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속 독립운동]③ ‘유언비어’ 퍼트리면 감옥살이, 일제가 잡아간 민초들

입력 2019.08.13 (07:03) 수정 2019.08.1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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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일제 말기 새로운 민중 탄압 '유언비언 유포죄'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이미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독립 결사단체가 와해되거나 해외로 진출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유언비어'의 살포를 통해 일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 염원을 이어갔습니다. 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해 이웃에 알리거나, 일제가 곧 패배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한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주변에 전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3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3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

"요새 일제가 여자들을 공출해가니 조심하라"고 이웃에 말한 농부 징역형

그러나 일제는 단순한 소문이나 희망을 담은 민중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상식을 뛰어넘는 강한 처벌로 대응했습니다. 일제가 만든 조선임시보안령에 따르면 '시국에 관련한 유언비어 전달'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 원(당시 교사 월급 24원)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민중들의 동요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소문을 퍼트리는 '유언비어'를 보안법 위반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단순히 동네 이웃에게 소문을 이야기했던 한 농부는 징역 4개월의 실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1943년 대구지방법원이 피고 길 모 씨게 내린 판결문입니다.

「피고인은 선산군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큰딸이 시집 간 시댁에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옆 동네 이웃을 만났다. 그는 이웃에게 "이 부락에는 여자 공출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내 이웃 부락에서는 여자 아이 3명이 공출하게 됐다. 붉은 종이 1장이 오면 바로 만주로 가게 되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려 공출을 면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아이 둘은 만주로 가야 했다. 당신도 딸 가운데 결혼 안 한 아이가 있다면 빨리 시집을 보내야 좋다"고 말했다. 이는 시국에 대해 인심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5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5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

"일본이 매일같이 공습을 받고 있다더라"고 친구에게 말한 어부 징역형

특히 일제가 강점기 말에 벌인 전쟁 이후로 유언비어에 대한 경계는 더 심해졌습니다. 다음은 1945년 경성지방법원에서 피고 유 모 씨에게 내려진 또 다른 판결문입니다.

「피고는 어업을 하는 사람으로 성동구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잡담을 하던 중 친구들에게 "매일같이 일본은 공습을 받고 있으며, 일본은 적의 공습으로 모두 화재가 나므로 일본 천황폐하는 지금 경성의 백화점 지하실에 피난해 놀고 있다"고 멋대로 말해여 전시에 인심의 혹란을 유발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2개월 동안 '유언비어 유포범'으로 검거된 사람만 120명에 달했습니다. 중일전쟁기인 1937년부터 2년 동안 검거된 사람은 360명, 이 가운데 한국인이 326명으로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일제는 301명을 육군형법 위반으로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일본 패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삐라 1만 장 유포, 유언비어의 조직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중들의 유언비어는 확대돼 대규모 '삐라 살포 사건'으로 발전한 일도 있었습니다. 1940년 6월, 서울의 서대문구 국기게양대 부근에 일제가 '불온문서'로 명명한 출판물 1만 장이 뿌려졌습니다.

당시 서대문서에서 회수해 보관한 문서의 종류만 해도 19가지 종류에 달했습니다. 문서에는 "일본 패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역사 반만년의 치욕, 붉은 피와 죽음으로 시대를 회복하자", "학생 제군이여,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민족운동에 참가하자",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경찰은 인근 기독학교 기숙사에서 원고를 작성해 학교 내에서 복사한 것으로 파악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학생 80명의 시험 답안지까지 확보해 글씨 모양을 비교했지만 결국 주범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후 일제는 유언비어와 불온문서에 대해 더욱 탄압했습니다.


'조선은 독립합니다' 적은 행운의 편지까지…일제도 못 막은 독립 염원

지폐에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를 적어 소비하거나, 행운의 편지를 써서 돌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1939년 7월 25일 서울에서 '조선은 독립합니다' 문구가 들어간 행운의 편지가 돌아 경찰이 회수했습니다. 또 일본 도쿄에서도 1942년 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전쟁은 인생의 최대 비참한 일로서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전쟁은 군인의 영예를 위해 수 만의 인생을 희생한다" 라는 편지가 돌기도 했습니다.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1939년 보안법 위반 기록에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일하는 20살 청년이 1엔권 지폐에 '조선을 독립시켜주세요'라는 글을 적어 유통시켜 검거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무단통치 속에서도 민중들은 '유언비어'라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우리 민중들의 관련 판결문 기록만 70여 건에 달하니, 기소유예가 되거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례는 더욱 많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이어져 온 민중들의 소극적이었지만 끈질겼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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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문속 독립운동]③ ‘유언비어’ 퍼트리면 감옥살이, 일제가 잡아간 민초들
    • 입력 2019-08-13 07:03:11
    • 수정2019-08-14 08:02:15
    취재K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일제 말기 새로운 민중 탄압 '유언비언 유포죄'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이미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독립 결사단체가 와해되거나 해외로 진출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유언비어'의 살포를 통해 일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 염원을 이어갔습니다. 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해 이웃에 알리거나, 일제가 곧 패배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한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주변에 전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3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
"요새 일제가 여자들을 공출해가니 조심하라"고 이웃에 말한 농부 징역형

그러나 일제는 단순한 소문이나 희망을 담은 민중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상식을 뛰어넘는 강한 처벌로 대응했습니다. 일제가 만든 조선임시보안령에 따르면 '시국에 관련한 유언비어 전달'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 원(당시 교사 월급 24원)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민중들의 동요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소문을 퍼트리는 '유언비어'를 보안법 위반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단순히 동네 이웃에게 소문을 이야기했던 한 농부는 징역 4개월의 실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1943년 대구지방법원이 피고 길 모 씨게 내린 판결문입니다.

「피고인은 선산군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큰딸이 시집 간 시댁에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옆 동네 이웃을 만났다. 그는 이웃에게 "이 부락에는 여자 공출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내 이웃 부락에서는 여자 아이 3명이 공출하게 됐다. 붉은 종이 1장이 오면 바로 만주로 가게 되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려 공출을 면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아이 둘은 만주로 가야 했다. 당신도 딸 가운데 결혼 안 한 아이가 있다면 빨리 시집을 보내야 좋다"고 말했다. 이는 시국에 대해 인심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45년 유언비어죄 징역형 판결문
"일본이 매일같이 공습을 받고 있다더라"고 친구에게 말한 어부 징역형

특히 일제가 강점기 말에 벌인 전쟁 이후로 유언비어에 대한 경계는 더 심해졌습니다. 다음은 1945년 경성지방법원에서 피고 유 모 씨에게 내려진 또 다른 판결문입니다.

「피고는 어업을 하는 사람으로 성동구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잡담을 하던 중 친구들에게 "매일같이 일본은 공습을 받고 있으며, 일본은 적의 공습으로 모두 화재가 나므로 일본 천황폐하는 지금 경성의 백화점 지하실에 피난해 놀고 있다"고 멋대로 말해여 전시에 인심의 혹란을 유발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2개월 동안 '유언비어 유포범'으로 검거된 사람만 120명에 달했습니다. 중일전쟁기인 1937년부터 2년 동안 검거된 사람은 360명, 이 가운데 한국인이 326명으로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일제는 301명을 육군형법 위반으로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일본 패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삐라 1만 장 유포, 유언비어의 조직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중들의 유언비어는 확대돼 대규모 '삐라 살포 사건'으로 발전한 일도 있었습니다. 1940년 6월, 서울의 서대문구 국기게양대 부근에 일제가 '불온문서'로 명명한 출판물 1만 장이 뿌려졌습니다.

당시 서대문서에서 회수해 보관한 문서의 종류만 해도 19가지 종류에 달했습니다. 문서에는 "일본 패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역사 반만년의 치욕, 붉은 피와 죽음으로 시대를 회복하자", "학생 제군이여,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민족운동에 참가하자",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경찰은 인근 기독학교 기숙사에서 원고를 작성해 학교 내에서 복사한 것으로 파악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학생 80명의 시험 답안지까지 확보해 글씨 모양을 비교했지만 결국 주범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후 일제는 유언비어와 불온문서에 대해 더욱 탄압했습니다.


'조선은 독립합니다' 적은 행운의 편지까지…일제도 못 막은 독립 염원

지폐에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를 적어 소비하거나, 행운의 편지를 써서 돌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1939년 7월 25일 서울에서 '조선은 독립합니다' 문구가 들어간 행운의 편지가 돌아 경찰이 회수했습니다. 또 일본 도쿄에서도 1942년 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전쟁은 인생의 최대 비참한 일로서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전쟁은 군인의 영예를 위해 수 만의 인생을 희생한다" 라는 편지가 돌기도 했습니다.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1939년 보안법 위반 기록에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일하는 20살 청년이 1엔권 지폐에 '조선을 독립시켜주세요'라는 글을 적어 유통시켜 검거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무단통치 속에서도 민중들은 '유언비어'라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우리 민중들의 관련 판결문 기록만 70여 건에 달하니, 기소유예가 되거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례는 더욱 많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이어져 온 민중들의 소극적이었지만 끈질겼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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