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1995.04.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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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성 앵커 :
금년이 근대 사법제도가 생긴 지 꼭 백년이 되는 해입니다. 백 년 전 사법부가 내린 사상 첫 판결의 피고는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농민과 하급관리였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이들에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해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박상범 기자의 보도입니다.
박상범 기자 :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 말에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그러나 그 후에도 동학당에서 활동하려는 백성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피고는 동학당에 들어가 치안을 어지럽힌 혐의가 있어 잡아들였지만 증거가 없어 무죄 방면한다.’ 1895년 5월 4일에 내려진 근대사법사상 첫 판결입니다. 증거 없이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백 년 전에 고등재판소가 세운 것입니다.
권순일 판사 (법원사 편찬위원) :
이와 같은 판결에 의해서 민중의 인권을 지키는 사법의 전통이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박상범 기자 :
그러나 관결 당시는 동학세력이 와해된 뒤였기 때문에 민심수습 차원에서무죄판결을 내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가 생긴 것은 1895년 4월 25일. 이 재판소 설치령이 법률 제1호가 됐습니다. 사법사상 첫 판사는 개화파로 유명한 서광범 입니다. 서광범 관사는 교수형 제도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법관양성소도 생겼습니다. 정부 수립 뒤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씨가 이 법관 양성소를 통한 첫 법관이 됐습니다. 대법원이 근대사법 백주년을 가념해 만든 원사에 담긴 내용들입니다. 근대사법제도의 도입은 곧 사법개혁의 시작이었다고 대법원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박상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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