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화성]③ 수사대상 5만…처절했던 ‘수사의 추억’

입력 2019.09.28 (08:03) 수정 2019.09.2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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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끝나지 않은 화성③]
1987~93년 수사비 5억 원 투입
현재가치로 최대 30억 원 달해
직접 수사 1만 4000명·지문 대조 3만 8000명
강력범죄 1100여 건 해결

'왜 못 잡았을까,'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이 모 씨가 본적지가 화성이고, 범행 내내 화성에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때 잡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궁금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실체적 진실 규명을 강조하며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의 한 관계자는 지금의 잣대로 30여 년 전을 평가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각종 기술과 수사 노하우가 발전한 지금의 관점에서 30여 년 전 수사를 평가하면 당연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를 잡아서 자백했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 용의자가 부인해 강압 수사 논란에 휩싸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최악의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사를 벌였던 기록은 국정감사 자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수사비 5억 원…91년에 집중
KBS가 입수한 1993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당시 경기도지방경찰청은 수사상황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수사비도 함께 기록했다. 수사비 지출을 보면 경찰이 얼마나 수사력을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수사비는 1987년 당시 돈으로 3946만 원을 썼다. 1986년부터 87년까지 2년 동안 10차례 사건 중 6건이 일어났는데, 수사 역량을 많이 투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찰은 4차 사건까지는 연쇄살인으로 분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10건 중 2건이 일어난 1988년에는 전년보다 2000만 원정도 늘어난 6962만 원이 수사비로 사용됐다. 연쇄살인으로 분류한 이후 사건이 이어지자 수사력을 더 투입한 것이다.

사건이 한 건도 없었던 1989년에는 수사비 지출이 1641만 원으로 전년의 6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1990년에는 다시 7821만 원으로 뛰어올랐다. 90년 11월 2년 2개월 만에 9차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10차 사건이 있었던 1991년에는 수사비로 1억 4910만 원을 썼다. 가장 많은 수사비를 쓴 해이다. 1992년에는 1억 567만 원, 1993년 8월까지는 5730만 원을 사용했다.

1987년부터 93년 8월까지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쓴 수사비는 모두 5억 원이 넘는다. 이를 한국은행의 화폐가치 환산법으로 계산해보면 적게는 12억 원(소비자물가지수 기준)에서 많게는 30억 원(금 시세 기준) 안팎으로 추정된다.


"여자에 굶주린 자, 증오심 가진 자…"
경찰이 범행을 분석해 국감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10차례 범행 중 8건이 9월부터 1월 사이 '추동기'에 집중됐고, 오후 7~11시에 사이에 일어난 것도 8건이었다. 눈 또는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또는 안개 낀 날 발생한 게 7건이다. 여성의 중요 부위를 훼손한 것도 5건이나 됐다.

이 같은 범행 특징을 바탕으로 경찰은 범인을 '여자에 굶주린 자, 증오심을 가진 자, 정신이상자, 변태성욕자', 혹은 '환각 상태의 무동기 범죄자'로 추정했다.

경찰 수사는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1994년 국감 자료에 경찰이 직접 조사한 수사 대상자는 1만4458건으로 돼 있다. 이 가운데 기타가 7325명으로 가장 많고, 방위병이 2274명으로 뒤를 이었다. 범인이 2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다 보니 출퇴근을 하는 방위병이 첫 손에 꼽힌 걸로 보인다.

전출자도 1087명이나 조사했다. 범인이 범행 후 화성 지역을 떠났을 가능성도 염두에 둔 수사로 볼 수 있다. 경찰이 용의자로 분류해 조사한 사람은 936명이다. 유력 용의자 이 모 씨는 여기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우범 불량배 846명, 정기 통행자 792명, 동일수법 전과자 579명, 독신자 323명, 피해자 주변인 136명, 변태 성욕자 88명, 종교인 30명을 조사했다. 동네 불량배부터 성직자까지 사회 각계각층을 조사한 셈이다.

이러한 조사에 경찰 인력은 연인원 137만 명이 투입됐다. 수사 형사가 28만1746명, 일반 경찰이 21만5414명, 기동대와 방범순찰대가 78만9466명 등이다.


여경 투입 '공작 수사'도 150회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여경들도 적극적으로 투입됐다. 이는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도 나온다. 범인이 빨간 옷을 입은 사람만을 노린다는 점을 고려해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범인이 나타날 만한 곳을 지나가게 하는 장면이다.

범인이 빨간 옷 여성만을 노렸다는 건 사실이 아니지만, 여경을 이러한 함정 수사에 쓴 건 사실이다. 국감 자료에는 '공작 수사'로 표현돼 있는데, 당시 경찰은 여경 1134명을 동원해 151회에 걸쳐 공작 수사를 벌였다. 남자 형사가 여장을 하고 잠복 수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다방면에 걸친 수사는 연쇄살인에서는 성과가 없었지만, 다른 곳에서 성과가 나타났다. 경찰은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폭력 244명, 성폭행 231명, 절도 201명, 살인 44명, 강도 39명 등을 검거했다. 연쇄살인과 별개 범죄들이다. 이때 잡은 사람이 1994년 9월 말 기준으로 1164명이다. 이 가운데 481명을 구속했다.

국감 자료에서 화성연쇄살인의 흔적은 1994년까지 발견됐다. 이후에는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국회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연쇄살인을 잊어갈 무렵인 1994년 1월 유력 용의자 이 씨는 처제를 살해하고 붙잡혔다.

오현태·김지숙·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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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나지 않은 화성]③ 수사대상 5만…처절했던 ‘수사의 추억’
    • 입력 2019-09-28 08:03:29
    • 수정2019-09-28 08:20:18
    취재K
[끝나지 않은 화성③] <br />1987~93년 수사비 5억 원 투입 <br />현재가치로 최대 30억 원 달해 <br />직접 수사 1만 4000명·지문 대조 3만 8000명 <br />강력범죄 1100여 건 해결
'왜 못 잡았을까,'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이 모 씨가 본적지가 화성이고, 범행 내내 화성에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때 잡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궁금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실체적 진실 규명을 강조하며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의 한 관계자는 지금의 잣대로 30여 년 전을 평가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각종 기술과 수사 노하우가 발전한 지금의 관점에서 30여 년 전 수사를 평가하면 당연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를 잡아서 자백했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 용의자가 부인해 강압 수사 논란에 휩싸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최악의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사를 벌였던 기록은 국정감사 자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수사비 5억 원…91년에 집중
KBS가 입수한 1993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당시 경기도지방경찰청은 수사상황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수사비도 함께 기록했다. 수사비 지출을 보면 경찰이 얼마나 수사력을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수사비는 1987년 당시 돈으로 3946만 원을 썼다. 1986년부터 87년까지 2년 동안 10차례 사건 중 6건이 일어났는데, 수사 역량을 많이 투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찰은 4차 사건까지는 연쇄살인으로 분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10건 중 2건이 일어난 1988년에는 전년보다 2000만 원정도 늘어난 6962만 원이 수사비로 사용됐다. 연쇄살인으로 분류한 이후 사건이 이어지자 수사력을 더 투입한 것이다.

사건이 한 건도 없었던 1989년에는 수사비 지출이 1641만 원으로 전년의 6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1990년에는 다시 7821만 원으로 뛰어올랐다. 90년 11월 2년 2개월 만에 9차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10차 사건이 있었던 1991년에는 수사비로 1억 4910만 원을 썼다. 가장 많은 수사비를 쓴 해이다. 1992년에는 1억 567만 원, 1993년 8월까지는 5730만 원을 사용했다.

1987년부터 93년 8월까지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쓴 수사비는 모두 5억 원이 넘는다. 이를 한국은행의 화폐가치 환산법으로 계산해보면 적게는 12억 원(소비자물가지수 기준)에서 많게는 30억 원(금 시세 기준) 안팎으로 추정된다.


"여자에 굶주린 자, 증오심 가진 자…"
경찰이 범행을 분석해 국감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10차례 범행 중 8건이 9월부터 1월 사이 '추동기'에 집중됐고, 오후 7~11시에 사이에 일어난 것도 8건이었다. 눈 또는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또는 안개 낀 날 발생한 게 7건이다. 여성의 중요 부위를 훼손한 것도 5건이나 됐다.

이 같은 범행 특징을 바탕으로 경찰은 범인을 '여자에 굶주린 자, 증오심을 가진 자, 정신이상자, 변태성욕자', 혹은 '환각 상태의 무동기 범죄자'로 추정했다.

경찰 수사는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1994년 국감 자료에 경찰이 직접 조사한 수사 대상자는 1만4458건으로 돼 있다. 이 가운데 기타가 7325명으로 가장 많고, 방위병이 2274명으로 뒤를 이었다. 범인이 2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다 보니 출퇴근을 하는 방위병이 첫 손에 꼽힌 걸로 보인다.

전출자도 1087명이나 조사했다. 범인이 범행 후 화성 지역을 떠났을 가능성도 염두에 둔 수사로 볼 수 있다. 경찰이 용의자로 분류해 조사한 사람은 936명이다. 유력 용의자 이 모 씨는 여기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우범 불량배 846명, 정기 통행자 792명, 동일수법 전과자 579명, 독신자 323명, 피해자 주변인 136명, 변태 성욕자 88명, 종교인 30명을 조사했다. 동네 불량배부터 성직자까지 사회 각계각층을 조사한 셈이다.

이러한 조사에 경찰 인력은 연인원 137만 명이 투입됐다. 수사 형사가 28만1746명, 일반 경찰이 21만5414명, 기동대와 방범순찰대가 78만9466명 등이다.


여경 투입 '공작 수사'도 150회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여경들도 적극적으로 투입됐다. 이는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도 나온다. 범인이 빨간 옷을 입은 사람만을 노린다는 점을 고려해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범인이 나타날 만한 곳을 지나가게 하는 장면이다.

범인이 빨간 옷 여성만을 노렸다는 건 사실이 아니지만, 여경을 이러한 함정 수사에 쓴 건 사실이다. 국감 자료에는 '공작 수사'로 표현돼 있는데, 당시 경찰은 여경 1134명을 동원해 151회에 걸쳐 공작 수사를 벌였다. 남자 형사가 여장을 하고 잠복 수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다방면에 걸친 수사는 연쇄살인에서는 성과가 없었지만, 다른 곳에서 성과가 나타났다. 경찰은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폭력 244명, 성폭행 231명, 절도 201명, 살인 44명, 강도 39명 등을 검거했다. 연쇄살인과 별개 범죄들이다. 이때 잡은 사람이 1994년 9월 말 기준으로 1164명이다. 이 가운데 481명을 구속했다.

국감 자료에서 화성연쇄살인의 흔적은 1994년까지 발견됐다. 이후에는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국회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연쇄살인을 잊어갈 무렵인 1994년 1월 유력 용의자 이 씨는 처제를 살해하고 붙잡혔다.

오현태·김지숙·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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