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 모욕감, 절망감”…‘분신’ 택시기사 산재 판정 이유는?

입력 2024.04.18 (17:45) 수정 2024.04.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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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6일, 한 택시기사가 숨졌습니다. 회사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한 지 열흘 만이었습니다. 고(故) 방영환 씨 이야깁니다.

방 씨의 죽음은 지난 8일, 반년 만에 산업재해로 인정됐습니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근로자의 자해로 인한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지만, '정신적 이상 상태'였을 경우에는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방 씨가 장기간 스트레스로 무력감, 모욕감, 두려움, 고립감, 좌절감, 절망감에 시달렸을 거라고 보고, 업무와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고인에게 우울증 등 치료 병력이 없는데도, 적극적으로 산재 판단이 이뤄진 흔치 않은 사례로 평가했습니다.

■ 227일간의 '1인 시위'…회사 대표의 폭행·폭언 이어져

지난해 9월 26일 분신 시도에 이르기까지, 방 씨는 오랜 기간 외로운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임금체불에 항의하고 ‘완전월급제’ 시행을 촉구하며 22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고 방영환 씨는 임금체불에 항의하고 택시 ‘완전월급제’ 시행을 촉구하며 22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했다.고 방영환 씨는 임금체불에 항의하고 택시 ‘완전월급제’ 시행을 촉구하며 22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방 씨는 임금을 보장하지 않는 기간제 근로계약서 작성을 거부해 회사와 갈등을 빚다가, 2020년 2월 해고됐습니다. 2년여가 지나 대법원 판결에 따라 복직했지만, 이후에도 회사는 퇴사를 종용했습니다.

회사가 해고무효 기간의 임금 지급을 거부해 방 씨는 상당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복직 뒤에도 회사는 월 100만 원 남짓의 급여만 지급했고, 방 씨는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민원과 소송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회사 대표인 정 모 씨는 1인 시위를 하던 방 씨를 폭행했고, 폭언과 욕설을 하며 집회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정 씨는 지난달 28일 1심에서 폭행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 질병판정위 "누적된 스트레스로 절망감·무력감 극단적 형태로 발현"

'터널 시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방 씨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마치 어두운 터널을 운전할 때처럼 주변을 이해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위원회는 "고인의 유서와 통화내용, 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고인이 자살 이전에 보였던 심리 기제는 '터널 시야'로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이어 "사업주의 폭력적 행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장기간의 스트레스는 고인으로 하여금 긴장 상태와 교감신경계의 만성적 항진에 따른 소진 상태 및 급격한 무력감에 이르게 하고, 정서적으로는 모욕감, 두려움, 고립감에 시달려 왔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위원회는 또 " 고인이 제소한 사건들의 기각은 고인에게 심한 무력감, 좌절감 및 절망감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절망감은 자살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측인자이자, 우울의 심각성과 자살 위험성을 연결하는 주요 매개 요소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습니다.

아울러 "고인에게 있어서 스트레스 요인은 사업장 에서 발생한 오랜 갈등 상황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으며, 이러한 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절망감과 무력감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위원회는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고인의 자해행위는 업무상 요인 에 의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며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했습니다.

고(故) 방영환 씨의 발인과 영결식은 방 씨가 숨진 지 144일 만인 지난 2월 27일 치러졌다.고(故) 방영환 씨의 발인과 영결식은 방 씨가 숨진 지 144일 만인 지난 2월 27일 치러졌다.

■ 노동계 "고용부·서울시, 반성 없는 회사에 엄정조치 취해야"

이번 판정에 대해 권동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노무사는 "고인의 우울증 등 치료 병력이 없는데도 적극적으로 (산재로) 판단한 흔치 않은 사례"라며 "판정서에서 '터널 시야'를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였음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판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정원섭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쟁의부실장은 "법원에 이어 보건의료계에서도 고인의 분신사망 책임이 사측에 있음을 확인했다"며 "반성없이 전액 관리제를 도입하지 않고 최저임금법을 지속해서 위반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법에 따라 엄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2014년엔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고 이만수 씨의 분신 자살이 산재로 인정됐고, 2017년엔 안양우체국 소속 집배원 고 원영호 씨의 분신 자살이 산재 승인을 받은 바 있습니다.

[연관 기사]
‘분신 사망’ 택시기사 폭행 등 혐의…업체 대표 징역 1년 6개월 (KBS 뉴스7, 24.03.2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25795

“때리고 화분으로 위협”…‘분신 택시기사’ 업체 대표 구속 (KBS 뉴스7, 23.12.11.)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38904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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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18 17:45:10
    • 수정2024-04-18 17: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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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6일, 한 택시기사가 숨졌습니다. 회사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한 지 열흘 만이었습니다. 고(故) 방영환 씨 이야깁니다.

방 씨의 죽음은 지난 8일, 반년 만에 산업재해로 인정됐습니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근로자의 자해로 인한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지만, '정신적 이상 상태'였을 경우에는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방 씨가 장기간 스트레스로 무력감, 모욕감, 두려움, 고립감, 좌절감, 절망감에 시달렸을 거라고 보고, 업무와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고인에게 우울증 등 치료 병력이 없는데도, 적극적으로 산재 판단이 이뤄진 흔치 않은 사례로 평가했습니다.

■ 227일간의 '1인 시위'…회사 대표의 폭행·폭언 이어져

지난해 9월 26일 분신 시도에 이르기까지, 방 씨는 오랜 기간 외로운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임금체불에 항의하고 ‘완전월급제’ 시행을 촉구하며 22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고 방영환 씨는 임금체불에 항의하고 택시 ‘완전월급제’ 시행을 촉구하며 22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방 씨는 임금을 보장하지 않는 기간제 근로계약서 작성을 거부해 회사와 갈등을 빚다가, 2020년 2월 해고됐습니다. 2년여가 지나 대법원 판결에 따라 복직했지만, 이후에도 회사는 퇴사를 종용했습니다.

회사가 해고무효 기간의 임금 지급을 거부해 방 씨는 상당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복직 뒤에도 회사는 월 100만 원 남짓의 급여만 지급했고, 방 씨는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민원과 소송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회사 대표인 정 모 씨는 1인 시위를 하던 방 씨를 폭행했고, 폭언과 욕설을 하며 집회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정 씨는 지난달 28일 1심에서 폭행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 질병판정위 "누적된 스트레스로 절망감·무력감 극단적 형태로 발현"

'터널 시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방 씨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마치 어두운 터널을 운전할 때처럼 주변을 이해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위원회는 "고인의 유서와 통화내용, 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고인이 자살 이전에 보였던 심리 기제는 '터널 시야'로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이어 "사업주의 폭력적 행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장기간의 스트레스는 고인으로 하여금 긴장 상태와 교감신경계의 만성적 항진에 따른 소진 상태 및 급격한 무력감에 이르게 하고, 정서적으로는 모욕감, 두려움, 고립감에 시달려 왔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위원회는 또 " 고인이 제소한 사건들의 기각은 고인에게 심한 무력감, 좌절감 및 절망감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절망감은 자살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측인자이자, 우울의 심각성과 자살 위험성을 연결하는 주요 매개 요소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습니다.

아울러 "고인에게 있어서 스트레스 요인은 사업장 에서 발생한 오랜 갈등 상황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으며, 이러한 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절망감과 무력감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위원회는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고인의 자해행위는 업무상 요인 에 의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며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했습니다.

고(故) 방영환 씨의 발인과 영결식은 방 씨가 숨진 지 144일 만인 지난 2월 27일 치러졌다.
■ 노동계 "고용부·서울시, 반성 없는 회사에 엄정조치 취해야"

이번 판정에 대해 권동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노무사는 "고인의 우울증 등 치료 병력이 없는데도 적극적으로 (산재로) 판단한 흔치 않은 사례"라며 "판정서에서 '터널 시야'를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였음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판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정원섭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쟁의부실장은 "법원에 이어 보건의료계에서도 고인의 분신사망 책임이 사측에 있음을 확인했다"며 "반성없이 전액 관리제를 도입하지 않고 최저임금법을 지속해서 위반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법에 따라 엄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2014년엔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고 이만수 씨의 분신 자살이 산재로 인정됐고, 2017년엔 안양우체국 소속 집배원 고 원영호 씨의 분신 자살이 산재 승인을 받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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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고 화분으로 위협”…‘분신 택시기사’ 업체 대표 구속 (KBS 뉴스7, 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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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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