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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여순사건과 법원의 언어
입력 2019.05.07 (10:25) 수정 2019.05.07 (10:25) 취재후
[취재후] 여순사건과 법원의 언어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아픈 과거사에 관한 것입니다."

2019년 4월 29일 낮 2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316호. 책이나 영화의 한 대목에서 들을 것 같은 말이 법정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실린 무게는 묵직했다. 사건번호 2013재고합5. 여순사건 첫 재심 재판은 순천지원 제1형사부 김정아 부장판사의 '모두발언(冒頭發言, 재판 등의 첫 발언)'으로 시작됐다.

71년 만에 다시 하는 재판. 여순사건 재심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방청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선 채로 재판을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재판장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판사석을 응시하던 방청객들은 이내 숙연해졌다. 김 판사는 말을 이어갔다.

"유족들과 이 지역민들에게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아직도 각자의 기억 속에, 이곳저곳의 건물, 운동장, 산천에 아로새겨져 있는 생생한 현재의 고통임을 재판부는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직후의 혼란기였던 1948년 10월에 일어났다.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는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정부군은 전력을 동원해 이를 신속하게 진압했다. 진짜 비극은 그 뒤부터다. '좌익'과 '우익'이란 말의 의미도 모르는 지역민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랐고 내 편이 아니면 가차 없이 죽였다. 특히 진압군이 '좌익 부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피해가 컸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하나에 반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고통은 당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혈육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국가는 이들을 '요시찰인'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연좌제를 적용해 교육과 취업의 기회도 제한했다. '여순'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숨죽여 산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유족들을 향해 김 판사는 발언을 계속했다.

"이 사건 피고인들의 유족들이 재심 재판을 열어달라고 청구한 지도 벌써 만 8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길었던 통한의 세월입니다."

여순사건 재심을 청구한 유족 3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장경자 씨도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 씨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당시 철도 기관사로 근무하다 경찰에 연행됐고, 내란 혐의로 계엄사령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음은 물론이고, 고문과 가혹 행위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장 씨와 다른 유족 2명은 불법 재판이었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과 2심 모두 청구를 인용했지만, 검찰이 잇따라 불복하면서 재심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2019년 3월, 대법원은 마침내 재심을 시작하라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청구 7년 반 만이었다. 그 사이 장 씨를 뺀 나머지 유족 2명은 재판 시작도 못 보고 세상을 떴다. 김 판사의 말대로 '너무나 길었던 통한의 세월'이었다. 꼿꼿하게 앉은 장 씨는 김 판사의 말을 경청했다.

[연관 기사] 여순사건 재심 판단, 왜 길어졌나?

"이제 이 재판부에서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위한 책무 중 일부를 하여야 합니다. 재판부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절차를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다만, 현행법의 규정과 해석 범위 내에서 이 재판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 과연 희생자들과 통한의 세월을 견디어 오신 유족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지, 그 점에 관하여 두려움이 앞섭니다."

김 판사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책임이었다. 불법적 국가폭력으로 숨진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법에 정해진 대로 재판을 다시 여는 것은 국가의, 그리고 법원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국가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더라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해를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논리 정연하고 차가운 언어만 존재할 것 같은 법정에서 김 판사의 발언은 사뭇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엄한 표정으로 검사와 변호인의 이야기를 듣고, 법리에 따라 냉정한 판단을 내리던 법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국가의 책임을 말하고…. 방청석과 한참 떨어져 있는 판사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덧 모두발언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으셨음을 기록 등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 아빠의 면회를 갔던 세 살 아이는 연세가 70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직하면서 대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에 눈물의 호소를 하셨습니다. 재심 청구인께서 희망하신다면, 오늘 이 법정에서 심경을 밝히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세 살 아이'는 다름 아닌 재심 청구인 장경자 씨였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여순사건 재심을 청구해 첫 재심을 이끌어 내고,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던 사람이었다. 변호인이 있는 만큼 장 씨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장 씨에게 이야기를 청한 이유는, 재판에 앞서 조금이나마 유족의 한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김 판사의 발언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길지 않은 발언이었지만 여운이 오래갔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토록 절절히 위로하는 말을 법원에서, 판사에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득 한 달 전 대법원이 내린 여순사건 재심의 결정문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여순사건 재심 청구를 인용하면서 대법관들은 보충의견에 이렇게 썼다. 김 판사의 말처럼 따뜻한 온도를 지닌 문장들이었다.

[연관기사] 대법원, 여순사건 첫 재심 결정

"역사의 수레바퀴에 스러져간 영혼은 그 누가 달랠 수 있겠는가? 이 결정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얼마나 위로가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중략…) 그래도 법에 호소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법률에 충실한 판단을 하는 것이 그들이 기댄 국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법부가 할 최소한의 도리이다."

김 판사의 발언과 대법원의 결정문은, 불법적인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과거사 사건을 마주하는 국가가 지녀야 할 태도를 알려준다. 용서하기 어려운 만행을 저질렀다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상관없이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공감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그래야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불행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걸 예방할 수 있다. '최소한의 도리' '두려움'을 얘기하는 판사들의 말로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기대를, 이번에 시작한 첫 재심 재판에 걸어 본다.
  • [취재후] 여순사건과 법원의 언어
    • 입력 2019.05.07 (10:25)
    • 수정 2019.05.07 (10:25)
    취재후
[취재후] 여순사건과 법원의 언어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아픈 과거사에 관한 것입니다."

2019년 4월 29일 낮 2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316호. 책이나 영화의 한 대목에서 들을 것 같은 말이 법정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실린 무게는 묵직했다. 사건번호 2013재고합5. 여순사건 첫 재심 재판은 순천지원 제1형사부 김정아 부장판사의 '모두발언(冒頭發言, 재판 등의 첫 발언)'으로 시작됐다.

71년 만에 다시 하는 재판. 여순사건 재심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방청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선 채로 재판을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재판장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판사석을 응시하던 방청객들은 이내 숙연해졌다. 김 판사는 말을 이어갔다.

"유족들과 이 지역민들에게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아직도 각자의 기억 속에, 이곳저곳의 건물, 운동장, 산천에 아로새겨져 있는 생생한 현재의 고통임을 재판부는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직후의 혼란기였던 1948년 10월에 일어났다.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는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정부군은 전력을 동원해 이를 신속하게 진압했다. 진짜 비극은 그 뒤부터다. '좌익'과 '우익'이란 말의 의미도 모르는 지역민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랐고 내 편이 아니면 가차 없이 죽였다. 특히 진압군이 '좌익 부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피해가 컸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하나에 반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고통은 당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혈육을 잃은 유족들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국가는 이들을 '요시찰인'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연좌제를 적용해 교육과 취업의 기회도 제한했다. '여순'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숨죽여 산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유족들을 향해 김 판사는 발언을 계속했다.

"이 사건 피고인들의 유족들이 재심 재판을 열어달라고 청구한 지도 벌써 만 8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길었던 통한의 세월입니다."

여순사건 재심을 청구한 유족 3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장경자 씨도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 씨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당시 철도 기관사로 근무하다 경찰에 연행됐고, 내란 혐의로 계엄사령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음은 물론이고, 고문과 가혹 행위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장 씨와 다른 유족 2명은 불법 재판이었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과 2심 모두 청구를 인용했지만, 검찰이 잇따라 불복하면서 재심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2019년 3월, 대법원은 마침내 재심을 시작하라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청구 7년 반 만이었다. 그 사이 장 씨를 뺀 나머지 유족 2명은 재판 시작도 못 보고 세상을 떴다. 김 판사의 말대로 '너무나 길었던 통한의 세월'이었다. 꼿꼿하게 앉은 장 씨는 김 판사의 말을 경청했다.

[연관 기사] 여순사건 재심 판단, 왜 길어졌나?

"이제 이 재판부에서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위한 책무 중 일부를 하여야 합니다. 재판부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절차를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다만, 현행법의 규정과 해석 범위 내에서 이 재판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 과연 희생자들과 통한의 세월을 견디어 오신 유족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지, 그 점에 관하여 두려움이 앞섭니다."

김 판사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책임이었다. 불법적 국가폭력으로 숨진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법에 정해진 대로 재판을 다시 여는 것은 국가의, 그리고 법원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국가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더라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피해를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논리 정연하고 차가운 언어만 존재할 것 같은 법정에서 김 판사의 발언은 사뭇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엄한 표정으로 검사와 변호인의 이야기를 듣고, 법리에 따라 냉정한 판단을 내리던 법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국가의 책임을 말하고…. 방청석과 한참 떨어져 있는 판사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덧 모두발언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으셨음을 기록 등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 아빠의 면회를 갔던 세 살 아이는 연세가 70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직하면서 대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에 눈물의 호소를 하셨습니다. 재심 청구인께서 희망하신다면, 오늘 이 법정에서 심경을 밝히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세 살 아이'는 다름 아닌 재심 청구인 장경자 씨였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여순사건 재심을 청구해 첫 재심을 이끌어 내고,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던 사람이었다. 변호인이 있는 만큼 장 씨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장 씨에게 이야기를 청한 이유는, 재판에 앞서 조금이나마 유족의 한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김 판사의 발언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길지 않은 발언이었지만 여운이 오래갔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토록 절절히 위로하는 말을 법원에서, 판사에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득 한 달 전 대법원이 내린 여순사건 재심의 결정문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여순사건 재심 청구를 인용하면서 대법관들은 보충의견에 이렇게 썼다. 김 판사의 말처럼 따뜻한 온도를 지닌 문장들이었다.

[연관기사] 대법원, 여순사건 첫 재심 결정

"역사의 수레바퀴에 스러져간 영혼은 그 누가 달랠 수 있겠는가? 이 결정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얼마나 위로가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중략…) 그래도 법에 호소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법률에 충실한 판단을 하는 것이 그들이 기댄 국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법부가 할 최소한의 도리이다."

김 판사의 발언과 대법원의 결정문은, 불법적인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과거사 사건을 마주하는 국가가 지녀야 할 태도를 알려준다. 용서하기 어려운 만행을 저질렀다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상관없이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공감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그래야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불행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걸 예방할 수 있다. '최소한의 도리' '두려움'을 얘기하는 판사들의 말로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기대를, 이번에 시작한 첫 재심 재판에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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