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정세민 할아버지의 ‘70여 년 홀로서기’
입력 2024.02.29 (20:01)
수정 2024.03.0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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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정세민 할아버지는 다섯 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먹을 만큼 살았고 지금 보니까 옛날에 농지개혁 하기 전에 여기 정방폭포에 논이 좀 있었고 저쪽 강정에도 조그만 논이 하나 있었다고. (친척들이) 쌀밥 좀 얻어먹으러 같이 놀러 왔다고 좀 우스갯소리지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소개령) 해안선 5km밖에 거주하는 사람들 해안가로 이사하라고 했잖아요. 그날인데 그때 어리니까 잘 모르고 어머니가 업어서 산에 갔는데, 신례리 이승악 화생이궤. 거기 가서 숨어있는데 우리 어머니뿐 아니고 한 20~30명 거기 같이 숨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밤중에 동네 사람들하고 우당탕 도망가는 것 같아요. 화생이궤에서 몇 미터 안 가서 우리 어머니가 잡혔어요. 죽기 전에 어머니가 집안 형편을 잘 아니까. "내 친정에는 데리고 살아줄 사람 없을 것 같고 외갓집에 가서 살아라" 한번 얘기하고 어머니는 죽창으로 (희생됐어요) 할머니는 위미지서에 잡혀가서, 그때 집단으로 잡아다가 죽였잖아요 지서에 잡혀간 사람들을, 그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죽는 현장에서 1차로 총 쏘고 했는데 총알이 막 날아오는데 엎어져서 살아났어요. (할아버지는) 산에 올라가서 살다가 좀 오래 있다가 6·25 터지니까 예비검속 잡아들일 때. 예비검속에 잡혀서 경찰서에 가서 그 후에 어디 갔는지 모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제주시 주정공장에서 (무기징역) 형 받아서 육지 갔는데 숙부하고 같이 배 타고 마포형무소 가서 수감생활하다가 6·25 때 (인민군이) 문 열어주니까 형제분이 거기서 나왔는데, 숙부가 하는 얘기는 형제는 같은 차, 같은 배 타지 말라고 했다고. 우리 아버지는 행방불명 돼버리고 숙부는 살아와서."]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사촌 있으니까 숙모네 집에서 같이 어울려서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은 했는데 그때 우리 친척 중 아는 어른이 담임선생님하고 그때 중학교를 못 보내니까 뒷 해에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기다렸는데 뒷 해가 돼도 중학교도 안 보내주고 하니까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서귀포시 온 것이 여기 읍민관 극장. 거기 와서 처음에는 포스터 며칠 붙이다가 영사실에 올라가서 영사기사(했죠) 삼일극장에 아는 사람 부탁해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영사기사 시험 보고. 젊을 때 한 30년 극장 계통에서만 일했어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결혼해서 얼마 안 돼서 나라에서 통계조사 이것저것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행불된 사람이나 정리한다고 해서 남원읍사무소에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사망신고 제가 다 했어요. 4·3 당한 사람들은 (사망신고) 할 생각도 안 하고 못했죠 그때는. 그래서 사망신고했는데 한 며칠 있으니까 경찰서 정보과에서 올라오라고 호출이 왔더라고요. 연좌제로 주변에서 형사들이 날 감시하고 있는 것을 그때 눈치로 알았거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유골 혹시나 (찾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여러 곳에) 쫓아다니다 보니까 (2019년 정뜨르비행장에서) 할아버지는 유골 찾았어요. 그러니까 한없이 기쁘죠. 아버지는 저번에 1차인가 2차 재심에서 그때 3백몇 명인가 할 때 다해서 (공소기각) 판결받았어요. 할아버지도 무죄 판결받아서 4·3사건 너무 원망스럽지. 슬프고 서럽고 외롭고 그런 것은 말할 수가 없죠. 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어머니 얼굴 모르는 자식 없잖아요. 알았으면 원이 덜 할 텐데 모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정세민 할아버지는 다섯 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먹을 만큼 살았고 지금 보니까 옛날에 농지개혁 하기 전에 여기 정방폭포에 논이 좀 있었고 저쪽 강정에도 조그만 논이 하나 있었다고. (친척들이) 쌀밥 좀 얻어먹으러 같이 놀러 왔다고 좀 우스갯소리지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소개령) 해안선 5km밖에 거주하는 사람들 해안가로 이사하라고 했잖아요. 그날인데 그때 어리니까 잘 모르고 어머니가 업어서 산에 갔는데, 신례리 이승악 화생이궤. 거기 가서 숨어있는데 우리 어머니뿐 아니고 한 20~30명 거기 같이 숨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밤중에 동네 사람들하고 우당탕 도망가는 것 같아요. 화생이궤에서 몇 미터 안 가서 우리 어머니가 잡혔어요. 죽기 전에 어머니가 집안 형편을 잘 아니까. "내 친정에는 데리고 살아줄 사람 없을 것 같고 외갓집에 가서 살아라" 한번 얘기하고 어머니는 죽창으로 (희생됐어요) 할머니는 위미지서에 잡혀가서, 그때 집단으로 잡아다가 죽였잖아요 지서에 잡혀간 사람들을, 그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죽는 현장에서 1차로 총 쏘고 했는데 총알이 막 날아오는데 엎어져서 살아났어요. (할아버지는) 산에 올라가서 살다가 좀 오래 있다가 6·25 터지니까 예비검속 잡아들일 때. 예비검속에 잡혀서 경찰서에 가서 그 후에 어디 갔는지 모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제주시 주정공장에서 (무기징역) 형 받아서 육지 갔는데 숙부하고 같이 배 타고 마포형무소 가서 수감생활하다가 6·25 때 (인민군이) 문 열어주니까 형제분이 거기서 나왔는데, 숙부가 하는 얘기는 형제는 같은 차, 같은 배 타지 말라고 했다고. 우리 아버지는 행방불명 돼버리고 숙부는 살아와서."]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사촌 있으니까 숙모네 집에서 같이 어울려서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은 했는데 그때 우리 친척 중 아는 어른이 담임선생님하고 그때 중학교를 못 보내니까 뒷 해에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기다렸는데 뒷 해가 돼도 중학교도 안 보내주고 하니까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서귀포시 온 것이 여기 읍민관 극장. 거기 와서 처음에는 포스터 며칠 붙이다가 영사실에 올라가서 영사기사(했죠) 삼일극장에 아는 사람 부탁해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영사기사 시험 보고. 젊을 때 한 30년 극장 계통에서만 일했어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결혼해서 얼마 안 돼서 나라에서 통계조사 이것저것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행불된 사람이나 정리한다고 해서 남원읍사무소에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사망신고 제가 다 했어요. 4·3 당한 사람들은 (사망신고) 할 생각도 안 하고 못했죠 그때는. 그래서 사망신고했는데 한 며칠 있으니까 경찰서 정보과에서 올라오라고 호출이 왔더라고요. 연좌제로 주변에서 형사들이 날 감시하고 있는 것을 그때 눈치로 알았거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유골 혹시나 (찾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여러 곳에) 쫓아다니다 보니까 (2019년 정뜨르비행장에서) 할아버지는 유골 찾았어요. 그러니까 한없이 기쁘죠. 아버지는 저번에 1차인가 2차 재심에서 그때 3백몇 명인가 할 때 다해서 (공소기각) 판결받았어요. 할아버지도 무죄 판결받아서 4·3사건 너무 원망스럽지. 슬프고 서럽고 외롭고 그런 것은 말할 수가 없죠. 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어머니 얼굴 모르는 자식 없잖아요. 알았으면 원이 덜 할 텐데 모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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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4-03-01 07: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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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정세민 할아버지는 다섯 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먹을 만큼 살았고 지금 보니까 옛날에 농지개혁 하기 전에 여기 정방폭포에 논이 좀 있었고 저쪽 강정에도 조그만 논이 하나 있었다고. (친척들이) 쌀밥 좀 얻어먹으러 같이 놀러 왔다고 좀 우스갯소리지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소개령) 해안선 5km밖에 거주하는 사람들 해안가로 이사하라고 했잖아요. 그날인데 그때 어리니까 잘 모르고 어머니가 업어서 산에 갔는데, 신례리 이승악 화생이궤. 거기 가서 숨어있는데 우리 어머니뿐 아니고 한 20~30명 거기 같이 숨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밤중에 동네 사람들하고 우당탕 도망가는 것 같아요. 화생이궤에서 몇 미터 안 가서 우리 어머니가 잡혔어요. 죽기 전에 어머니가 집안 형편을 잘 아니까. "내 친정에는 데리고 살아줄 사람 없을 것 같고 외갓집에 가서 살아라" 한번 얘기하고 어머니는 죽창으로 (희생됐어요) 할머니는 위미지서에 잡혀가서, 그때 집단으로 잡아다가 죽였잖아요 지서에 잡혀간 사람들을, 그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죽는 현장에서 1차로 총 쏘고 했는데 총알이 막 날아오는데 엎어져서 살아났어요. (할아버지는) 산에 올라가서 살다가 좀 오래 있다가 6·25 터지니까 예비검속 잡아들일 때. 예비검속에 잡혀서 경찰서에 가서 그 후에 어디 갔는지 모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제주시 주정공장에서 (무기징역) 형 받아서 육지 갔는데 숙부하고 같이 배 타고 마포형무소 가서 수감생활하다가 6·25 때 (인민군이) 문 열어주니까 형제분이 거기서 나왔는데, 숙부가 하는 얘기는 형제는 같은 차, 같은 배 타지 말라고 했다고. 우리 아버지는 행방불명 돼버리고 숙부는 살아와서."]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사촌 있으니까 숙모네 집에서 같이 어울려서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은 했는데 그때 우리 친척 중 아는 어른이 담임선생님하고 그때 중학교를 못 보내니까 뒷 해에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기다렸는데 뒷 해가 돼도 중학교도 안 보내주고 하니까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서귀포시 온 것이 여기 읍민관 극장. 거기 와서 처음에는 포스터 며칠 붙이다가 영사실에 올라가서 영사기사(했죠) 삼일극장에 아는 사람 부탁해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영사기사 시험 보고. 젊을 때 한 30년 극장 계통에서만 일했어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결혼해서 얼마 안 돼서 나라에서 통계조사 이것저것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행불된 사람이나 정리한다고 해서 남원읍사무소에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사망신고 제가 다 했어요. 4·3 당한 사람들은 (사망신고) 할 생각도 안 하고 못했죠 그때는. 그래서 사망신고했는데 한 며칠 있으니까 경찰서 정보과에서 올라오라고 호출이 왔더라고요. 연좌제로 주변에서 형사들이 날 감시하고 있는 것을 그때 눈치로 알았거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유골 혹시나 (찾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여러 곳에) 쫓아다니다 보니까 (2019년 정뜨르비행장에서) 할아버지는 유골 찾았어요. 그러니까 한없이 기쁘죠. 아버지는 저번에 1차인가 2차 재심에서 그때 3백몇 명인가 할 때 다해서 (공소기각) 판결받았어요. 할아버지도 무죄 판결받아서 4·3사건 너무 원망스럽지. 슬프고 서럽고 외롭고 그런 것은 말할 수가 없죠. 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어머니 얼굴 모르는 자식 없잖아요. 알았으면 원이 덜 할 텐데 모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정세민 할아버지는 다섯 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서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먹을 만큼 살았고 지금 보니까 옛날에 농지개혁 하기 전에 여기 정방폭포에 논이 좀 있었고 저쪽 강정에도 조그만 논이 하나 있었다고. (친척들이) 쌀밥 좀 얻어먹으러 같이 놀러 왔다고 좀 우스갯소리지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소개령) 해안선 5km밖에 거주하는 사람들 해안가로 이사하라고 했잖아요. 그날인데 그때 어리니까 잘 모르고 어머니가 업어서 산에 갔는데, 신례리 이승악 화생이궤. 거기 가서 숨어있는데 우리 어머니뿐 아니고 한 20~30명 거기 같이 숨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밤중에 동네 사람들하고 우당탕 도망가는 것 같아요. 화생이궤에서 몇 미터 안 가서 우리 어머니가 잡혔어요. 죽기 전에 어머니가 집안 형편을 잘 아니까. "내 친정에는 데리고 살아줄 사람 없을 것 같고 외갓집에 가서 살아라" 한번 얘기하고 어머니는 죽창으로 (희생됐어요) 할머니는 위미지서에 잡혀가서, 그때 집단으로 잡아다가 죽였잖아요 지서에 잡혀간 사람들을, 그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죽는 현장에서 1차로 총 쏘고 했는데 총알이 막 날아오는데 엎어져서 살아났어요. (할아버지는) 산에 올라가서 살다가 좀 오래 있다가 6·25 터지니까 예비검속 잡아들일 때. 예비검속에 잡혀서 경찰서에 가서 그 후에 어디 갔는지 모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제주시 주정공장에서 (무기징역) 형 받아서 육지 갔는데 숙부하고 같이 배 타고 마포형무소 가서 수감생활하다가 6·25 때 (인민군이) 문 열어주니까 형제분이 거기서 나왔는데, 숙부가 하는 얘기는 형제는 같은 차, 같은 배 타지 말라고 했다고. 우리 아버지는 행방불명 돼버리고 숙부는 살아와서."]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사촌 있으니까 숙모네 집에서 같이 어울려서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은 했는데 그때 우리 친척 중 아는 어른이 담임선생님하고 그때 중학교를 못 보내니까 뒷 해에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기다렸는데 뒷 해가 돼도 중학교도 안 보내주고 하니까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서귀포시 온 것이 여기 읍민관 극장. 거기 와서 처음에는 포스터 며칠 붙이다가 영사실에 올라가서 영사기사(했죠) 삼일극장에 아는 사람 부탁해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영사기사 시험 보고. 젊을 때 한 30년 극장 계통에서만 일했어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결혼해서 얼마 안 돼서 나라에서 통계조사 이것저것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행불된 사람이나 정리한다고 해서 남원읍사무소에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사망신고 제가 다 했어요. 4·3 당한 사람들은 (사망신고) 할 생각도 안 하고 못했죠 그때는. 그래서 사망신고했는데 한 며칠 있으니까 경찰서 정보과에서 올라오라고 호출이 왔더라고요. 연좌제로 주변에서 형사들이 날 감시하고 있는 것을 그때 눈치로 알았거든요."]
[정세민/4·3희생자 유족 :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유골 혹시나 (찾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 (여러 곳에) 쫓아다니다 보니까 (2019년 정뜨르비행장에서) 할아버지는 유골 찾았어요. 그러니까 한없이 기쁘죠. 아버지는 저번에 1차인가 2차 재심에서 그때 3백몇 명인가 할 때 다해서 (공소기각) 판결받았어요. 할아버지도 무죄 판결받아서 4·3사건 너무 원망스럽지. 슬프고 서럽고 외롭고 그런 것은 말할 수가 없죠. 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어머니 얼굴 모르는 자식 없잖아요. 알았으면 원이 덜 할 텐데 모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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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두 기자 yyd9212@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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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윤 기자 jaey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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