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의 참상”…‘대리 외상증후군’에 빠진 주변인의 악몽

입력 2024.02.27 (20:08) 수정 2024.02.2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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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 탐사기획 '재난과 악몽',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재난을 직접 겪진 않아도, 참상을 눈앞에서 지켜봤다면 심리적 외상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대리 외상증후군'이라고 하는데, 현장에서 동료를 잃은 노동자나, 참사 현장을 반복 취재한 기자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정현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36년 차 노동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박찬구입니다."]

평생 현장에서 철골 구조물을 나른 박 씨.

아슬한 일은 늘 있었고, 조심했지만 불안했습니다.

24년 전 그날, 실수라고는 없었건만 재해는 돌연히 찾아왔습니다.

[박찬구/산업 현장 노동자 : "그냥 압사한다고 그러잖아요. 큰 인양함이 떨어지면서 바로 (동료) 머리 부분을 때려서…. 그렇게 내 동료가 내 눈앞에서 돌아가셨는데 바로 시신을 수습하고, 바로 피 닦고, 바로 또 작업을 진행한다는 게…."]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은 여태 박 씨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꾸 그런 게 이제 머릿속에 있다 보니까, 트라우마로 계속 자리 잡고 있다 보니까…."]

["(정부가 혹은 회사가 당신 괜찮습니까? 당신 마음 괜찮습니까? 이렇게 물어본 적 있나요?)"]

["그런 걸 물어볼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자마자 작업을 시키겠습니까?"]

["안녕하세요. 충북일보 사회부에서 기자를 하고 있는 임성민이라고 하고요. 지난해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참사를 현장 취재한 기자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며 밀어내기 어려운 참상에 차마 냉정할 수 없습니다.

[임성민/충북일보 기자 : "시신이 하나 나오더라고요. 발만, 발바닥만 보였었거든요. 그걸 (유족이) 보시고 자기 가족인 걸 직감하시더라고요. 그러고서 막 오열을 하시는데…."]

비극의 현장은 참담했으나 매 순간 고개를 들고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떠오르는 지독한 잔상을 뒤따라 우울감은 불현듯 찾아옵니다.

["냄새라든지, 여러 가지 현장에서 절규하던 유가족분들의 모습이라든지, 군인, 소방관들이 구명 보트를 타고 들어가던 모습이라든지, 이런 아직 가시지 않은 참상이…."]

재난 당사자가 아닌데도 마치 자신에게 그 일이 닥친 것처럼 비탄과 상실에 빠지는 '대리 외상증후군'.

공포와 무기력, 분노, 불안으로 이어지는 심리 변화를 겪게 되는데, 재난의 직접 피해자와 같은 수준의 심리적 외상을 겪을 수 있는 만큼 치료적 개입과 관심이 필요하지만, 직접적인 보호 장치는 부족합니다.

동료의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에게 심리 상담을 위한 휴가를 보장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는 사업주는 벌하자는 법안이 이제 막 발의됐을 뿐입니다.

[최윤경/계명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 "누구나 그 재난과 트라우마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거고요. 재난의 피해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직종과 다양한 관련자가 있다는 인식을 갖고, 필요하면 누구나 심리 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대리 외상 증후군은 의료진이나 소방관, 경찰관은 물론,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누구도 쉽게 비켜 갈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주변인들의 악몽은, 보다 깊숙이 파고 들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공감대는 아직 넓게 퍼져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오정현입니다.

촬영기자:한문현·김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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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앞의 참상”…‘대리 외상증후군’에 빠진 주변인의 악몽
    • 입력 2024-02-27 20:08:16
    • 수정2024-02-27 20:35:44
    뉴스7(전주)
[앵커]

KBS 탐사기획 '재난과 악몽',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재난을 직접 겪진 않아도, 참상을 눈앞에서 지켜봤다면 심리적 외상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대리 외상증후군'이라고 하는데, 현장에서 동료를 잃은 노동자나, 참사 현장을 반복 취재한 기자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정현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36년 차 노동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박찬구입니다."]

평생 현장에서 철골 구조물을 나른 박 씨.

아슬한 일은 늘 있었고, 조심했지만 불안했습니다.

24년 전 그날, 실수라고는 없었건만 재해는 돌연히 찾아왔습니다.

[박찬구/산업 현장 노동자 : "그냥 압사한다고 그러잖아요. 큰 인양함이 떨어지면서 바로 (동료) 머리 부분을 때려서…. 그렇게 내 동료가 내 눈앞에서 돌아가셨는데 바로 시신을 수습하고, 바로 피 닦고, 바로 또 작업을 진행한다는 게…."]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은 여태 박 씨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꾸 그런 게 이제 머릿속에 있다 보니까, 트라우마로 계속 자리 잡고 있다 보니까…."]

["(정부가 혹은 회사가 당신 괜찮습니까? 당신 마음 괜찮습니까? 이렇게 물어본 적 있나요?)"]

["그런 걸 물어볼 정도 되는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자마자 작업을 시키겠습니까?"]

["안녕하세요. 충북일보 사회부에서 기자를 하고 있는 임성민이라고 하고요. 지난해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참사를 현장 취재한 기자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며 밀어내기 어려운 참상에 차마 냉정할 수 없습니다.

[임성민/충북일보 기자 : "시신이 하나 나오더라고요. 발만, 발바닥만 보였었거든요. 그걸 (유족이) 보시고 자기 가족인 걸 직감하시더라고요. 그러고서 막 오열을 하시는데…."]

비극의 현장은 참담했으나 매 순간 고개를 들고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떠오르는 지독한 잔상을 뒤따라 우울감은 불현듯 찾아옵니다.

["냄새라든지, 여러 가지 현장에서 절규하던 유가족분들의 모습이라든지, 군인, 소방관들이 구명 보트를 타고 들어가던 모습이라든지, 이런 아직 가시지 않은 참상이…."]

재난 당사자가 아닌데도 마치 자신에게 그 일이 닥친 것처럼 비탄과 상실에 빠지는 '대리 외상증후군'.

공포와 무기력, 분노, 불안으로 이어지는 심리 변화를 겪게 되는데, 재난의 직접 피해자와 같은 수준의 심리적 외상을 겪을 수 있는 만큼 치료적 개입과 관심이 필요하지만, 직접적인 보호 장치는 부족합니다.

동료의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에게 심리 상담을 위한 휴가를 보장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는 사업주는 벌하자는 법안이 이제 막 발의됐을 뿐입니다.

[최윤경/계명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 "누구나 그 재난과 트라우마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거고요. 재난의 피해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직종과 다양한 관련자가 있다는 인식을 갖고, 필요하면 누구나 심리 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대리 외상 증후군은 의료진이나 소방관, 경찰관은 물론,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누구도 쉽게 비켜 갈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주변인들의 악몽은, 보다 깊숙이 파고 들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공감대는 아직 넓게 퍼져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오정현입니다.

촬영기자:한문현·김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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