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 영원히 펜을 놓다

입력 2019.09.0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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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바우 영감' 최장수 연재…한국 기네스북 올라
촌철살인 세태 풍자로 권력 비판
잦은 필화와 검열…수정·삭제에도 펜 꺾지 않아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반세기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한국을 대표하는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이 어제(8일) 향년 87살로 별세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김 화백은 8일 오후 3시 45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빈소는 분당재생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11일 오전 발인 예정이다.

‘꺼꾸리군 장다리군’ (잡지 학원)‘꺼꾸리군 장다리군’ (잡지 학원)

‘막동이’ 1회 (경향신문 1954.11.14.)‘막동이’ 1회 (경향신문 1954.11.14.)

‘고바우 영감’ 1회 (동아일보 1955.02.01.)‘고바우 영감’ 1회 (동아일보 1955.02.01.)

‘고바우 영감’ 14,139회 (문화일보 2000.09.29.)‘고바우 영감’ 14,139회 (문화일보 2000.09.29.)

■분신과 같았던 캐릭터 '고바우 영감'
193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 화백은 경복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4칸 만화를 투고하며 만화계에 데뷔했다. 만화평론가 박석환에 따르면 김 화백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으로 계몽 포스터와 삐라 등을 만들다가 1953년 학생잡지 '학원'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연재하면서 창작 만화를 내놓았다.

김 화백은 신문 연재를 경향신문에서 다른 작품으로 시작했지만 시사 만화가로서 성가를 드높인 것은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면서였다. 김 화백은 1954년 11월 14일 일요일자 경향신문 4면에 '막둥이' 라는 4칸 만화 첫 호를 선보인 뒤 이듬해인 1955년 2월 13일까지 매주 한 번씩 총 13회를 실었다. 김성환 화백은 동시에 199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의 일간 연재를 시작했다. '고바우 영감'은 원래 1950년 육군본부가 발간한 '사병만화'에 먼저 실렸던 작품이었다. '고바우 영감'은 동아일보에 1980년 8월 9일까지 7,971회를 연재한 뒤 조선일보로 매체를 옮긴다. 조선일보에서는 1980년 9월 11일부터 1992년까지 연재를 이어갔고 1992년엔 문화일보로 지면을 바꿔 매일 독자를 만나다가 2000년 9월 29일 14,139회를 끝으로 50년간의 연재를 마쳤다.

[연관 기사] 고바우 반세기 김성환 화백 기념전시회/KBS뉴스 2000.11.14.

■유머에서 풍자로…세태 풍자로 권력 비판
작고 뭉툭한 몸매에 안경과 콧수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이 인상적인 캐릭터 고바우 영감은 첫 회에서는 말이 없었다. 말없이 그저 별난 행동으로 넌지시 웃음을 주던 이 캐릭터는 차츰 권력에 대한 저항의 캐릭터로 변모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 박정희·전두환 군사 정권의 정치 탄압 등 부조리한 현실을 겪으면서 김 화백의 펜 끝은 고바우 영감의 말과 행동을 빌어 신랄한 풍자와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필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바우 영감’ 1,031회(동아일보 1958.01.23.)‘고바우 영감’ 1,031회(동아일보 1958.01.23.)

김 화백이 겪은 가장 유명한 필화사건 사례. 김 화백은 이승만 정권 시절 경무대(현 청와대) 화장실 청소부를 소재로 당시 절대 권력의 민낯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김 화백은 2013년 인터뷰 전문매체 <인 터뷰 365>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가짜 이강석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만화가 게재된 후 시경 사찰과에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른 뒤 경범죄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말했다.

■필화와 삭제 등 고초에도 펜 꺾지 않아
1970~80년대 들어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바우 영감'의 풍자 수위가 높아질수록 필화사건도 더 잦아졌다. 당시 검열 당국은 민감한 소재가 '고바우 영감'에 등장할 때마다 수시로 경고를 하거나 제재를 내렸고, 심한 경우 4칸 만화 전체를 삭제하거나 게재 불가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신문사라는 비교적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음에도 즉결 재판에 회부되거나 벌금형을 받기도 했고 특히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보부 요원들의 취조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1963년 AP통신은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을 전하면서 '고바우 영감'을 소개했고, 1973년 일본 산케이신문은 고바우영감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토픽으로 전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1998년 한국 만화가로는 최초로 세계만화백과사전(첼시하우스사 발행)에 등재됐다.

[연관 기사] 고바우에 비친 현대사/KBS뉴스 2014.10.31.

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2000)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2000)

■최장수 연재 시사만화로 한국 기네스북 등재
‘고바우 영감’이 연재를 마치던 해인 2000년, 한국 만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2001년엔 단일 만화로는 우리나라 최장수 연재 시사만화로 인정받아 한국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미국의 신문연재 만화 '블론디'의 경우 1930년부터 아직 연재를 계속하고 있지만 이는 만화가인 칙 영과 딘 영 부자가 같은 제목의 만화를 이어서 그리고 있는 덕분이지, 한 개인이 신문에 45년간 연재를 했다는 사실은 전무후무하다. 2013년에는 '고바우 영감' 원화가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만화 최초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고바우 영감' 연재 종료 후에도 창작열 불태워
김성환 화백에게 '고바우 영감' 연재 종료는 창작의 종착역이 아니었다. 2004년 판자촌 시대전을 시작으로 2007년 서화 소품전을, 2010년엔 1950~60년대 시대상을 담은 '그 시절 그 모습' 전시회를 열어 건재를 과시했다.

[연관 기사] 화폭에 담긴 ‘그때 그 시절 일상’/KBS뉴스 2010.10.02

김 화백은 또한 구한말 우표 등 국내외 희귀 우표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우표수집가로도 유명했다. 2005년엔 반평생을 두고 모은 유명 화가들의 육필 까셰(우표 수집가들이 새 우표가 나오면 편지봉투에 붙이고 그 날짜 소인을 찍은 뒤 봉투 한 모퉁이에 우표 관련 그림을 그려넣은 것) 모음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연관 기사] 편지봉투 위에 꽃핀 예술/KBS뉴스 2005.09.22.

김 화백은 2013년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고바우 영감' 원화 7,600여 점을 기증하고 받은 수익 가운데 1억 원과 사후 인세 전액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해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와 유산기부 회원 모임인 '레거시 클럽'에도 가입했다. 생전에 소파상(1974), 서울언론인클럽 신문만화상(1988), 언론학회 언론상(1990), 한국만화문화상(1997), 보관문화훈장(2002) 등을 받았고 2001년 자신이 출연한 기금으로 '고바우 만화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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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 영원히 펜을 놓다
    • 입력 2019-09-09 13:59:45
    취재K
'고바우 영감' 최장수 연재…한국 기네스북 올라 <br />촌철살인 세태 풍자로 권력 비판 <br />잦은 필화와 검열…수정·삭제에도 펜 꺾지 않아 <br />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반세기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한국을 대표하는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이 어제(8일) 향년 87살로 별세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김 화백은 8일 오후 3시 45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빈소는 분당재생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11일 오전 발인 예정이다.

‘꺼꾸리군 장다리군’ (잡지 학원)
‘막동이’ 1회 (경향신문 1954.11.14.)
‘고바우 영감’ 1회 (동아일보 1955.02.01.)
‘고바우 영감’ 14,139회 (문화일보 2000.09.29.)
■분신과 같았던 캐릭터 '고바우 영감'
193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 화백은 경복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4칸 만화를 투고하며 만화계에 데뷔했다. 만화평론가 박석환에 따르면 김 화백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으로 계몽 포스터와 삐라 등을 만들다가 1953년 학생잡지 '학원'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연재하면서 창작 만화를 내놓았다.

김 화백은 신문 연재를 경향신문에서 다른 작품으로 시작했지만 시사 만화가로서 성가를 드높인 것은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면서였다. 김 화백은 1954년 11월 14일 일요일자 경향신문 4면에 '막둥이' 라는 4칸 만화 첫 호를 선보인 뒤 이듬해인 1955년 2월 13일까지 매주 한 번씩 총 13회를 실었다. 김성환 화백은 동시에 199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의 일간 연재를 시작했다. '고바우 영감'은 원래 1950년 육군본부가 발간한 '사병만화'에 먼저 실렸던 작품이었다. '고바우 영감'은 동아일보에 1980년 8월 9일까지 7,971회를 연재한 뒤 조선일보로 매체를 옮긴다. 조선일보에서는 1980년 9월 11일부터 1992년까지 연재를 이어갔고 1992년엔 문화일보로 지면을 바꿔 매일 독자를 만나다가 2000년 9월 29일 14,139회를 끝으로 50년간의 연재를 마쳤다.

[연관 기사] 고바우 반세기 김성환 화백 기념전시회/KBS뉴스 2000.11.14.

■유머에서 풍자로…세태 풍자로 권력 비판
작고 뭉툭한 몸매에 안경과 콧수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이 인상적인 캐릭터 고바우 영감은 첫 회에서는 말이 없었다. 말없이 그저 별난 행동으로 넌지시 웃음을 주던 이 캐릭터는 차츰 권력에 대한 저항의 캐릭터로 변모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 박정희·전두환 군사 정권의 정치 탄압 등 부조리한 현실을 겪으면서 김 화백의 펜 끝은 고바우 영감의 말과 행동을 빌어 신랄한 풍자와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필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바우 영감’ 1,031회(동아일보 1958.01.23.)
김 화백이 겪은 가장 유명한 필화사건 사례. 김 화백은 이승만 정권 시절 경무대(현 청와대) 화장실 청소부를 소재로 당시 절대 권력의 민낯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김 화백은 2013년 인터뷰 전문매체 <인 터뷰 365>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가짜 이강석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만화가 게재된 후 시경 사찰과에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른 뒤 경범죄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말했다.

■필화와 삭제 등 고초에도 펜 꺾지 않아
1970~80년대 들어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바우 영감'의 풍자 수위가 높아질수록 필화사건도 더 잦아졌다. 당시 검열 당국은 민감한 소재가 '고바우 영감'에 등장할 때마다 수시로 경고를 하거나 제재를 내렸고, 심한 경우 4칸 만화 전체를 삭제하거나 게재 불가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신문사라는 비교적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음에도 즉결 재판에 회부되거나 벌금형을 받기도 했고 특히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보부 요원들의 취조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1963년 AP통신은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을 전하면서 '고바우 영감'을 소개했고, 1973년 일본 산케이신문은 고바우영감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토픽으로 전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1998년 한국 만화가로는 최초로 세계만화백과사전(첼시하우스사 발행)에 등재됐다.

[연관 기사] 고바우에 비친 현대사/KBS뉴스 2014.10.31.

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2000)
■최장수 연재 시사만화로 한국 기네스북 등재
‘고바우 영감’이 연재를 마치던 해인 2000년, 한국 만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고바우 탄생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2001년엔 단일 만화로는 우리나라 최장수 연재 시사만화로 인정받아 한국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미국의 신문연재 만화 '블론디'의 경우 1930년부터 아직 연재를 계속하고 있지만 이는 만화가인 칙 영과 딘 영 부자가 같은 제목의 만화를 이어서 그리고 있는 덕분이지, 한 개인이 신문에 45년간 연재를 했다는 사실은 전무후무하다. 2013년에는 '고바우 영감' 원화가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만화 최초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고바우 영감' 연재 종료 후에도 창작열 불태워
김성환 화백에게 '고바우 영감' 연재 종료는 창작의 종착역이 아니었다. 2004년 판자촌 시대전을 시작으로 2007년 서화 소품전을, 2010년엔 1950~60년대 시대상을 담은 '그 시절 그 모습' 전시회를 열어 건재를 과시했다.

[연관 기사] 화폭에 담긴 ‘그때 그 시절 일상’/KBS뉴스 2010.10.02

김 화백은 또한 구한말 우표 등 국내외 희귀 우표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우표수집가로도 유명했다. 2005년엔 반평생을 두고 모은 유명 화가들의 육필 까셰(우표 수집가들이 새 우표가 나오면 편지봉투에 붙이고 그 날짜 소인을 찍은 뒤 봉투 한 모퉁이에 우표 관련 그림을 그려넣은 것) 모음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연관 기사] 편지봉투 위에 꽃핀 예술/KBS뉴스 2005.09.22.

김 화백은 2013년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고바우 영감' 원화 7,600여 점을 기증하고 받은 수익 가운데 1억 원과 사후 인세 전액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해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와 유산기부 회원 모임인 '레거시 클럽'에도 가입했다. 생전에 소파상(1974), 서울언론인클럽 신문만화상(1988), 언론학회 언론상(1990), 한국만화문화상(1997), 보관문화훈장(2002) 등을 받았고 2001년 자신이 출연한 기금으로 '고바우 만화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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