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던 고 정지용 시인을 남쪽에서 찾는다는 사연을 전해왔던 정 시인의 아들 구인 씨는 이번 2차 방문단에는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차 방문단에는 1차 방문 때 탈락한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이 돼서 정구인 씨가 3차 상봉 이후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정지용 시인의 최후의 행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금철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지난 88년 해금돼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이 북한 조선문학사에도 등장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 문단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시인 정지용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95년도에 발간된 조선문학사 제9권에서 처음으로 4페이지에 걸쳐 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태상(방송대 국문과 교수): 객관적이고 또 과학적인 어떤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지용을 빼놓고 문학사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인식이 된 것이 아닌가.
⊙기자: 더욱 새로운 사실은 조선문학사에서 그의 생존 연대를 1903년에서 1950년으로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측이 그를 복원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한국문학사에는 사망 연도를 알 수 없어 물음표로 되어 있습니다.
정 시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런 아들이 왜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을까?
⊙정구관(73살/정지용 시인 장남): 아버지 이름하고 어머니 이름을 넣은 것은 나를 찾기 빠르라고 넣은 거예요, 효과적으로...
⊙기자: 정지용 시인의 행적과 관련한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그는 북한군에 의해 50년 7월 중순 서대문 형무소에 일시 구금됐다가 7월 말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는 주장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50년 8월 중순까지 정 시인이 평양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폭사했다는 등의 많은 증언들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정구관(73발/정지용 시인 장남): 형무소에 갇혔다가 폭격할 당시에 혹사를 하는 것이 틀림없는 얘기다.
⊙기자: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은 지난 50년 가까이 남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남에서는 그를 월북 작가로 오해했고 북에서는 순수 서정시인인 그에게서 사회주의 이념성을 찾을 수 없다며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수많은 서정시를 남긴 채 사라져버린 정지용 시인.
씨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가 서울을 방문하면 과연 정 시인이 평양에서 폭사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또 북에 있는 아들마저 아버지를 남쪽에서 찾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KBS뉴스 금철영입니다.
그러나 2차 방문단에는 1차 방문 때 탈락한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이 돼서 정구인 씨가 3차 상봉 이후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정지용 시인의 최후의 행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금철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지난 88년 해금돼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이 북한 조선문학사에도 등장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 문단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시인 정지용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95년도에 발간된 조선문학사 제9권에서 처음으로 4페이지에 걸쳐 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태상(방송대 국문과 교수): 객관적이고 또 과학적인 어떤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지용을 빼놓고 문학사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인식이 된 것이 아닌가.
⊙기자: 더욱 새로운 사실은 조선문학사에서 그의 생존 연대를 1903년에서 1950년으로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측이 그를 복원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한국문학사에는 사망 연도를 알 수 없어 물음표로 되어 있습니다.
정 시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런 아들이 왜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을까?
⊙정구관(73살/정지용 시인 장남): 아버지 이름하고 어머니 이름을 넣은 것은 나를 찾기 빠르라고 넣은 거예요, 효과적으로...
⊙기자: 정지용 시인의 행적과 관련한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그는 북한군에 의해 50년 7월 중순 서대문 형무소에 일시 구금됐다가 7월 말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는 주장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50년 8월 중순까지 정 시인이 평양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폭사했다는 등의 많은 증언들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정구관(73발/정지용 시인 장남): 형무소에 갇혔다가 폭격할 당시에 혹사를 하는 것이 틀림없는 얘기다.
⊙기자: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은 지난 50년 가까이 남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남에서는 그를 월북 작가로 오해했고 북에서는 순수 서정시인인 그에게서 사회주의 이념성을 찾을 수 없다며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수많은 서정시를 남긴 채 사라져버린 정지용 시인.
씨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가 서울을 방문하면 과연 정 시인이 평양에서 폭사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또 북에 있는 아들마저 아버지를 남쪽에서 찾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KBS뉴스 금철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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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행적은?
-
- 입력 2000-11-18 21:00:00
- 수정2024-02-14 16:45:26
⊙앵커: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던 고 정지용 시인을 남쪽에서 찾는다는 사연을 전해왔던 정 시인의 아들 구인 씨는 이번 2차 방문단에는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차 방문단에는 1차 방문 때 탈락한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이 돼서 정구인 씨가 3차 상봉 이후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정지용 시인의 최후의 행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금철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지난 88년 해금돼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이 북한 조선문학사에도 등장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 문단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시인 정지용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95년도에 발간된 조선문학사 제9권에서 처음으로 4페이지에 걸쳐 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태상(방송대 국문과 교수): 객관적이고 또 과학적인 어떤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지용을 빼놓고 문학사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인식이 된 것이 아닌가.
⊙기자: 더욱 새로운 사실은 조선문학사에서 그의 생존 연대를 1903년에서 1950년으로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측이 그를 복원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한국문학사에는 사망 연도를 알 수 없어 물음표로 되어 있습니다.
정 시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런 아들이 왜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을까?
⊙정구관(73살/정지용 시인 장남): 아버지 이름하고 어머니 이름을 넣은 것은 나를 찾기 빠르라고 넣은 거예요, 효과적으로...
⊙기자: 정지용 시인의 행적과 관련한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그는 북한군에 의해 50년 7월 중순 서대문 형무소에 일시 구금됐다가 7월 말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는 주장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50년 8월 중순까지 정 시인이 평양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폭사했다는 등의 많은 증언들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정구관(73발/정지용 시인 장남): 형무소에 갇혔다가 폭격할 당시에 혹사를 하는 것이 틀림없는 얘기다.
⊙기자: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은 지난 50년 가까이 남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남에서는 그를 월북 작가로 오해했고 북에서는 순수 서정시인인 그에게서 사회주의 이념성을 찾을 수 없다며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수많은 서정시를 남긴 채 사라져버린 정지용 시인.
씨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가 서울을 방문하면 과연 정 시인이 평양에서 폭사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또 북에 있는 아들마저 아버지를 남쪽에서 찾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KBS뉴스 금철영입니다.
그러나 2차 방문단에는 1차 방문 때 탈락한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이 돼서 정구인 씨가 3차 상봉 이후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정지용 시인의 최후의 행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금철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지난 88년 해금돼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이 북한 조선문학사에도 등장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 문단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시인 정지용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95년도에 발간된 조선문학사 제9권에서 처음으로 4페이지에 걸쳐 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태상(방송대 국문과 교수): 객관적이고 또 과학적인 어떤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지용을 빼놓고 문학사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인식이 된 것이 아닌가.
⊙기자: 더욱 새로운 사실은 조선문학사에서 그의 생존 연대를 1903년에서 1950년으로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측이 그를 복원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한국문학사에는 사망 연도를 알 수 없어 물음표로 되어 있습니다.
정 시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런 아들이 왜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을까?
⊙정구관(73살/정지용 시인 장남): 아버지 이름하고 어머니 이름을 넣은 것은 나를 찾기 빠르라고 넣은 거예요, 효과적으로...
⊙기자: 정지용 시인의 행적과 관련한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그는 북한군에 의해 50년 7월 중순 서대문 형무소에 일시 구금됐다가 7월 말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는 주장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50년 8월 중순까지 정 시인이 평양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폭사했다는 등의 많은 증언들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정구관(73발/정지용 시인 장남): 형무소에 갇혔다가 폭격할 당시에 혹사를 하는 것이 틀림없는 얘기다.
⊙기자: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은 지난 50년 가까이 남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남에서는 그를 월북 작가로 오해했고 북에서는 순수 서정시인인 그에게서 사회주의 이념성을 찾을 수 없다며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수많은 서정시를 남긴 채 사라져버린 정지용 시인.
씨인의 셋째 아들 구인 씨가 서울을 방문하면 과연 정 시인이 평양에서 폭사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또 북에 있는 아들마저 아버지를 남쪽에서 찾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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