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한반도 변화의 문을 열다…남북 특사

입력 2018.03.17 (08:07) 수정 2018.03.1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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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다음 달부터 이어지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데는 올 들어 남북을 오간 특사들의 역할이 두드러졌습니다.

사실 남북관계가 여의치 않을 때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은 특사를 활용해 돌파구를 찾곤 했는데요.

그런 만큼 남북관계의 역사는 특사의 역사라고도 할만합니다.

<클로즈업 북한> 이번 주에는 남북을 오가며 변화를 물꼬를 터왔던 특사의 역사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양측 당국이 행동하자고 제안했다.

[김정은/올해 신년사 :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어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에 맞춰 정은 위원장의 특사로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내려와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한 달 뒤 우리측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이 역시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며 3차 남북정상회담이 가시화됐다.

특사 외교가 오랜기간 경색됐던 남북 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의 국면 전환을 이끄는 돌파구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정의용/청와대 국가안보실장/지난 3월 7일/백악관 브리핑 : "트럼프 대통령은 브리핑에 감사를 표시하고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과 5월 안에 만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 냉전 상황을 반영해 남북간 특사는 밀사의 성격이 컸다.

남북간 첫 밀사로 거론되는 인물은 1961년 김일성의 특사라 자처했던 황태성이다.

KBS가 단독 보도했던 중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북한 무역성 부상을 지냈고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형 친구였던 황태성을 보내 북한에 대한 남측의 진의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좌익 전력’에 예민했던 박정희 정권은 황태성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켰고 남북관계는 오랜 경색 국면을 겪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부터 대북 정책 변화의 의지를 보이면서 남북 간 물밑 접촉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훈령을 김일성에게 전달했고 북측도 박성철 특사를 내려보내 남북정상회담 등을 제안한다.

당시 특사 교환은 결국 7.4 공동 성명으로 이어졌다.

자주·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담은 남북 당국의 첫 공식 합의였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중앙정보국부장이 방북을 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그런 물꼬를 튼 거거든요. 그러니까 특사 자체가계기가 된 거죠. 일반적인 외교관계에서는 특사가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상호 불신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 그니까 바틈업 뭐 밑으로부터 실무적인 단계를 거쳐서 협상을 하는 게 아니고 최고 지도자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뢰관계를 단기간에 파격적인 방식으로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적이죠."]

전두환, 노태우 정부 기간에도 남북한 사이 특사가 오갔다.

1985년 남북한의 특사가 각각 상대측 최고지도자를 만나 정상회담 추진을 담은 친서를 전했다.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무산됐지만 남측의 박철언, 북측의 한시해 특사 라인은 1985년 이후 6년 여 동안 42차례나 만났다.

이같은 고위급 특사 접촉은 공식 대화채널을 가동시키는 밑거름이 됐고 1991년‘남북기본합의서’채택을 이끌어냈다.

[김대중/대통령 취임사/1998년 : "우선 남북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남북 특사의 왕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2000년 4월 조선중앙TV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북남 최고위급 회담이 개최된다."]

[박지원/당시 문화관광부 장관/2000년 4월 : "7.4 공동성명의 합의정신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이산가족 문제와 경협 등 폭넓은 의견교환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과 임동원 국정원장을 대북 특사로 활용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성공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각별히 신임했던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당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첩보들을 검증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임동원/前 국정원장·통일부 장관 : "그때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정보는 성격이 음울하고 괴팍하고 고집이 세고 언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이다.김대중 대통령께서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대화를 하겠느냐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정상회담을) 재고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셨어요. 그래서 저를 불러서 국정원장인 저한테 직접 가서 만나고 오라고 하는 거예요."]

이후에도 꽉 막힌 남북관계에 파격적인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특사가 움직였다.

2005년 6월에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5년 6월, 조선중앙TV : "김정일 동지께서 남측 대통령특사를 접견하셨습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17일 6.15 공동선언 발표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당국대표단 단장인 통일부 정동영 장관을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접견하시었습니다."]

2차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열린 세 차례의 6자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정동영/당시 통일부 장관/2005년 6월 : "김정일 위원장은 핵문제와 관련해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유효하며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측은 6자회담을 포기한 적이 없고 거부한 적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6자 회담에 복귀했고, 북핵 포기와 에너지 지원을 맞바꾸는 내용 등을 담은‘9·19 공동 성명’을 도출했다.

북핵 폐기에 관한 남북한과 주변 4강의 포괄적 합의였지만 이듬해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빛이 바랬다.

2007년에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특사로 방북한 지 두 달 뒤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만복/당시 국정원장/2007년 : "저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비공개 방북하여 북측과의 협의를 통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측 대통령 특사들을 보면 정치인 출신들도 있지만, 정보기관 책임자가 직접 방북한 사례가 많은 사실이 눈에 띈다.

대북 정보기관 책임자가 남북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전할 수 있는 인물이 많고, 직무 특성상 활동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치적으로 적대적이고 교류가 차단된 남북관계의 특수성도 영향을 미쳤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 또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정보기관의 수장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보기관의 수장들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상당히 유리하죠. 왜냐하면 북한을 세밀히 알고 있으니까..."]

전문가들은 특히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답답해하는 쪽에서 특사를 먼저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김여정 특사단을 보낸 것도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은 물론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세현/前 통일부 장관 : "남북관계가 끊어졌던 것을 다시 회복하려면 그 회복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느끼는 쪽에서 특사를 보내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남북 관계를 빠른 속도로 개선하려고 하고 최종 목적은 개선된 남북관계를 다리 삼아서 ‘태평양 건너 워싱턴으로 가고 싶다’ 하는 그런 뜻이 이미 그때 담겨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오간 남북 특사단은 특사 구성과 주요 회동 사실이 과거와 달리 대부분 공개된 채 진행 된 점도 주목된다. 남북 간 사전 물밑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 쪽에 이미 우리 의사가 전달이 되었고 또 북한 쪽의 의사는 우리 쪽에 이미 전달이 되었죠. 이미 많은 의제들이 조율이 되었고 합의가 거의 합의가 된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것 을 공개적으로 김정은이라고 하는 북한 최고지도자 입에서 받아내는 형식이 필요했던거죠."]

이번 우리 특사단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히 남북간 메신저 역할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을 방문해 방북 내용과 정부의 입장을 직접 설명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번 특사단 방북을 통해 남북이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일정 기간 특사의 역할이 사라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세현/前 통일부 장관 : "특사카드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 그러나 이러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처럼 관계가 나빠질 때는 필요하다면 특사를 또 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상태로 가면 특사는 뭐 다시 안 써도 되지 않겠는가. 우선 첫째 직통전화가 핫라인이 놓이니까 특사가 가서 될 일,힘들게 몇 시간 걸려서 가서해야 될 일 을 전화로 바로 걸 수 있기 때문에 특사 필요성이 거의 제로로 떨어진 거죠."]

여기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회담이 정례화 되면 특사의 필요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역대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대통령 특사로 꼽히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에 앞으로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특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동원/前 국정원장·통일부 장관 : "남북 관계가 동결되고 한반도 위기가 계속 조성되어 왔는데 이제 이것을 풀어나가야 됩니다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주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주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북 관계를 개선하면서 미국과 북한 관계 개선을 견인해 나갈 때 북한의 핵 문제도 해결될 수 있고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북 관계가 시계 제로일 때 남북을 오가며 평화의 불씨를 날랐던 대북 특사.

그들의 활동이 빛을 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북한 사이의 벽이 높고 과제가 산적해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북 특사들이 내놓은 물꼬가 한반도 평화의 길로 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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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한반도 변화의 문을 열다…남북 특사
    • 입력 2018-03-17 08:32:08
    • 수정2018-03-17 08:49:36
    남북의 창
[앵커]

다음 달부터 이어지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데는 올 들어 남북을 오간 특사들의 역할이 두드러졌습니다.

사실 남북관계가 여의치 않을 때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은 특사를 활용해 돌파구를 찾곤 했는데요.

그런 만큼 남북관계의 역사는 특사의 역사라고도 할만합니다.

<클로즈업 북한> 이번 주에는 남북을 오가며 변화를 물꼬를 터왔던 특사의 역사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양측 당국이 행동하자고 제안했다.

[김정은/올해 신년사 :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어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에 맞춰 정은 위원장의 특사로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내려와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한 달 뒤 우리측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이 역시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며 3차 남북정상회담이 가시화됐다.

특사 외교가 오랜기간 경색됐던 남북 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의 국면 전환을 이끄는 돌파구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정의용/청와대 국가안보실장/지난 3월 7일/백악관 브리핑 : "트럼프 대통령은 브리핑에 감사를 표시하고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과 5월 안에 만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 냉전 상황을 반영해 남북간 특사는 밀사의 성격이 컸다.

남북간 첫 밀사로 거론되는 인물은 1961년 김일성의 특사라 자처했던 황태성이다.

KBS가 단독 보도했던 중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북한 무역성 부상을 지냈고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형 친구였던 황태성을 보내 북한에 대한 남측의 진의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좌익 전력’에 예민했던 박정희 정권은 황태성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켰고 남북관계는 오랜 경색 국면을 겪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부터 대북 정책 변화의 의지를 보이면서 남북 간 물밑 접촉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훈령을 김일성에게 전달했고 북측도 박성철 특사를 내려보내 남북정상회담 등을 제안한다.

당시 특사 교환은 결국 7.4 공동 성명으로 이어졌다.

자주·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담은 남북 당국의 첫 공식 합의였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중앙정보국부장이 방북을 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그런 물꼬를 튼 거거든요. 그러니까 특사 자체가계기가 된 거죠. 일반적인 외교관계에서는 특사가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상호 불신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 그니까 바틈업 뭐 밑으로부터 실무적인 단계를 거쳐서 협상을 하는 게 아니고 최고 지도자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뢰관계를 단기간에 파격적인 방식으로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적이죠."]

전두환, 노태우 정부 기간에도 남북한 사이 특사가 오갔다.

1985년 남북한의 특사가 각각 상대측 최고지도자를 만나 정상회담 추진을 담은 친서를 전했다.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무산됐지만 남측의 박철언, 북측의 한시해 특사 라인은 1985년 이후 6년 여 동안 42차례나 만났다.

이같은 고위급 특사 접촉은 공식 대화채널을 가동시키는 밑거름이 됐고 1991년‘남북기본합의서’채택을 이끌어냈다.

[김대중/대통령 취임사/1998년 : "우선 남북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남북 특사의 왕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2000년 4월 조선중앙TV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북남 최고위급 회담이 개최된다."]

[박지원/당시 문화관광부 장관/2000년 4월 : "7.4 공동성명의 합의정신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이산가족 문제와 경협 등 폭넓은 의견교환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과 임동원 국정원장을 대북 특사로 활용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성공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각별히 신임했던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당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첩보들을 검증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임동원/前 국정원장·통일부 장관 : "그때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정보는 성격이 음울하고 괴팍하고 고집이 세고 언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이다.김대중 대통령께서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대화를 하겠느냐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정상회담을) 재고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셨어요. 그래서 저를 불러서 국정원장인 저한테 직접 가서 만나고 오라고 하는 거예요."]

이후에도 꽉 막힌 남북관계에 파격적인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특사가 움직였다.

2005년 6월에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5년 6월, 조선중앙TV : "김정일 동지께서 남측 대통령특사를 접견하셨습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17일 6.15 공동선언 발표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당국대표단 단장인 통일부 정동영 장관을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접견하시었습니다."]

2차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열린 세 차례의 6자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정동영/당시 통일부 장관/2005년 6월 : "김정일 위원장은 핵문제와 관련해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유효하며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북측은 6자회담을 포기한 적이 없고 거부한 적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6자 회담에 복귀했고, 북핵 포기와 에너지 지원을 맞바꾸는 내용 등을 담은‘9·19 공동 성명’을 도출했다.

북핵 폐기에 관한 남북한과 주변 4강의 포괄적 합의였지만 이듬해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빛이 바랬다.

2007년에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특사로 방북한 지 두 달 뒤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만복/당시 국정원장/2007년 : "저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비공개 방북하여 북측과의 협의를 통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측 대통령 특사들을 보면 정치인 출신들도 있지만, 정보기관 책임자가 직접 방북한 사례가 많은 사실이 눈에 띈다.

대북 정보기관 책임자가 남북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전할 수 있는 인물이 많고, 직무 특성상 활동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치적으로 적대적이고 교류가 차단된 남북관계의 특수성도 영향을 미쳤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 또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정보기관의 수장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보기관의 수장들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상당히 유리하죠. 왜냐하면 북한을 세밀히 알고 있으니까..."]

전문가들은 특히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답답해하는 쪽에서 특사를 먼저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김여정 특사단을 보낸 것도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은 물론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세현/前 통일부 장관 : "남북관계가 끊어졌던 것을 다시 회복하려면 그 회복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느끼는 쪽에서 특사를 보내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남북 관계를 빠른 속도로 개선하려고 하고 최종 목적은 개선된 남북관계를 다리 삼아서 ‘태평양 건너 워싱턴으로 가고 싶다’ 하는 그런 뜻이 이미 그때 담겨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오간 남북 특사단은 특사 구성과 주요 회동 사실이 과거와 달리 대부분 공개된 채 진행 된 점도 주목된다. 남북 간 사전 물밑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 쪽에 이미 우리 의사가 전달이 되었고 또 북한 쪽의 의사는 우리 쪽에 이미 전달이 되었죠. 이미 많은 의제들이 조율이 되었고 합의가 거의 합의가 된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것 을 공개적으로 김정은이라고 하는 북한 최고지도자 입에서 받아내는 형식이 필요했던거죠."]

이번 우리 특사단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히 남북간 메신저 역할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을 방문해 방북 내용과 정부의 입장을 직접 설명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번 특사단 방북을 통해 남북이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일정 기간 특사의 역할이 사라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세현/前 통일부 장관 : "특사카드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 그러나 이러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처럼 관계가 나빠질 때는 필요하다면 특사를 또 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상태로 가면 특사는 뭐 다시 안 써도 되지 않겠는가. 우선 첫째 직통전화가 핫라인이 놓이니까 특사가 가서 될 일,힘들게 몇 시간 걸려서 가서해야 될 일 을 전화로 바로 걸 수 있기 때문에 특사 필요성이 거의 제로로 떨어진 거죠."]

여기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회담이 정례화 되면 특사의 필요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역대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대통령 특사로 꼽히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에 앞으로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특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동원/前 국정원장·통일부 장관 : "남북 관계가 동결되고 한반도 위기가 계속 조성되어 왔는데 이제 이것을 풀어나가야 됩니다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주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주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북 관계를 개선하면서 미국과 북한 관계 개선을 견인해 나갈 때 북한의 핵 문제도 해결될 수 있고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북 관계가 시계 제로일 때 남북을 오가며 평화의 불씨를 날랐던 대북 특사.

그들의 활동이 빛을 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북한 사이의 벽이 높고 과제가 산적해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북 특사들이 내놓은 물꼬가 한반도 평화의 길로 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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