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전쟁이 남긴 상처…납북자 가족의 눈물

입력 2023.12.09 (08:19) 수정 2023.12.0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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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달 14일, 통일부는 11년 만에 ‘납북자대책위원회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납북자 문제 해결 논의를 시작했죠.

이 회의는 북한에 의해 납치되거나 본인 의사에 반해 억류된 우리 국민, 국군포로 등을 송환하기 위한 범정부 협의체인데요.

현재 북한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고, 우리 측의 생사 확인과 송환 요구도 묵살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남겨진 가족들은 긴 세월 힘들게 이별의 아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풀어낸 특별전시회가 있어 최효은 리포터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그리움이 담긴 곳, 파주 임진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념관이 하나 있습니다.

6.25 전쟁 납북자를 다룬 유일한 장소입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납북자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6년 전 마련된 곳인데요.

최근 이곳에선,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개관 6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인권, 잊혀지지 않을 권리’라는 주제의 특별전입니다.

전쟁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납북자들의 이야기와 남겨진 이들의 통한의 세원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전시는, 함께 지낼 ‘권리’를 빼앗긴 납북자 가족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됐습니다.

납북자들이 겪은 생이별의 고통이 점차 우리 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이 사진은 납북자 유인선 씨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에요. 유인선 씨의 얼굴을 희미하고 흐려지게 저희가 표현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는 납북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포스터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남한 각 분야의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강제로 끌고 갔는데, 상당수가 청장년층 남성이었습니다.

납북자 하격홍 씨의 아내, 성갑순 씨가 쓴 41권의 일기에는 남편의 빈자리가 남긴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폐허가 된 집터에서 좌판을 벌여서 홀로 세자매를 키우면서 겪었던 그런 심적인 아픔과 고통, 그리고 어려움들을 약 40년 동안 쓰신 일기장이에요."]

6.25 전쟁 민간인 납북자들의 사연은 가족들의 기증 유물과 함께 기념관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여기 이분이 전봉빈 선생님이세요. 전봉빈 선생님은 국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시다 납북이 되셨는데요."]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이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들이 전시나 사진을 보는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는 안타까운 감정인 것 같아요."]

대학 졸업증서와 빼곡하게 적힌 법 연구 노트, 결혼사진과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에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담겨있습니다.

사진 속 아이인 전봉빈 씨의 아들 태희 씨는 1950년 8월 7일,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친척 집에 피신했던 아버지가 잠시 집에 들렀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군이 끌고 간 것입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제가 9살이었기 때문에 거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전 아무개(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고 하니까 바로 (북한) 정치보위부 사람이 파출소에서 올라온 거예요. 셋이서 지프를 끌고 올라 왔다고요. 그래서 바로 끌려간 거예요. 그래서 그 서늘한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해요."]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28살부터 지방의 군수를 지냈고, 전쟁 직전엔 국회에서 법을 연구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자 자랑이었는데요.

특히, 가족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따스했다고 합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아버지고 어머니인데 내가 처음 숟가락을 들었다고 찍은 거래. 그러니깐 이렇게 자상한 양반이야."]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다섯 남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내색조차 못 했는데요.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아버지는 이북에 가서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우리 힘들었던 거 그런 거 생각하면 아버지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한 거야. (그래도) 우리는 어머니하고 형제들하고 부대끼면서 살았어요."]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바랐지만, 납북 이후 아버지의 행방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입니다.

전태희 씨는 오랜 세월 참아왔던 아쉬움과 회한을 전합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사실 정부가 자국민 보호 책임을 방기했다. 직무 유기했다. 거기에 대한 걸 보장해라. 내가 지금 하나 바라는 건 이제 세월이 다 지나갔고 잘잘못 떠나서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어딨는지 그거라도 찾고 싶다."]

역대 정부는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지만 때로는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도 했고 또 때로는 북한의 대응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납북자 가족들에겐 포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납북자 가족들은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현재까지도 피해 명부를 조사하며,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직 접수를 못 한 피해 인원을 합치면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 북한의 계획된 납치라고 가족들은 말합니다.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1946년 7월 31일 (발표한) 김일성 담화문이 있어요. ‘남한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그 담화문이 있거든요."]

이들에겐 이별의 고통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2010년 관련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분단의 현실에서 만들어진 편향된 시선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그때 간첩들이 많이 넘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납북한 사람들을 (북한에서) 교육해서 남파한다는 그런 소문이 이렇게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납북자가족회가 흐지부지됐고, 연좌제도 생기고 이랬거든요."]

기념관에선 이번 특별전시에 맞춰, 6·25전쟁 납북자 명부를 종합한 첫 연구자료집을 내놓았습니다.

또 지난달 14일 열린 납북자대책위원회는 국제 사회에 관련 문제를 공론화하고 북한에 억류 국민의 즉각 송환과 생사 확인을 강력히 요구하기로 했는데요.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또 하나는 제가 6.25 마지막 세대인데 지금 거의 80세가 넘고 또 많이 1세대가 돌아가신 분들이 많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건 어쨌든 간에 납북 사실이 많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 여기에 납북자기념관이 이렇게 있다는 것도 사실은 거의 모르세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북한이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그 뒤엔 남북이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중심으로 국제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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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전쟁이 남긴 상처…납북자 가족의 눈물
    • 입력 2023-12-09 08:19:17
    • 수정2023-12-09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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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달 14일, 통일부는 11년 만에 ‘납북자대책위원회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납북자 문제 해결 논의를 시작했죠.

이 회의는 북한에 의해 납치되거나 본인 의사에 반해 억류된 우리 국민, 국군포로 등을 송환하기 위한 범정부 협의체인데요.

현재 북한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고, 우리 측의 생사 확인과 송환 요구도 묵살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남겨진 가족들은 긴 세월 힘들게 이별의 아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풀어낸 특별전시회가 있어 최효은 리포터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그리움이 담긴 곳, 파주 임진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념관이 하나 있습니다.

6.25 전쟁 납북자를 다룬 유일한 장소입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납북자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6년 전 마련된 곳인데요.

최근 이곳에선,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개관 6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인권, 잊혀지지 않을 권리’라는 주제의 특별전입니다.

전쟁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납북자들의 이야기와 남겨진 이들의 통한의 세원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전시는, 함께 지낼 ‘권리’를 빼앗긴 납북자 가족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됐습니다.

납북자들이 겪은 생이별의 고통이 점차 우리 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이 사진은 납북자 유인선 씨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에요. 유인선 씨의 얼굴을 희미하고 흐려지게 저희가 표현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는 납북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포스터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남한 각 분야의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강제로 끌고 갔는데, 상당수가 청장년층 남성이었습니다.

납북자 하격홍 씨의 아내, 성갑순 씨가 쓴 41권의 일기에는 남편의 빈자리가 남긴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폐허가 된 집터에서 좌판을 벌여서 홀로 세자매를 키우면서 겪었던 그런 심적인 아픔과 고통, 그리고 어려움들을 약 40년 동안 쓰신 일기장이에요."]

6.25 전쟁 민간인 납북자들의 사연은 가족들의 기증 유물과 함께 기념관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여기 이분이 전봉빈 선생님이세요. 전봉빈 선생님은 국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시다 납북이 되셨는데요."]

[윤소라/통일부 학예연구사 : "이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들이 전시나 사진을 보는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는 안타까운 감정인 것 같아요."]

대학 졸업증서와 빼곡하게 적힌 법 연구 노트, 결혼사진과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에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담겨있습니다.

사진 속 아이인 전봉빈 씨의 아들 태희 씨는 1950년 8월 7일,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친척 집에 피신했던 아버지가 잠시 집에 들렀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군이 끌고 간 것입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제가 9살이었기 때문에 거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전 아무개(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고 하니까 바로 (북한) 정치보위부 사람이 파출소에서 올라온 거예요. 셋이서 지프를 끌고 올라 왔다고요. 그래서 바로 끌려간 거예요. 그래서 그 서늘한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해요."]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28살부터 지방의 군수를 지냈고, 전쟁 직전엔 국회에서 법을 연구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자 자랑이었는데요.

특히, 가족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따스했다고 합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아버지고 어머니인데 내가 처음 숟가락을 들었다고 찍은 거래. 그러니깐 이렇게 자상한 양반이야."]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다섯 남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내색조차 못 했는데요.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아버지는 이북에 가서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우리 힘들었던 거 그런 거 생각하면 아버지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한 거야. (그래도) 우리는 어머니하고 형제들하고 부대끼면서 살았어요."]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바랐지만, 납북 이후 아버지의 행방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입니다.

전태희 씨는 오랜 세월 참아왔던 아쉬움과 회한을 전합니다.

[전태희/납북자 전봉빈 씨 아들 : "사실 정부가 자국민 보호 책임을 방기했다. 직무 유기했다. 거기에 대한 걸 보장해라. 내가 지금 하나 바라는 건 이제 세월이 다 지나갔고 잘잘못 떠나서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어딨는지 그거라도 찾고 싶다."]

역대 정부는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지만 때로는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도 했고 또 때로는 북한의 대응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납북자 가족들에겐 포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납북자 가족들은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현재까지도 피해 명부를 조사하며,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직 접수를 못 한 피해 인원을 합치면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 북한의 계획된 납치라고 가족들은 말합니다.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1946년 7월 31일 (발표한) 김일성 담화문이 있어요. ‘남한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그 담화문이 있거든요."]

이들에겐 이별의 고통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2010년 관련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분단의 현실에서 만들어진 편향된 시선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그때 간첩들이 많이 넘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납북한 사람들을 (북한에서) 교육해서 남파한다는 그런 소문이 이렇게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납북자가족회가 흐지부지됐고, 연좌제도 생기고 이랬거든요."]

기념관에선 이번 특별전시에 맞춰, 6·25전쟁 납북자 명부를 종합한 첫 연구자료집을 내놓았습니다.

또 지난달 14일 열린 납북자대책위원회는 국제 사회에 관련 문제를 공론화하고 북한에 억류 국민의 즉각 송환과 생사 확인을 강력히 요구하기로 했는데요.

[이성의/(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또 하나는 제가 6.25 마지막 세대인데 지금 거의 80세가 넘고 또 많이 1세대가 돌아가신 분들이 많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건 어쨌든 간에 납북 사실이 많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 여기에 납북자기념관이 이렇게 있다는 것도 사실은 거의 모르세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북한이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그 뒤엔 남북이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중심으로 국제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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