이 나왔다.

그러자 그동안 참고 있던 장기금리가 '튀기' 시작했다. 미국이 예상보다 '더 오래 고금리'를 가져가게 됐으니, 이제 이 고금리가 잠시 그러고 지나갈 일시적 현상이란 기대를 접게 된 것이다.

신흥국과 돈을 찍어낼 수 없는 국가들의 고통은 언제나처럼 상수다. 금융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 '발작의 시간'은 장기 금리 급등이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렇다면 그 후폭풍도 앞선 세 발작과는 다를 것이다.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개를 5가지 상황을 통해 짚어보면, 그 심각성이 그려질 것이다.

■ 이탈리아와 일본이 루비콘강을 건너나?

1.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는 우선 이탈리아를 걱정한다. 위 장기금리 그래프에 어색하게도 '이탈리아'가 들어가 있는 이유다. 지금 이탈리아의 장기 금리는 4.9% 수준까지 치솟았다. 2012년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 수준이다. 이 환경에서 이탈리아가 빚을 온전히 상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이 저명한 영국잡지의 판단이다.

저성장 침체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 경제가 '갑자기 급격한 성장을 하거나, 아니면 정부가 급격한 긴축을 하거나' 해야 해결할 수 있는데 둘 다 가능성이 없다. 그럼 빚을 더 내야 한다. 이탈리아 국채 금리는 더 치솟을 수밖에 없고, 이탈리아에 돈 빌려준 투자자들은 '돌려받지 못할까봐' 잠을 못 잔다.

2.
일본도 요주의 국가다. 일본 중앙은행은 지난 4일 120억 달러어치의 자국 채권을 매입했다. 일주일 전 20억 달러어치를 매입했는데, 그 여섯 배를 더 샀다. 이런 경우 이유는 거의 하나다. 20억 달러는 약발이 안 받아서, 더 많이 샀다.

앞서 1년 전, 환율 방어를 위해 24년 만에 외환시장에 개입한 일본이다. 또 반복된 개입, 엔저가 오면 올수록 좋다며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던 일본이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환율이 너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달러당 150엔 선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또 장기채 금리도 심상찮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장에 직접 개입(YCC)해서 장기 국채금리를 0% 안팎으로 유지시키는데, 이 장기채 금리가 0.8% 수준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준금리 고공행진이 지속될 거라는 시장의 두려움이 '무슨 일이 있어도 꿈쩍 않던' 일본 시장금리까지 움직이고 있단 얘기다.

일본은 물론 기축통화 국가이고, 자산이 너무나도 많은 나라지만 나랏빚 또한 천문학적인 나라다. 시장의 금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면 빚더미 위 일본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래서 만약 '정말 저금리 시대가 끝난 것이라면, 조만간 금융의 루비콘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 좀비 기업, 취약 은행, 부동산 투자회사도 떨고 있다

3.
기업들은 2008년 이후 버티는 게 일이었다. 이윤으로 이자 내기 바빴다. 그나마 저금리가 지속되어서 사실상 이윤을 못내도 버틸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는 정부가 나서서 도와줬다. 일단 보릿고개를 버티고 보자고, 좋은 날이 올거라고 했는데, 온 것은 장기금리가 7~8%에 달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잠시 그러고 말 것이란 기대가 시장을 지배했는데, 이제 그 또한 사라지고 있다. 돈을 빌리기 자체가 어려운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의 전개과정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기업 채권시장에선 돈을 빌릴 수 없는 자금 경색이 지속됐다. 은행들이 은행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하고, 전기요금으론 기름과 가스를 살 수 없는 한전이 한전채를 찍어냈다. 대기업조차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 둔촌주공 같은 우량 건설 프로젝트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치솟았던 금리는 정부가 나서서 '돈을 대겠다'고 안심시켜준 뒤 가까스로 낮아졌지만, 이번 '고금리'는 사정이 완전 다르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릴래'라고 하기 전에는 이 고금리가 해소되기 어렵다. 세계 금융은 몸에 맞는지와 무관하게 미국이 주는 옷을 입는 곳이니까.

좀비기업 최후의 날이 도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온다면 좀비기업만 집어삼키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4.
취약은행에도 위기의 순간이 올 수 있다. 올 봄 실리콘밸리은행 SVB은 쉽게 현금으로 만들기 어려운 장기채권을 샀다가 뱅크런이 발생하자 파산했다. 비유동성 자산을 너무 많이 가졌다는 취약점이 도화선이 되었다.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이 그랬고, 그 와중에 스위스를 대표하던 양대 금융회사 가운데 하나인 크레디트스위스가 무너졌다.

이번 고금리 상황 역시 은행들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단순 비유동성 자산 문제는 크지 않다고 해도, 장기금리 상승으로 인한 보유채권의 미실현 손실은 거대해진 상황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미국 은행들의 미실현 손실이 역사상 최고 수준인 4,0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미국 은행 주가가 지난달 평균 8.5% 빠졌다. 큰 은행 가운데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손실이 크다.

5.
부동산 투자회사들의 고통도 본격화될 것이다. 이들은 주로 장기금리에 기반해 자산 평가를 받는다. 장기금리가 고공행진하면 만기 상환과 대출 연장을 앞둔 기업들은 자금 운영과 자산가치 평가 양 측면에서 압박받게 될 것이다.

일반 부동산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기준금리가 5%를 넘는데도, 미국의 주거용 부동산 시장이 받은 충격이 크지 않은 이유는 기존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이 대부분 장기 고정금리인 영향이 크다. 저금리 시절 받은 고정금리가 변하지 않아서다.

그러나 신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7~8% 대인 상황이 장기 지속하게 된다면, 미국의 주택시장 역시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그 때 미국 금융시장이 받는 충격은 오롯이 세계가 다 함께 겪는 충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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