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군번도 없던 유격대…이달의 전쟁영웅

입력 2025.02.22 (08:53) 수정 2025.02.2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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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국가보훈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매월 '이달의 전쟁영웅'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 속에서 나라를 지킨 영웅들의 공로에 감사하기 위해서인데요.

이달에는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비정규군, 8240부대 유격대가 전쟁영웅에 선정됐습니다.

수많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데요.

장예진 리포터와 함께, 8240부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리포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들을 만나러 가는 길.

2025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영광의 주인공들이 벅찬 표정으로 행사를 기다립니다.

[정창복/제8240부대 유격군 :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앞으로 열심히 더 우리가 활동해서 선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녘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날이었습니다.

[정병조/이북5도위원장 : "8240부대 유격대는 전부 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공로에 대해서 감사의 표시를 나타내는 그런 행사를 하고자 합니다."]

꼿꼿한 자세로 태극기 앞에 선 참전용사들.

이들은 6.25 전쟁 당시 적의 후방지역에서 첩보전을 비롯해 수많은 작전을 수행한 미군 제8240부대 유격대입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15살, 16살 사람들이 그저 내 동네를 지키겠다. 내 나라를 지키겠다. 무언지 모르지만 튀어 나가서 총을 잡고 싸우면서 유격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잊혀져 갔던 이들이 75년 만에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영웅으로 기억되는 순간.

[김강현/서울북부 보훈지청장 : "4천 회가 넘는 작전을 통해서 많은 전과를 올리셨고요. 이러한 여러분들의 희생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함께한 가족들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는데요.

[방선민/제8240부대 유격군 가족 : "유격군 한분 한분께 드리는 감사패라고 저는 생각해요."]

조국을 향한 이들의 ‘희망’은 세대를 넘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선민/제8240부대 유격군 가족 : "저는 아버지가 계속 건강하셔서 통일돼서 나중에 아버지 손 붙잡고 아버지 고향을 방문해보고 싶어요."]

6.25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장을 누볐던 미군 소속 용사들이 있습니다.

국군특전사의 기원으로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이들의 활약상을 함께 들어보시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북 지역 곳곳에 자체 치안대가 만들어집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이북 각 지역에 치안대가 다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단체가 돼서 내 고향 찾고 유지하겠다 그러는데..."]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후퇴하자, 이들은 인민군을 상대로 유격대원으로 활약하게 되는데요.

대부분이 10대 소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몇 살이셨어요?) 18살. 지금 95살. 이북에 들어갈 때 들어가기 전날 찍은 거예요. 같이 들어갈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 다 죽고 나만 살아있어요."]

1951년부터는 34개의 유격대가 미군에 배속돼 4,445회의 작전을 수행했는데요.

정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로 이뤄진 ’비정규부대‘였습니다.

[방도운/제8240부대 유격군 : "(군번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군번이 없죠. 현지 입대를 안 했기 때문에 인민군 패잔병들한테 총을 뺏어서 자체 치안을 하면서 우리가 자체 무장을 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국군에 편입돼 군 복무를 한 이후에야 정식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게 되는데요.

전장에서의 기억은 가슴 속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구월산이 어디예요?) 구월산은 여기입니다."]

황해도가 고향이었던 임종성 대원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첩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구월산 유격부대에서 나는 비밀 연락병이었어요. 17살 아니에요. 그러니까 누가 보면 학생이니까 학생복 입고서 비밀 연락을 내가 다녔지."]

제8240부대 유격대는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공중침투, 포로구출 등 목숨을 건 작전을 수행했는데요.

[주은상/제8240부대 유격군 : "1월에 육지에서 섬까지 가려고 그러면 저 평안남도 그쪽으로 가는 서해바다에 수로가 있는데 그걸 건너야 되는데 그 추위에 그걸 헤엄쳐 건너왔다고."]

전쟁이 끝나고, 이들의 전투 경험은 우리나라 특수전사령부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당시의 군가를 불러보는 참전용사들.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해도 이들의 선택은 한결같았는데요.

[주은상/제8240부대 유격군 : "(당시로 돌아가면 유격군 활동 다시 하실 거예요?) 해야지. 우리나라를 굳건히 지켜야지."]

이들은 2021년에서야 정부로부터 ‘공로금’을 지급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공로금을 수령하지 못한 상황인데요.

당시의 기록이 불완전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2년 동안에 4천 명 밖에 아직 안 나왔어요. 찾지를 못해서 전달도 못 하는 거야."]

한때 소속 부대원이 2만 명이 넘었던 8240부대가 공로를 공식 인정받은 것은 2021년입니다.

그동안 이들이 품어왔던 2만여 개의 작은 역사들을 찾아내고 그 공로에 보답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립현충원 한편에 자리한 순백의 위령비.

6·25전쟁 당시 유격전을 펼치다 산화한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군사정보 수집, 공수 특공 작전, 조종사 구출, 동·서해 제해권 확보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유격대원들의 활약상과 부대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진 위령비 앞에 참전용사들이 추모의 마음을 담아 헌화합니다.

[정창복/제8240부대 유격군 : "같이 상륙하고 또 싸울 땐 같이 총 들고 싸우고 정말 귀한 친구, 동지입니다."]

전우들은 때때로 이 위령비 앞에서 회포를 푼다고 하는데요.

[정상복/제8240부대 유격군 : "이신암이라고 정말 아주 가깝게 지내던 형인데 돌아가셨는데 참 많이 생각납니다. 지금."]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기억되지 못하는 전우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우리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지 모르죠. 유격군은 기록을 해 놓고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적이 오면 나가서 싸우고 하다 보니까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럼에도 목숨을 바쳤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조국통일이지, 남북통일이지. 거기에 일념했던 거예요. 목숨 바치고."]

국방부는 비정규군으로 활동했지만 공로자로 인정받지 못한 참전용사를 찾는 사업을 내년까지 진행할 계획인데요.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인정을 받아야 되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있죠. 현재,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없잖아요."]

제8240부대 유격대의 용사들은 오늘도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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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2-22 08:53:33
    • 수정2025-02-22 08: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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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매월 '이달의 전쟁영웅'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 속에서 나라를 지킨 영웅들의 공로에 감사하기 위해서인데요.

이달에는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비정규군, 8240부대 유격대가 전쟁영웅에 선정됐습니다.

수많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데요.

장예진 리포터와 함께, 8240부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리포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들을 만나러 가는 길.

2025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영광의 주인공들이 벅찬 표정으로 행사를 기다립니다.

[정창복/제8240부대 유격군 :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앞으로 열심히 더 우리가 활동해서 선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녘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날이었습니다.

[정병조/이북5도위원장 : "8240부대 유격대는 전부 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공로에 대해서 감사의 표시를 나타내는 그런 행사를 하고자 합니다."]

꼿꼿한 자세로 태극기 앞에 선 참전용사들.

이들은 6.25 전쟁 당시 적의 후방지역에서 첩보전을 비롯해 수많은 작전을 수행한 미군 제8240부대 유격대입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15살, 16살 사람들이 그저 내 동네를 지키겠다. 내 나라를 지키겠다. 무언지 모르지만 튀어 나가서 총을 잡고 싸우면서 유격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잊혀져 갔던 이들이 75년 만에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영웅으로 기억되는 순간.

[김강현/서울북부 보훈지청장 : "4천 회가 넘는 작전을 통해서 많은 전과를 올리셨고요. 이러한 여러분들의 희생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함께한 가족들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는데요.

[방선민/제8240부대 유격군 가족 : "유격군 한분 한분께 드리는 감사패라고 저는 생각해요."]

조국을 향한 이들의 ‘희망’은 세대를 넘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선민/제8240부대 유격군 가족 : "저는 아버지가 계속 건강하셔서 통일돼서 나중에 아버지 손 붙잡고 아버지 고향을 방문해보고 싶어요."]

6.25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장을 누볐던 미군 소속 용사들이 있습니다.

국군특전사의 기원으로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이들의 활약상을 함께 들어보시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북 지역 곳곳에 자체 치안대가 만들어집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이북 각 지역에 치안대가 다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단체가 돼서 내 고향 찾고 유지하겠다 그러는데..."]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후퇴하자, 이들은 인민군을 상대로 유격대원으로 활약하게 되는데요.

대부분이 10대 소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몇 살이셨어요?) 18살. 지금 95살. 이북에 들어갈 때 들어가기 전날 찍은 거예요. 같이 들어갈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 다 죽고 나만 살아있어요."]

1951년부터는 34개의 유격대가 미군에 배속돼 4,445회의 작전을 수행했는데요.

정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로 이뤄진 ’비정규부대‘였습니다.

[방도운/제8240부대 유격군 : "(군번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군번이 없죠. 현지 입대를 안 했기 때문에 인민군 패잔병들한테 총을 뺏어서 자체 치안을 하면서 우리가 자체 무장을 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국군에 편입돼 군 복무를 한 이후에야 정식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게 되는데요.

전장에서의 기억은 가슴 속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구월산이 어디예요?) 구월산은 여기입니다."]

황해도가 고향이었던 임종성 대원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첩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구월산 유격부대에서 나는 비밀 연락병이었어요. 17살 아니에요. 그러니까 누가 보면 학생이니까 학생복 입고서 비밀 연락을 내가 다녔지."]

제8240부대 유격대는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공중침투, 포로구출 등 목숨을 건 작전을 수행했는데요.

[주은상/제8240부대 유격군 : "1월에 육지에서 섬까지 가려고 그러면 저 평안남도 그쪽으로 가는 서해바다에 수로가 있는데 그걸 건너야 되는데 그 추위에 그걸 헤엄쳐 건너왔다고."]

전쟁이 끝나고, 이들의 전투 경험은 우리나라 특수전사령부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당시의 군가를 불러보는 참전용사들.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해도 이들의 선택은 한결같았는데요.

[주은상/제8240부대 유격군 : "(당시로 돌아가면 유격군 활동 다시 하실 거예요?) 해야지. 우리나라를 굳건히 지켜야지."]

이들은 2021년에서야 정부로부터 ‘공로금’을 지급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공로금을 수령하지 못한 상황인데요.

당시의 기록이 불완전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2년 동안에 4천 명 밖에 아직 안 나왔어요. 찾지를 못해서 전달도 못 하는 거야."]

한때 소속 부대원이 2만 명이 넘었던 8240부대가 공로를 공식 인정받은 것은 2021년입니다.

그동안 이들이 품어왔던 2만여 개의 작은 역사들을 찾아내고 그 공로에 보답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립현충원 한편에 자리한 순백의 위령비.

6·25전쟁 당시 유격전을 펼치다 산화한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군사정보 수집, 공수 특공 작전, 조종사 구출, 동·서해 제해권 확보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유격대원들의 활약상과 부대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진 위령비 앞에 참전용사들이 추모의 마음을 담아 헌화합니다.

[정창복/제8240부대 유격군 : "같이 상륙하고 또 싸울 땐 같이 총 들고 싸우고 정말 귀한 친구, 동지입니다."]

전우들은 때때로 이 위령비 앞에서 회포를 푼다고 하는데요.

[정상복/제8240부대 유격군 : "이신암이라고 정말 아주 가깝게 지내던 형인데 돌아가셨는데 참 많이 생각납니다. 지금."]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기억되지 못하는 전우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박충암/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 "우리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지 모르죠. 유격군은 기록을 해 놓고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적이 오면 나가서 싸우고 하다 보니까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럼에도 목숨을 바쳤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조국통일이지, 남북통일이지. 거기에 일념했던 거예요. 목숨 바치고."]

국방부는 비정규군으로 활동했지만 공로자로 인정받지 못한 참전용사를 찾는 사업을 내년까지 진행할 계획인데요.

[임종성/제8240부대 유격군 : "인정을 받아야 되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있죠. 현재,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없잖아요."]

제8240부대 유격대의 용사들은 오늘도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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