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전격 퇴진 약속으로 10개월에 걸친 예멘 민주화 시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예멘 사태의 최종 해결은 권력 이양 과정이 약속대로 이행되고 조기 대선을 통해 국민이 원하는 새 대통령이 선출될 때에나 비로소 가시화할 전망이다.
예멘 시위는 정부군 이탈 반군과 반정부 부족 세력이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일부 내전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주축이 된 예멘 청년들은 유혈 진압에도 줄곧 평화 시위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멘 민주화 시위는 살레 대통령이 지난 1월 대통령 연임제를 폐지하고 종신집권을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됐다.
튀니지 민주화 시위에 영향을 받은 예멘 시민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같은 달 27일 집회를 열고 33년째 장기 집권한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살레 대통령은 2월 2일 종신집권을 포기하고 임기 만료 후 퇴진하겠다고 밝혔지만 민심은 이미 그를 등진 뒤였다.
다음날인 3일 수도 사나에서 2만여명이 참사한 가운데 살레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분노의 날'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 이후 예멘 전역에서는 비슷한 성격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 이어지자 살레 정권은 강경 진압에 나섰다.
살레 대통령이 3월 18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군경은 바로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 52명이 사망했다.
일반 시민이 다수 희생되자 살레 정권으로부터 이탈하는 세력이 속출했다.
알리 모흐센 알 아흐마르 예멘군 소장은 같은 달 21일 자신이 지휘하던 최정예부대인 제1기갑사단을 이끌고 민주화 시위대 지지를 선포하며 살레에 등을 돌렸다.
예멘 최대 유력 부족인 셰이크 사디크 알 아흐마르의 부족 역시 반정부 성향의 부족 세력을 규합, 하시드 부족연합을 결성하고 살레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곳곳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이탈 반군과 반정부 부족의 무력 충돌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걸프협력이사회(GCC)가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살레 대통령이 GCC 중재안 수용을 거부하면서 사태는 계속 악화됐고 급기야 6월 3일에는 반정부 부족이 대통령궁을 포격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살레 대통령은 치료를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로 건너갔고, 아브두 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이 살레의 권한을 대행했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알카에다에 연계된 무장단체가 아비얀주를 장악한 상태가 지속했고 사나 변화의 광장을 거점으로 한 민주화 시위대의 기세도 여전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6월 24일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지만 예멘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교전이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예멘 전역으로 확산하던 9월 23일 살레 대통령이 돌연 귀국했다.
`평화의 비둘기와 올리브 가지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살레의 발언이 무색하게도 살레 귀국 전후로 예멘 사태는 내전으로 비화하는 양상까지 발전했다.
이에 평화 시위를 주도한 청년 단체는 반정부 무장 세력에 무력 사용 자제를 촉구하며 10월 3일 유엔에 살레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달 7일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예멘 여성 인권운동가 타우왁쿨 카르만의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으로 예멘 시위대는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유엔은 같은 달 21일 살레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안보리 결의를 채택하고 자말 빈 오마르 특사를 예멘에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욱 세졌다.
예멘 당국의 계속된 강경 진압에도 시위대와 국제사회의 압박이 꺾이지 않자 살레 대통령은 결국 2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권력이양안에 서명했다.
10개월에 걸친 예멘 시민혁명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