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 항쟁의 중추…유인석에서 이강년까지
입력 2025.06.19 (08:23)
수정 2025.06.19 (08:4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구한말 의병 항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류이자 근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천 의병은 전국적인 항쟁을 선도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대표 의병으로 평가받는데요.
시작과 끝을 이끈 선봉장, 유인석과 이강년을 통해 항일 의병사를 돌아봤습니다.
진희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구한 말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된 건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단발령이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흔드는 조치에, 제천의 민족주의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었습니다.
그 맨 앞엔 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있었습니다.
유인석의 의병 부대, 호좌의진은 당시 도청인 충주성을 점령하고, 지방 관찰사를 척결하는 등 무력 투쟁으로 전국의 항쟁을 선도했습니다.
일제의 압력과 관군의 탄압으로 호좌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유인석은 압록강 넘어 서간도로 진출해 의병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엄찬호/의암 학회장 : "1920년대 독립군 투쟁을 이끌었던 신흥무관학교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쪽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든요. 해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는 기반을 가장 처음 조성했던 분이 (의암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거세질 때마다 충북은 늘 전국 의병 항쟁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봉기한 의병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을 재건해 일본 정규군에 맞섰습니다.
충북, 경북, 강원의 접경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펼쳐 문경 갈평전투, 단양 남천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일대 연합 부대까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천에서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부대들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활약하는 등 독립군의 모태가 됐습니다.
[구완회/세명대학교 명예교수 : "싸워서 몇 번 이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포기하고 돌아가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 부딪히고 그랬던, 그들의 행군하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 외신기자는 제천이 의병 항쟁의 대가로 지도 위에서 지워져 버릴 정도로 일제에 의해 파괴됐다고 기록했습니다.
한 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분연하게 일어나, 독립운동의 바탕이 된 의병 항쟁.
그 기개와 항일 정신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우/제천 의병유족회장 :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싸운 사람들 아닙니까.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KBS 뉴스 진희정입니다.
촬영기자:최영준/영상편집:정진욱/그래픽:박소현
구한말 의병 항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류이자 근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천 의병은 전국적인 항쟁을 선도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대표 의병으로 평가받는데요.
시작과 끝을 이끈 선봉장, 유인석과 이강년을 통해 항일 의병사를 돌아봤습니다.
진희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구한 말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된 건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단발령이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흔드는 조치에, 제천의 민족주의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었습니다.
그 맨 앞엔 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있었습니다.
유인석의 의병 부대, 호좌의진은 당시 도청인 충주성을 점령하고, 지방 관찰사를 척결하는 등 무력 투쟁으로 전국의 항쟁을 선도했습니다.
일제의 압력과 관군의 탄압으로 호좌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유인석은 압록강 넘어 서간도로 진출해 의병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엄찬호/의암 학회장 : "1920년대 독립군 투쟁을 이끌었던 신흥무관학교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쪽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든요. 해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는 기반을 가장 처음 조성했던 분이 (의암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거세질 때마다 충북은 늘 전국 의병 항쟁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봉기한 의병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을 재건해 일본 정규군에 맞섰습니다.
충북, 경북, 강원의 접경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펼쳐 문경 갈평전투, 단양 남천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일대 연합 부대까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천에서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부대들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활약하는 등 독립군의 모태가 됐습니다.
[구완회/세명대학교 명예교수 : "싸워서 몇 번 이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포기하고 돌아가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 부딪히고 그랬던, 그들의 행군하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 외신기자는 제천이 의병 항쟁의 대가로 지도 위에서 지워져 버릴 정도로 일제에 의해 파괴됐다고 기록했습니다.
한 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분연하게 일어나, 독립운동의 바탕이 된 의병 항쟁.
그 기개와 항일 정신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우/제천 의병유족회장 :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싸운 사람들 아닙니까.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KBS 뉴스 진희정입니다.
촬영기자:최영준/영상편집:정진욱/그래픽:박소현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항일 의병 항쟁의 중추…유인석에서 이강년까지
-
- 입력 2025-06-19 08:23:17
- 수정2025-06-19 08:41:37

[앵커]
구한말 의병 항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류이자 근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천 의병은 전국적인 항쟁을 선도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대표 의병으로 평가받는데요.
시작과 끝을 이끈 선봉장, 유인석과 이강년을 통해 항일 의병사를 돌아봤습니다.
진희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구한 말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된 건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단발령이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흔드는 조치에, 제천의 민족주의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었습니다.
그 맨 앞엔 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있었습니다.
유인석의 의병 부대, 호좌의진은 당시 도청인 충주성을 점령하고, 지방 관찰사를 척결하는 등 무력 투쟁으로 전국의 항쟁을 선도했습니다.
일제의 압력과 관군의 탄압으로 호좌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유인석은 압록강 넘어 서간도로 진출해 의병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엄찬호/의암 학회장 : "1920년대 독립군 투쟁을 이끌었던 신흥무관학교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쪽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든요. 해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는 기반을 가장 처음 조성했던 분이 (의암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거세질 때마다 충북은 늘 전국 의병 항쟁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봉기한 의병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을 재건해 일본 정규군에 맞섰습니다.
충북, 경북, 강원의 접경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펼쳐 문경 갈평전투, 단양 남천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일대 연합 부대까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천에서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부대들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활약하는 등 독립군의 모태가 됐습니다.
[구완회/세명대학교 명예교수 : "싸워서 몇 번 이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포기하고 돌아가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 부딪히고 그랬던, 그들의 행군하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 외신기자는 제천이 의병 항쟁의 대가로 지도 위에서 지워져 버릴 정도로 일제에 의해 파괴됐다고 기록했습니다.
한 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분연하게 일어나, 독립운동의 바탕이 된 의병 항쟁.
그 기개와 항일 정신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우/제천 의병유족회장 :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싸운 사람들 아닙니까.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KBS 뉴스 진희정입니다.
촬영기자:최영준/영상편집:정진욱/그래픽:박소현
구한말 의병 항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류이자 근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천 의병은 전국적인 항쟁을 선도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대표 의병으로 평가받는데요.
시작과 끝을 이끈 선봉장, 유인석과 이강년을 통해 항일 의병사를 돌아봤습니다.
진희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구한 말 을미의병의 기폭제가 된 건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단발령이었습니다.
민족 정체성을 흔드는 조치에, 제천의 민족주의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었습니다.
그 맨 앞엔 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있었습니다.
유인석의 의병 부대, 호좌의진은 당시 도청인 충주성을 점령하고, 지방 관찰사를 척결하는 등 무력 투쟁으로 전국의 항쟁을 선도했습니다.
일제의 압력과 관군의 탄압으로 호좌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유인석은 압록강 넘어 서간도로 진출해 의병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엄찬호/의암 학회장 : "1920년대 독립군 투쟁을 이끌었던 신흥무관학교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쪽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든요. 해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되는 기반을 가장 처음 조성했던 분이 (의암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거세질 때마다 충북은 늘 전국 의병 항쟁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봉기한 의병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을 재건해 일본 정규군에 맞섰습니다.
충북, 경북, 강원의 접경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펼쳐 문경 갈평전투, 단양 남천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일대 연합 부대까지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천에서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부대들이 한일합병 이후까지 활약하는 등 독립군의 모태가 됐습니다.
[구완회/세명대학교 명예교수 : "싸워서 몇 번 이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포기하고 돌아가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 부딪히고 그랬던, 그들의 행군하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 외신기자는 제천이 의병 항쟁의 대가로 지도 위에서 지워져 버릴 정도로 일제에 의해 파괴됐다고 기록했습니다.
한 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분연하게 일어나, 독립운동의 바탕이 된 의병 항쟁.
그 기개와 항일 정신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우/제천 의병유족회장 :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싸운 사람들 아닙니까.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KBS 뉴스 진희정입니다.
촬영기자:최영준/영상편집:정진욱/그래픽:박소현
-
-
진희정 기자 5w1h@kbs.co.kr
진희정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