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다자외교 강조하는 북한…외교 현주소는?

입력 2020.09.12 (08:42) 수정 2020.09.1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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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이렇다 할 외교무대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외무상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ARF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최국인 주베트남 대사를 대신 내보냈습니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 안보협의체였는데요.

비록 화상회의 방식이었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남북 외교장관 간 접촉이 무산됐습니다.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건 아닌지, <클로즈업 북한>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리포트]

지난 2018년 8월. 북한 리용호 외무상이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참석을 위해서다.

["외무상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강경화 장관님 만날 예정이신가요? 이번에 비핵화 관련해서 어떤 입장을 내실건가요?"]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북한 외무상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은 북미 외교 수장들의 만남.

["오늘 폼페이오(미 국무장관)는 안 만나시나요? 미국 측과 접촉 계획은 없으신가요?"]

마침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리용호 외무상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2018 ARF에서 가장 주목받은 장면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 이후 개최된 2019 ARF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북한은 외무상이 아닌 태국 주재 대사를 참석시켰고,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도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주재 대사 참석을 통보한 북한.

이는 코로나19와 수해를 겪으며 민심 추스르기 중인 북한의 내부 상황과 답보 상태에 빠져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지금 재해 재난 구호라든가 또 북한 스스로는 부인을 하고 있지만 코로나 감염 확산 차단들 그리고 경제제재로 여파로 인해서 여러 가지 경제 사업들이 부진을 겪고 있는 뭐 삼중고에 빠져있다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국내적인 현재 관리 소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외교에 집중할 수 없는 여건이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매년 북한도 ARF에 공을 들였던 이유가 그것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결의라든가 의장 성명 같은 게 나올 것이 있을 때 신들에게 불리한 어떤 합의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있는데 금년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기존에 있던 원칙에서 기존에 있던 어떤 분위기에서 크게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베트남 주재의 북한 대사가 참가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판단해볼 수가 있겠죠."]

북한은 6.25 전쟁 직후, 중국과 소련 중심의 군사, 경제적 외교에 주력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공산국가에 국한한 외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국가와도 교류를 시작했다.

비동맹 21개국과 수교하며 외교영역과 영향력을 확대해 가던 북한.

그러나 1990년대 냉전 종식과 함께 비동맹 국가들은 국익 우선 외교로의 전환을 꾀했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지금도 비동맹이라는 거는 있지만요 가장 큰 존재 의의라는 것이 그 냉전 시대에 동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걷겠다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90년대 탈냉전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동서 진영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비동맹 국가들도 활동에 동력을 잃게 됐고요."]

1994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도 탈냉전 시대에 걸 맞는 다자 정치·안보협의체 ARF를 출범시킨다.

가입국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과 중국, 일본, 한국 등 주변 대화 상대국들.

그런데 당시 가입국으로 거론조차 되지 않던 북한이 적극적인 가입 요청에 나섰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따라 붕괴되며 체제 불안과 함께 경제 위기까지 닥친 시기.

다자외교를 통한 국제무대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북한의 상황이 담긴 대목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북한은 8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급격하게 국력이 쇠퇴했고요 80년대 말에는 동유럽의 무역 상대국들이 붕괴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1990년에 구소련이 붕괴했고요 92년에 한중 수교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 동남아 국가들의 국력이 급격하게 신장됨으로서 북한 입장에서는 다시 동남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전략을 수립해야 될 필요성을 절감했고요, 이런 상황에서 ARF가 탄생함에 따라서 북한은 ARF가입을 외교 목표로 삼고 총력적인 외교를 전개해 왔습니다."]

북한의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화는 1980년대부터 표면으로 드러났다.

1983년 10월 미얀마에서 벌어진‘아웅산 폭파 사건’, 88 올림픽을 앞두고 터진 ‘KAL 858기 폭파 사건’등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닥친 극심한 경제난.

2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북한 외교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백남순/당시 북한 외무상/1999년 UN총회 : "미국의 요청에 따라 조미 사이의 현안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회담을 진행할 것이며 회담기간에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은 기존 외무부를 외무성으로 변경하고 백남순 외무상을 전면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KBS 뉴스9/2000년 : "새천년 들어서 북한의 외교활동이 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탈리아, 필리핀, 호주와도 수교를 맺으며 다자외교 폭을 넓혀갔고.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까지 개최하기에 이른다.

당시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농담을 섞어가며 은둔으로부터의 해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2000년 : "날 보고 은둔 생활을 한 대.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그리고 2000년 7월, 요청 6년 만에 북한의 ARF 가입이 성사됐다."]

[수린 핏수완/당시 태국 외무장관/2000년 : "남북 두 정상이 공동 선언이 실현돼 통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북한의 ARF 가입으로 남북한 외무 장관들이 사상 처음으로 마주 앉는 자리도 성사됐다.

[이정빈/당시 외교통상부 장관/2000년 : "반갑습니다."]

[백남순/당시 북한 외무상/2000년 : "역사적인 공동선언이 발표된 다음에 서로가 교류와 협조도 아마 그 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더 잘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ARF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한반도에 고착된 적대적 냉전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한반도엔 2차 북핵 위기가 닥쳤다.

북한 역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삼으며 핵실험을 강행했다.

[조선중앙TV/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외교 행보에 곳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했고,

[힐러리 클린턴/당시 미국 국무장관/2009년 : "북한은 태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북한 비핵화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의미합니다."]

ARF 회원국들도 시기마다 의장성명을 통해 북한을 규탄했다.

[KBS 뉴스9/2010년 :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17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 외교장관 회의에서 천안함 침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의장성명이 채택됐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해, 북한의 고립은 ARF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북한의 박의춘 외무상이 다자외교 무대에서 홀로 식사한 사실이 알려졌다.

전체회의에서 박 외무상은 아예 통역 헤드셋도 끼지 않았다.

태국 대표가 “모든 사람들이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위로했다는 후문마저 전해졌다.

2016년 ARF 의장 성명에서는 북한의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 등 한반도 상황 전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구체적인 도발 행위를 명시했고, '우려'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담아 북한에 분명한 경고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결국은 2006년에 이제 1차 핵실험을 이후로 해서 총 6번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을 통해서 동북아는 물론 국제 사회에 위험 및 불안 요인으로 작용함에 따라 관련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지지를 받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죠. 그래서 지난 20년 동안 뭐 열심히 ARF에 나왔지만 늘 북한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입장 또 미국에 대한 비난 등 외교적으로는 소모적인 입장을 견제함으로서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라는 것이 외부의 평가입니다."]

이처럼 부침이 있긴 했지만, ARF는 남북 간의 직접 외교 통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남북 외교장관의 공식 양자회동은 2000년 북한 가입 이후 2004년, 2005년, 2007년에꾸준히 있었고, 비공식 양자회동도 수시로 이뤄졌다.

최근 뜸해진 ARF에서의 남북 간의 소통이 아쉬운 이유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외교적으로도 야심차게 추진했던 외교 다변화가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다시 지금 부진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는 말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이제 다시 어떻게 보면 ARF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 더 나아가서는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도 역시 다시 한 번 강화를 하려고 할 텐데 그 중요한 열쇠를 지고 있는 것이 이제 한반도 비핵화 문제요."]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협력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한 2020년. 우리 외교부는 이번 ARF에서 북한의 대화 복귀를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는 다자협의체에서 다시 대화와 소통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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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다자외교 강조하는 북한…외교 현주소는?
    • 입력 2020-09-12 08:42:01
    • 수정2020-09-12 08: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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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이렇다 할 외교무대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외무상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ARF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최국인 주베트남 대사를 대신 내보냈습니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 안보협의체였는데요.

비록 화상회의 방식이었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남북 외교장관 간 접촉이 무산됐습니다.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건 아닌지, <클로즈업 북한>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리포트]

지난 2018년 8월. 북한 리용호 외무상이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참석을 위해서다.

["외무상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강경화 장관님 만날 예정이신가요? 이번에 비핵화 관련해서 어떤 입장을 내실건가요?"]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북한 외무상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은 북미 외교 수장들의 만남.

["오늘 폼페이오(미 국무장관)는 안 만나시나요? 미국 측과 접촉 계획은 없으신가요?"]

마침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리용호 외무상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2018 ARF에서 가장 주목받은 장면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 이후 개최된 2019 ARF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북한은 외무상이 아닌 태국 주재 대사를 참석시켰고,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도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주재 대사 참석을 통보한 북한.

이는 코로나19와 수해를 겪으며 민심 추스르기 중인 북한의 내부 상황과 답보 상태에 빠져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지금 재해 재난 구호라든가 또 북한 스스로는 부인을 하고 있지만 코로나 감염 확산 차단들 그리고 경제제재로 여파로 인해서 여러 가지 경제 사업들이 부진을 겪고 있는 뭐 삼중고에 빠져있다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국내적인 현재 관리 소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외교에 집중할 수 없는 여건이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매년 북한도 ARF에 공을 들였던 이유가 그것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결의라든가 의장 성명 같은 게 나올 것이 있을 때 신들에게 불리한 어떤 합의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있는데 금년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기존에 있던 원칙에서 기존에 있던 어떤 분위기에서 크게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베트남 주재의 북한 대사가 참가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판단해볼 수가 있겠죠."]

북한은 6.25 전쟁 직후, 중국과 소련 중심의 군사, 경제적 외교에 주력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공산국가에 국한한 외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국가와도 교류를 시작했다.

비동맹 21개국과 수교하며 외교영역과 영향력을 확대해 가던 북한.

그러나 1990년대 냉전 종식과 함께 비동맹 국가들은 국익 우선 외교로의 전환을 꾀했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지금도 비동맹이라는 거는 있지만요 가장 큰 존재 의의라는 것이 그 냉전 시대에 동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걷겠다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90년대 탈냉전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동서 진영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비동맹 국가들도 활동에 동력을 잃게 됐고요."]

1994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도 탈냉전 시대에 걸 맞는 다자 정치·안보협의체 ARF를 출범시킨다.

가입국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과 중국, 일본, 한국 등 주변 대화 상대국들.

그런데 당시 가입국으로 거론조차 되지 않던 북한이 적극적인 가입 요청에 나섰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따라 붕괴되며 체제 불안과 함께 경제 위기까지 닥친 시기.

다자외교를 통한 국제무대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북한의 상황이 담긴 대목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북한은 8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급격하게 국력이 쇠퇴했고요 80년대 말에는 동유럽의 무역 상대국들이 붕괴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1990년에 구소련이 붕괴했고요 92년에 한중 수교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 동남아 국가들의 국력이 급격하게 신장됨으로서 북한 입장에서는 다시 동남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전략을 수립해야 될 필요성을 절감했고요, 이런 상황에서 ARF가 탄생함에 따라서 북한은 ARF가입을 외교 목표로 삼고 총력적인 외교를 전개해 왔습니다."]

북한의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화는 1980년대부터 표면으로 드러났다.

1983년 10월 미얀마에서 벌어진‘아웅산 폭파 사건’, 88 올림픽을 앞두고 터진 ‘KAL 858기 폭파 사건’등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닥친 극심한 경제난.

2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북한 외교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백남순/당시 북한 외무상/1999년 UN총회 : "미국의 요청에 따라 조미 사이의 현안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회담을 진행할 것이며 회담기간에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은 기존 외무부를 외무성으로 변경하고 백남순 외무상을 전면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KBS 뉴스9/2000년 : "새천년 들어서 북한의 외교활동이 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탈리아, 필리핀, 호주와도 수교를 맺으며 다자외교 폭을 넓혀갔고.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까지 개최하기에 이른다.

당시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농담을 섞어가며 은둔으로부터의 해방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2000년 : "날 보고 은둔 생활을 한 대.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그리고 2000년 7월, 요청 6년 만에 북한의 ARF 가입이 성사됐다."]

[수린 핏수완/당시 태국 외무장관/2000년 : "남북 두 정상이 공동 선언이 실현돼 통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북한의 ARF 가입으로 남북한 외무 장관들이 사상 처음으로 마주 앉는 자리도 성사됐다.

[이정빈/당시 외교통상부 장관/2000년 : "반갑습니다."]

[백남순/당시 북한 외무상/2000년 : "역사적인 공동선언이 발표된 다음에 서로가 교류와 협조도 아마 그 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더 잘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ARF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한반도에 고착된 적대적 냉전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한반도엔 2차 북핵 위기가 닥쳤다.

북한 역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삼으며 핵실험을 강행했다.

[조선중앙TV/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외교 행보에 곳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했고,

[힐러리 클린턴/당시 미국 국무장관/2009년 : "북한은 태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북한 비핵화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의미합니다."]

ARF 회원국들도 시기마다 의장성명을 통해 북한을 규탄했다.

[KBS 뉴스9/2010년 :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17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 외교장관 회의에서 천안함 침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의장성명이 채택됐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해, 북한의 고립은 ARF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북한의 박의춘 외무상이 다자외교 무대에서 홀로 식사한 사실이 알려졌다.

전체회의에서 박 외무상은 아예 통역 헤드셋도 끼지 않았다.

태국 대표가 “모든 사람들이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위로했다는 후문마저 전해졌다.

2016년 ARF 의장 성명에서는 북한의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 등 한반도 상황 전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구체적인 도발 행위를 명시했고, '우려'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담아 북한에 분명한 경고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결국은 2006년에 이제 1차 핵실험을 이후로 해서 총 6번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을 통해서 동북아는 물론 국제 사회에 위험 및 불안 요인으로 작용함에 따라 관련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지지를 받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죠. 그래서 지난 20년 동안 뭐 열심히 ARF에 나왔지만 늘 북한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입장 또 미국에 대한 비난 등 외교적으로는 소모적인 입장을 견제함으로서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라는 것이 외부의 평가입니다."]

이처럼 부침이 있긴 했지만, ARF는 남북 간의 직접 외교 통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남북 외교장관의 공식 양자회동은 2000년 북한 가입 이후 2004년, 2005년, 2007년에꾸준히 있었고, 비공식 양자회동도 수시로 이뤄졌다.

최근 뜸해진 ARF에서의 남북 간의 소통이 아쉬운 이유다.

[차두현/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외교적으로도 야심차게 추진했던 외교 다변화가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다시 지금 부진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는 말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이제 다시 어떻게 보면 ARF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 더 나아가서는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도 역시 다시 한 번 강화를 하려고 할 텐데 그 중요한 열쇠를 지고 있는 것이 이제 한반도 비핵화 문제요."]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협력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한 2020년. 우리 외교부는 이번 ARF에서 북한의 대화 복귀를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는 다자협의체에서 다시 대화와 소통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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