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인정 ‘산 넘어 산’

입력 2011.07.1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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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달 23일, 서울 행정법원.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이숙영 씨 등 2명에 대해 법원은 산업재해를 인정했습니다.

직업병이 아니라는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을 뒤집은 겁니다.

<녹취>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 "이 병의 산재가 인정될 때까지, 밝혀낼 수 있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유미한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법원은 이들이 유해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 등 발암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함께 소송에 참여한 다른 3명의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녹취> 이종란(시민단체 반올림 노무사) : "어떤 증거를 내밀어야 산재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아픈 노동자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산재보험이 인정될 수 있는 그런 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개인 질병이냐, 아니면 직업병이냐를 놓고 벌어졌던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논란은 법원 판결로 일단락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성 질환을 호소하며, 몸담았던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직업성 암의 실태와 현행 산재보험의 문제점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휠체어에 의지해 병실로 이동하는 한혜경 씨.

손이 떨려 안경을 쓰기도 힘들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기 힘듭니다.

지난 2005년, 뇌종양 제거 수술을 한 뒤 나타난 후유증입니다.

<녹취> 김시녀(한혜경 씨 어머니) : "우리 혜경이가 항상 하는 얘기가 '엄마, 나 예전처럼 1년만 살아봤음 좋겠다'고 이렇게 말해요."

혜경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삼성전자 LCD 공장에 입사했습니다.

12시간 씩 주-야간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회로기판에 납이 주 성분인 '솔더 크림'을 발랐습니다.

<녹취> 한혜경(前 삼성전자 LCD 공장 직원) : "초록색 기판 아시죠. 그 부품 다는 공정에 있었어요. 그러나 몸에 서서히 이상이 왔고, 결국 6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혜경 씨는 이후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산재를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녹취> 김시녀(한혜경 씨 어머니) : "치료비 떨어지면 집에 있고, 치료비 생기면 와서 치료 받고 이래 갖고는 도저히 재활 치료가 꾸준히 안돼요. 그러니까 산재 인정 받아서 정말 돈 걱정 안하고 우리가 그거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고 호위호식하자는 거 아니에요. 진짜..."

지난달 29일에는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퇴직한 32살 김미선 씨가 새로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병명은 다발성 경화증, 국내에 4천 명 정도의 환자가 있는데, 삼성전자 노동자 가운데 벌써 3명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녹취> 김미선(32살/前 삼성 LCD 공장 직원) : "제 몸 상태는 왼쪽이 다 마비였어요. 왼쪽만 딱 갈라서 감각도 없고, 걷지도 못하고 손도 못 올리고...평생동안 제가 이 병을 안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이로써 삼성전자에 다니다 희귀병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은 2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녹취> 공유정옥(산업의학 전문의) : "이 분들이 산재 인정을 받아도 삼성이라는 기업에게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분들이 어렵게 산재신청을 하는 과정을 도와주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회사가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줄 겁니다.

직업병 논란이 일고 있는 곳은 삼성전자 뿐이 아닙니다.

정찬수 씨는 금호타이어에서 17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술, 담배를 안하는 정 씨는 석달 전, 백혈병의 일종인 골수이형성증후군 판정을 받았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내가 죽는건가, 사는건가 이게. 이것 밖에 없더라고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애들 보고, 다섯살, 여섯살 짜리 애들 얼굴 보고..."

정 씨는 15년 동안 320도씨에 달하는 고온의 기계에 코팅제를 발랐습니다.

증발한 약품을 하루 종일 숨으로 들이마셨지만, 여름이면 40도 이상 올라가는 더위에 마스크를 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겨울에는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장 내부가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온도가 떨어지게 되면 불량 같은 게 많이 발생하게 돼요. 저희들이 문을 열고 싶어도 환기를 시키고 싶어도 그걸 못하게 해요. 지붕 개폐기라는 걸 비닐로 싹 막아버려요."

업무 때문에 생긴 백혈병이라고 확신했지만, 산재 신청은 막막했습니다.

회사는 약품 성분을 영업 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고, 과거에 사용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화학약품의 경우 아예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6, 7년 정도 전부터 대체약품으로 싹 바뀌어버렸거든요. 그 전 자료는 회사가 폐기해버렸답니다. 자료가 없다 이거죠."

정 씨는 병가를 내고, 골수이식수술을 준비하고 있지만 산재가 인정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거나 아픈몸을 이끌고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솔직히 얘기하면 다른 거 없이 산재가 안 되면 죽으니까...살려고, 그래서 산재 신청하길 마음 먹고 이렇게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자동차 관련 사업장 63곳을 돌며 발암물질 실태를 현장 조사했습니다.

<녹취> "먼지가 발생해서 호흡기로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들이 폐암을 일으키는 거예요."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9천여 가지의 화학제품 가운데 10% 가량에서 1급과 2급 발암물질이 검출됐습니다.

또 불임의 원인이 되는 생식 독성 등 3급 발암물질이 나온 제품도 37%나 됐습니다.

공장 내부엔 독성 화학물질이 즐비했지만, 노동자들은 그 실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녹취> 현장 노동자 : "(안전 교육 받으셨어요?)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십여년 돼서 기억이 안 나요."

때문에 노동계는 산재를 신청할 때 노동자가 직접 유해성을 입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문길주 국장 : "사업주가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데 그걸 내가 입증을 해야 한다는 게, 실제로 우리 노동자들은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입증에 대한 책임은 우리 노동자들이 져야 한다는 겁니다."

취재진은 백혈병에 걸려 산재 신청을 준비중인 한 노동자의 가족과 함께 해당 회사를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산재 신청서류에 사업주의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딱 잘라 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업체 관계자 : "1983년에 창업했거든요. 지금 20년이 지났죠. 28년. 이런 사례 한 번도 없었고요. (그럼 여태까지 여기서 근무하면서 산재는 한 명도 없었던 거예요?) 질병으로 인한 산재는 없었어요."

대부분의 회사들이 이처럼 산재 인정을 꺼리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로서 산재 신청을 부담스러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에서 매년 6천여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에 걸리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직업성 암으로 산재를 신청하는 사람은 연간 2백 명에 불과한 이윱니다.

그나마 신청자 10명 가운데 산재로 인정받는 사람은 한 두명 뿐입니다.

<인터뷰>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실장) : "국가가 발암물질을 쓰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발암물질을 쓰고 있으니 열심히 관리하고, 피할 수 있게 노력을 하십시오. 하지만 나중에라도 암이 생기면 꼭 산재신청해서 제대로 된 보상과 치료를 받으십시오' 얘기를 안해주고 있다는 거죠. 기업도 그렇고..."

이에 반해 프랑스의 경우 지난 2003년 기준으로 900명이, 독일의 경우 1900명이 직업성 암을 인정받았습니다.

산재 승인률이 낮은 건 직업성 암 뿐만이 아닙니다.

업무상 질병 전체의 산재 인정 비율을 놓고 봐도, 지난 2008년 63%에서 지난해엔 52%까지 떨어졌습니다.

산재 판정 업무를 맡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A 등급을 받았습니다.

지난 한 해에만 7천억 원 가까운 흑자를 내면서, 그동안 쌓아둔 적립금도 5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노동계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인터뷰>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실장) : "결국은 환자들에게 갈 수 있는 돈들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엄격한 심사를 하고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고 아예 진입할 수 없는 노동자를 만들고 이런 것이 한국의 산재보험 시스템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낙후된 시스템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죠."

산재를 승인받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도 문젭니다.

박은자 씨의 남편 이재빈 씨는 17년 동안 여수 산업단지의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2006년 초, 이 씨는 폐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녹취> 박은자(故 이재빈씨 부인) : "갑자기 폐암 3기라는 그런 판정을 받게 됐어요. 이제 정말 우리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그냥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 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이후 5년 동안 2차례의 행정소송을 벌인 끝에 석면에 노출된 것이 인정돼 올해 초 산재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씨는 산재 승인 한 달 전에 이미 숨졌습니다.

<녹취> 박은자(故 이재빈 씨 부인) : "죽는 날까지 우리 가족 걱정하다 갔어요. 내가 돈도 벌어놓은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승인된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문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재빈 씨와 여수의 같은 공사 현장에서 똑같은 업무를 하던 박 모씨도 지난 2009년 폐암에 걸렸습니다.

역시 석면에 노출된 사실은 인정됐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박 씨의 산재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박OO씨 : "폐암이란 게 낫는다는 보장을 못하니까 언제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저도..."

이재빈 씨가 올 초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또 몇 년에 걸친 소송을 해야 합니다.

<녹취> 권동희 노무사 : "법원에서 일정 정도 기준을 제시하면 그 부분에 있어서 공단이 실무적인 지침이라든지 내용들을 바꿔주어야 되는데 지금 그런 것에 대한 고려들이 전혀 안되고 있죠, 사실..."

근로복지공단은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녹취> 우기영(근로복지공단 요양부장) : "개인적인 원인과 업무로 인해서 악화되거나 증악된 부분이 혼재돼 있기 때문에 그걸 일률적으로 예를 들면 신청하면 업무상으로 인정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거죠."

한혜경 씨가 불편한 몸을 가누며 재활 훈련에 한창입니다.

이달 말, 법원에서는 혜경 씨의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첫 재판이 열립니다.

<녹취> 한혜경(前 삼성전자 LCD 공장 직원) : "저 같은 사람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불쌍하게시리 이게 뭐예요. 저 같은 사람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정애정 씨도 폭우 속에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남편이 산재를 인정 받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합니다.

<녹취> 정애정(故 황민웅씨 부인) : "내 남편 황민웅을 살려내라!"

고용노동부가 공식 집계한 지난해 산재 사망자는 2천2백여 명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인지도 모르고, 숨지거나 투병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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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재 인정 ‘산 넘어 산’
    • 입력 2011-07-11 07:43:46
    취재파일K
<앵커 멘트> 지난달 23일, 서울 행정법원.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이숙영 씨 등 2명에 대해 법원은 산업재해를 인정했습니다. 직업병이 아니라는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을 뒤집은 겁니다. <녹취>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 "이 병의 산재가 인정될 때까지, 밝혀낼 수 있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유미한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법원은 이들이 유해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 등 발암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함께 소송에 참여한 다른 3명의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녹취> 이종란(시민단체 반올림 노무사) : "어떤 증거를 내밀어야 산재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아픈 노동자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산재보험이 인정될 수 있는 그런 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개인 질병이냐, 아니면 직업병이냐를 놓고 벌어졌던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논란은 법원 판결로 일단락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성 질환을 호소하며, 몸담았던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직업성 암의 실태와 현행 산재보험의 문제점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휠체어에 의지해 병실로 이동하는 한혜경 씨. 손이 떨려 안경을 쓰기도 힘들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기 힘듭니다. 지난 2005년, 뇌종양 제거 수술을 한 뒤 나타난 후유증입니다. <녹취> 김시녀(한혜경 씨 어머니) : "우리 혜경이가 항상 하는 얘기가 '엄마, 나 예전처럼 1년만 살아봤음 좋겠다'고 이렇게 말해요." 혜경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삼성전자 LCD 공장에 입사했습니다. 12시간 씩 주-야간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회로기판에 납이 주 성분인 '솔더 크림'을 발랐습니다. <녹취> 한혜경(前 삼성전자 LCD 공장 직원) : "초록색 기판 아시죠. 그 부품 다는 공정에 있었어요. 그러나 몸에 서서히 이상이 왔고, 결국 6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혜경 씨는 이후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산재를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녹취> 김시녀(한혜경 씨 어머니) : "치료비 떨어지면 집에 있고, 치료비 생기면 와서 치료 받고 이래 갖고는 도저히 재활 치료가 꾸준히 안돼요. 그러니까 산재 인정 받아서 정말 돈 걱정 안하고 우리가 그거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고 호위호식하자는 거 아니에요. 진짜..." 지난달 29일에는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퇴직한 32살 김미선 씨가 새로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병명은 다발성 경화증, 국내에 4천 명 정도의 환자가 있는데, 삼성전자 노동자 가운데 벌써 3명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녹취> 김미선(32살/前 삼성 LCD 공장 직원) : "제 몸 상태는 왼쪽이 다 마비였어요. 왼쪽만 딱 갈라서 감각도 없고, 걷지도 못하고 손도 못 올리고...평생동안 제가 이 병을 안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이로써 삼성전자에 다니다 희귀병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은 2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녹취> 공유정옥(산업의학 전문의) : "이 분들이 산재 인정을 받아도 삼성이라는 기업에게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분들이 어렵게 산재신청을 하는 과정을 도와주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회사가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줄 겁니다. 직업병 논란이 일고 있는 곳은 삼성전자 뿐이 아닙니다. 정찬수 씨는 금호타이어에서 17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술, 담배를 안하는 정 씨는 석달 전, 백혈병의 일종인 골수이형성증후군 판정을 받았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내가 죽는건가, 사는건가 이게. 이것 밖에 없더라고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애들 보고, 다섯살, 여섯살 짜리 애들 얼굴 보고..." 정 씨는 15년 동안 320도씨에 달하는 고온의 기계에 코팅제를 발랐습니다. 증발한 약품을 하루 종일 숨으로 들이마셨지만, 여름이면 40도 이상 올라가는 더위에 마스크를 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겨울에는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장 내부가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온도가 떨어지게 되면 불량 같은 게 많이 발생하게 돼요. 저희들이 문을 열고 싶어도 환기를 시키고 싶어도 그걸 못하게 해요. 지붕 개폐기라는 걸 비닐로 싹 막아버려요." 업무 때문에 생긴 백혈병이라고 확신했지만, 산재 신청은 막막했습니다. 회사는 약품 성분을 영업 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고, 과거에 사용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화학약품의 경우 아예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6, 7년 정도 전부터 대체약품으로 싹 바뀌어버렸거든요. 그 전 자료는 회사가 폐기해버렸답니다. 자료가 없다 이거죠." 정 씨는 병가를 내고, 골수이식수술을 준비하고 있지만 산재가 인정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거나 아픈몸을 이끌고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녹취> 정찬수(금호타이어 노동자) : "솔직히 얘기하면 다른 거 없이 산재가 안 되면 죽으니까...살려고, 그래서 산재 신청하길 마음 먹고 이렇게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자동차 관련 사업장 63곳을 돌며 발암물질 실태를 현장 조사했습니다. <녹취> "먼지가 발생해서 호흡기로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들이 폐암을 일으키는 거예요."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9천여 가지의 화학제품 가운데 10% 가량에서 1급과 2급 발암물질이 검출됐습니다. 또 불임의 원인이 되는 생식 독성 등 3급 발암물질이 나온 제품도 37%나 됐습니다. 공장 내부엔 독성 화학물질이 즐비했지만, 노동자들은 그 실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녹취> 현장 노동자 : "(안전 교육 받으셨어요?)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십여년 돼서 기억이 안 나요." 때문에 노동계는 산재를 신청할 때 노동자가 직접 유해성을 입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문길주 국장 : "사업주가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데 그걸 내가 입증을 해야 한다는 게, 실제로 우리 노동자들은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입증에 대한 책임은 우리 노동자들이 져야 한다는 겁니다." 취재진은 백혈병에 걸려 산재 신청을 준비중인 한 노동자의 가족과 함께 해당 회사를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산재 신청서류에 사업주의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딱 잘라 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업체 관계자 : "1983년에 창업했거든요. 지금 20년이 지났죠. 28년. 이런 사례 한 번도 없었고요. (그럼 여태까지 여기서 근무하면서 산재는 한 명도 없었던 거예요?) 질병으로 인한 산재는 없었어요." 대부분의 회사들이 이처럼 산재 인정을 꺼리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로서 산재 신청을 부담스러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에서 매년 6천여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에 걸리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직업성 암으로 산재를 신청하는 사람은 연간 2백 명에 불과한 이윱니다. 그나마 신청자 10명 가운데 산재로 인정받는 사람은 한 두명 뿐입니다. <인터뷰>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실장) : "국가가 발암물질을 쓰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발암물질을 쓰고 있으니 열심히 관리하고, 피할 수 있게 노력을 하십시오. 하지만 나중에라도 암이 생기면 꼭 산재신청해서 제대로 된 보상과 치료를 받으십시오' 얘기를 안해주고 있다는 거죠. 기업도 그렇고..." 이에 반해 프랑스의 경우 지난 2003년 기준으로 900명이, 독일의 경우 1900명이 직업성 암을 인정받았습니다. 산재 승인률이 낮은 건 직업성 암 뿐만이 아닙니다. 업무상 질병 전체의 산재 인정 비율을 놓고 봐도, 지난 2008년 63%에서 지난해엔 52%까지 떨어졌습니다. 산재 판정 업무를 맡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A 등급을 받았습니다. 지난 한 해에만 7천억 원 가까운 흑자를 내면서, 그동안 쌓아둔 적립금도 5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노동계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인터뷰>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실장) : "결국은 환자들에게 갈 수 있는 돈들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엄격한 심사를 하고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고 아예 진입할 수 없는 노동자를 만들고 이런 것이 한국의 산재보험 시스템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낙후된 시스템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죠." 산재를 승인받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도 문젭니다. 박은자 씨의 남편 이재빈 씨는 17년 동안 여수 산업단지의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2006년 초, 이 씨는 폐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녹취> 박은자(故 이재빈씨 부인) : "갑자기 폐암 3기라는 그런 판정을 받게 됐어요. 이제 정말 우리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그냥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 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이후 5년 동안 2차례의 행정소송을 벌인 끝에 석면에 노출된 것이 인정돼 올해 초 산재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씨는 산재 승인 한 달 전에 이미 숨졌습니다. <녹취> 박은자(故 이재빈 씨 부인) : "죽는 날까지 우리 가족 걱정하다 갔어요. 내가 돈도 벌어놓은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승인된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문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재빈 씨와 여수의 같은 공사 현장에서 똑같은 업무를 하던 박 모씨도 지난 2009년 폐암에 걸렸습니다. 역시 석면에 노출된 사실은 인정됐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박 씨의 산재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박OO씨 : "폐암이란 게 낫는다는 보장을 못하니까 언제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저도..." 이재빈 씨가 올 초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또 몇 년에 걸친 소송을 해야 합니다. <녹취> 권동희 노무사 : "법원에서 일정 정도 기준을 제시하면 그 부분에 있어서 공단이 실무적인 지침이라든지 내용들을 바꿔주어야 되는데 지금 그런 것에 대한 고려들이 전혀 안되고 있죠, 사실..." 근로복지공단은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녹취> 우기영(근로복지공단 요양부장) : "개인적인 원인과 업무로 인해서 악화되거나 증악된 부분이 혼재돼 있기 때문에 그걸 일률적으로 예를 들면 신청하면 업무상으로 인정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거죠." 한혜경 씨가 불편한 몸을 가누며 재활 훈련에 한창입니다. 이달 말, 법원에서는 혜경 씨의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첫 재판이 열립니다. <녹취> 한혜경(前 삼성전자 LCD 공장 직원) : "저 같은 사람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불쌍하게시리 이게 뭐예요. 저 같은 사람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정애정 씨도 폭우 속에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남편이 산재를 인정 받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합니다. <녹취> 정애정(故 황민웅씨 부인) : "내 남편 황민웅을 살려내라!" 고용노동부가 공식 집계한 지난해 산재 사망자는 2천2백여 명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인지도 모르고, 숨지거나 투병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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