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족의 강요된 동족상잔

입력 2011.08.2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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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무기를 줄테니 동족을 항해 총을 쏴라, 이렇게 비정한 요구가 또 있을까요. 네 바로 터키의 쿠르드족이 겪는 일인데요. 코르쥬 시스템이라는 자경단 제도가 지금 쿠르드족 사이에 동족상잔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과격 쿠르드 전사들에 맞서 무기를 들라는 게 터키 정부의 요구인데요, 쿠르드족 마을 가운데 이런 요구를 따르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마을도 있어서, 둘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분할 통치 정책이 빚은 비극적 상황...심인보 순회특파원이 터키의 쿠르드족을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터키 동남부, 아나톨리아 반도 깊숙한 곳. 황토빛 야트막한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대지, 한때는 쿠르드족의 땅, 쿠르디스탄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쿠르드족은 유목에 종사하며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지금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쿠르드족 무장세력의 분리 독립 투쟁은 터키에서 오랫동안 긴장과 불안의 원천이 돼왔습니다.

시골의 한적한 쿠르드족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30여 가구가 오순 도순 살아가는 달부닥 마을입니다. 젊은이들은 마을의 공동재산인 염소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염소 고기와 염소 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를 많이 먹는 쿠르드인들에게 염소는 없어서는 안될 가축입니다.

낯선 외국인을 처음 본 돌잡이 아기는 울음을 터트리고, 마을 처녀들은 쑥스러운 듯 웃기만 합니다. 낮동안은 물 한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라마단 기간, 해가 지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여자들은 음식준비에 분주합니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라마단의 해가 떨어집니다. 가족들은 옹기 종기 모여 하루의 유일한 식사를 즐깁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주민): “이것은 아이란(전통 요구르트)으로 만든 수프입니다. 우리는 목축업을 하기 때문에 이걸 도시 사람들보다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국경지역도 아닌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군부대의 초소가 있는 겁니다. 진짜 총과 실탄을 갖춘 무장 병력이 이 초소를 24시간 지키고 있습니다.

<인터뷰> 에크렘(주민): "테러에 대항해 마을을 지키는 겁니다. 어떤 테러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 마을을 지키고 있는 거죠."

이 곳을 지키는 건 '코루쥬'라고 불리는 마을 자경단입니다. 터키 정부는 스스로 마을을 지키라며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월급도 주고 있는데, 이걸 코루쥬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의 코류주들이 집중 경계하는 건 마을 뒤편의 작은 언덕입니다.

<인터뷰> “건너편부터 저쪽까지 위험한 전방 지역입니다. 저쪽도 다 위험한 지역이고요. 저 끝까지요.”

한적한 시골지역에서 언덕 너머에 뭐가 있기에 위험지역이라고 하는 걸까.

에크렘씨가 위험지역이라고 지목한 언덕 너머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불과 10분 거리, 언덕 너머에는 의외로 살리힐리라는 이름의 또다른 쿠르드족 마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같은 쿠르드족 마을을 위험지역이라고 지목한 이유는 뭘까. 마을 회관에 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웃 마을 얘기를 꺼내니 게임을 하던 남자들의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습니다. 억지로 인터뷰를 청했지만,

<인터뷰> 파티 솜메즈(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저는 전혀 몰라요. 이것에 대해서는 절대 묻지 마세요. 전혀 모르니까. 안그래요? 우리는 빵값을 벌려고 애쓰는 사람일뿐이에요."

그런데 마을 젊은이들이 할 얘기가 있다며 취재진을 찾아왔습니다. 이들 역시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이웃마을과 사이가 나빠진 이유는 바로 코루쥬 시스템 때문이라고 털어놨습니다.

<녹취> “코루쥬 시스템은 쿠르드인들끼리 분쟁을 만들어서 마을과 마을을 서로 싸우게 하고, 터키 정부는 스스로 구경꾼 역할을 하려는 거지요.”

코르쥬 시스템은 쿠르드족의 무장 독립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도입됐습니다. 쿠르드인들의 테러를 막으라며 다른 쿠르드인들의 손에 억지로 무기를 쥐어준 겁니다.

터키 정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코루쥬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쿠르드족 사회를 갈가리 찢어놨습니다. 독립은 이제 불가능하니 터키 정부를 따라야 한다며 받아들인 마을도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는 없다며 거부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데미르(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옆마을은 우리에게 코루쥬가 되지 말라고 했죠. 쿠르드 무장 단체가 산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하니까요. 우리는 안된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터키 국민으로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죠."

코루쥬 시스템은, 터키 정부가 준 무기를 잡고 동족에게 총을 겨누느냐, 아니면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독립 투쟁을 하느냐, 이 양 극단의 선택을 쿠르드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 갈림길 사이에서 많은 쿠르드족들이 불필요한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살리힐리 마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코르쥬 시스템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선택했습니다. 무하메드 차칸씨의 아들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인터뷰> 무하메드 차칸(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세 사람이 같이 떠났는데 두 사람은 도망쳐 오고 아들은 안 왔어요. 샤크즈 산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 저를 불렀는데, 가서 봤더니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아들이 숨지고 난 뒤 살리힐리 마을과 차칸씨는 터키 정부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됐습니다.

<인터뷰> 무하메드 차칸(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대위와 소령이 왔었어요. 대위가 저에게 무장단체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냐고 추궁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맞아요, 음식을 줬어요. 하지만 음식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요. 무기 때문에 죽는 거죠.”

사진마저 모두 빼앗겨 이제 아들의 얼굴조차 흐릿해졌다는 차칸씨, 참아왔던 눈물이 끝내 터져나옵니다.

<녹취> “평화가 온다면 내 아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행복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코루쥬 시스템을 받아들였던 달부닥 마을에서도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아쓰리 우착씨는 코루쥬였던 아버지를 동족의 손에 잃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가장 마지막 사진이에요. 코르주가 된 이후, 그러니까 92년도에 찍은 사진이군요."

다른 마을보다 앞장서서 코루쥬가 됐다는 이유로 무장 독립 조직의 공격을 받은 겁니다.

<인터뷰>"사진을 벽에 걸어두지도 못해요. 서랍에 넣어둡니다. 걸어두면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요."

이러다보니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늘 가까이 지내왔던 두 마을의 관계는 남남보다 더 서먹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알둘 라만(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양쪽 모두 유감입니다. 인명 피해까지 있다는 것이요. 형제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어야 했는데... (양쪽 마을의 젊은 남녀가 사귀기도 하나요?) 그런 일은 없어요. 있을 수가 없죠.“

비록 상처를 입었더라도, 두 마을처럼 마을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 때 30여 가구가 살았던 쿠르드족 마을 터입니다.

터키 정부가 강제한 코루쥬 시스템 때문에 쿠르드족들은 서로 갈등을 빚었고, 그 결과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보시는 것처럼요.

지붕이 사라져버린 주택이 고대의 폐허처럼 버려져 있고, 한때 길이었던 곳에는 무질서하게 자란 나무들이 어지럽게 뒤덮여 있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던 샘물은 아직 마르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움을 더합니다. 한때 학교였던 건물, 뜯겨나간 교실 바닥 밑으로 흙바닥이 보이고, 오랜만의 인기척에 숨어있던 박쥐가 날아오릅니다.

<인터뷰> 외네르(쿠르드족): “코류쥬 시스템을 안 받아들인 마을은 정부가 쫓아냈고, 받아들인 마을은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마을이 3천개가 넘습니다.

<인터뷰> 마르카르 에사얀(일간지 '타라프' 편집장): "100만 명 이상의 쿠르드인들이, 불태워진 마을에서 큰 도시로 이주해 가난한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쓰리 우착씨가 오랜만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녹취>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아멘.”

죽은 자들의 안녕과 산 자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착씨 자신도 언제쯤 기도가 이뤄질 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쿠르드 무장독립 단체는 여전히 테러를 멈추지 않고, 터키 정부는 아예 이들의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에 나선 상황, 평화를 향한 길은 여전히 멀어보이기만 합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쿠르드족): “이 일이 끝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진전은 전혀 없어요. 이 일은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겁니다.”

'나눠서 다스린다'는 터키 정부의 분리 통치정책은 쿠르드인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평화가 오지 않는 이상 쿠르드인들의 상처는 아물 틈없이 계속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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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드족의 강요된 동족상잔
    • 입력 2011-08-28 11:17:09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무기를 줄테니 동족을 항해 총을 쏴라, 이렇게 비정한 요구가 또 있을까요. 네 바로 터키의 쿠르드족이 겪는 일인데요. 코르쥬 시스템이라는 자경단 제도가 지금 쿠르드족 사이에 동족상잔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과격 쿠르드 전사들에 맞서 무기를 들라는 게 터키 정부의 요구인데요, 쿠르드족 마을 가운데 이런 요구를 따르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마을도 있어서, 둘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분할 통치 정책이 빚은 비극적 상황...심인보 순회특파원이 터키의 쿠르드족을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터키 동남부, 아나톨리아 반도 깊숙한 곳. 황토빛 야트막한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대지, 한때는 쿠르드족의 땅, 쿠르디스탄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쿠르드족은 유목에 종사하며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지금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쿠르드족 무장세력의 분리 독립 투쟁은 터키에서 오랫동안 긴장과 불안의 원천이 돼왔습니다. 시골의 한적한 쿠르드족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30여 가구가 오순 도순 살아가는 달부닥 마을입니다. 젊은이들은 마을의 공동재산인 염소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염소 고기와 염소 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를 많이 먹는 쿠르드인들에게 염소는 없어서는 안될 가축입니다. 낯선 외국인을 처음 본 돌잡이 아기는 울음을 터트리고, 마을 처녀들은 쑥스러운 듯 웃기만 합니다. 낮동안은 물 한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라마단 기간, 해가 지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여자들은 음식준비에 분주합니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라마단의 해가 떨어집니다. 가족들은 옹기 종기 모여 하루의 유일한 식사를 즐깁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주민): “이것은 아이란(전통 요구르트)으로 만든 수프입니다. 우리는 목축업을 하기 때문에 이걸 도시 사람들보다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국경지역도 아닌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군부대의 초소가 있는 겁니다. 진짜 총과 실탄을 갖춘 무장 병력이 이 초소를 24시간 지키고 있습니다. <인터뷰> 에크렘(주민): "테러에 대항해 마을을 지키는 겁니다. 어떤 테러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 마을을 지키고 있는 거죠." 이 곳을 지키는 건 '코루쥬'라고 불리는 마을 자경단입니다. 터키 정부는 스스로 마을을 지키라며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월급도 주고 있는데, 이걸 코루쥬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의 코류주들이 집중 경계하는 건 마을 뒤편의 작은 언덕입니다. <인터뷰> “건너편부터 저쪽까지 위험한 전방 지역입니다. 저쪽도 다 위험한 지역이고요. 저 끝까지요.” 한적한 시골지역에서 언덕 너머에 뭐가 있기에 위험지역이라고 하는 걸까. 에크렘씨가 위험지역이라고 지목한 언덕 너머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불과 10분 거리, 언덕 너머에는 의외로 살리힐리라는 이름의 또다른 쿠르드족 마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같은 쿠르드족 마을을 위험지역이라고 지목한 이유는 뭘까. 마을 회관에 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웃 마을 얘기를 꺼내니 게임을 하던 남자들의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습니다. 억지로 인터뷰를 청했지만, <인터뷰> 파티 솜메즈(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저는 전혀 몰라요. 이것에 대해서는 절대 묻지 마세요. 전혀 모르니까. 안그래요? 우리는 빵값을 벌려고 애쓰는 사람일뿐이에요." 그런데 마을 젊은이들이 할 얘기가 있다며 취재진을 찾아왔습니다. 이들 역시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이웃마을과 사이가 나빠진 이유는 바로 코루쥬 시스템 때문이라고 털어놨습니다. <녹취> “코루쥬 시스템은 쿠르드인들끼리 분쟁을 만들어서 마을과 마을을 서로 싸우게 하고, 터키 정부는 스스로 구경꾼 역할을 하려는 거지요.” 코르쥬 시스템은 쿠르드족의 무장 독립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도입됐습니다. 쿠르드인들의 테러를 막으라며 다른 쿠르드인들의 손에 억지로 무기를 쥐어준 겁니다. 터키 정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코루쥬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쿠르드족 사회를 갈가리 찢어놨습니다. 독립은 이제 불가능하니 터키 정부를 따라야 한다며 받아들인 마을도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는 없다며 거부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데미르(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옆마을은 우리에게 코루쥬가 되지 말라고 했죠. 쿠르드 무장 단체가 산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하니까요. 우리는 안된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터키 국민으로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죠." 코루쥬 시스템은, 터키 정부가 준 무기를 잡고 동족에게 총을 겨누느냐, 아니면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독립 투쟁을 하느냐, 이 양 극단의 선택을 쿠르드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 갈림길 사이에서 많은 쿠르드족들이 불필요한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살리힐리 마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코르쥬 시스템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선택했습니다. 무하메드 차칸씨의 아들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인터뷰> 무하메드 차칸(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세 사람이 같이 떠났는데 두 사람은 도망쳐 오고 아들은 안 왔어요. 샤크즈 산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 저를 불렀는데, 가서 봤더니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아들이 숨지고 난 뒤 살리힐리 마을과 차칸씨는 터키 정부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됐습니다. <인터뷰> 무하메드 차칸(살리힐리 마을 쿠르드족): “대위와 소령이 왔었어요. 대위가 저에게 무장단체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냐고 추궁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맞아요, 음식을 줬어요. 하지만 음식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요. 무기 때문에 죽는 거죠.” 사진마저 모두 빼앗겨 이제 아들의 얼굴조차 흐릿해졌다는 차칸씨, 참아왔던 눈물이 끝내 터져나옵니다. <녹취> “평화가 온다면 내 아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행복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코루쥬 시스템을 받아들였던 달부닥 마을에서도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아쓰리 우착씨는 코루쥬였던 아버지를 동족의 손에 잃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가장 마지막 사진이에요. 코르주가 된 이후, 그러니까 92년도에 찍은 사진이군요." 다른 마을보다 앞장서서 코루쥬가 됐다는 이유로 무장 독립 조직의 공격을 받은 겁니다. <인터뷰>"사진을 벽에 걸어두지도 못해요. 서랍에 넣어둡니다. 걸어두면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요." 이러다보니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늘 가까이 지내왔던 두 마을의 관계는 남남보다 더 서먹하게 됐습니다. <인터뷰> 알둘 라만(달부닥 마을 쿠르드족): "양쪽 모두 유감입니다. 인명 피해까지 있다는 것이요. 형제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어야 했는데... (양쪽 마을의 젊은 남녀가 사귀기도 하나요?) 그런 일은 없어요. 있을 수가 없죠.“ 비록 상처를 입었더라도, 두 마을처럼 마을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 때 30여 가구가 살았던 쿠르드족 마을 터입니다. 터키 정부가 강제한 코루쥬 시스템 때문에 쿠르드족들은 서로 갈등을 빚었고, 그 결과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보시는 것처럼요. 지붕이 사라져버린 주택이 고대의 폐허처럼 버려져 있고, 한때 길이었던 곳에는 무질서하게 자란 나무들이 어지럽게 뒤덮여 있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던 샘물은 아직 마르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움을 더합니다. 한때 학교였던 건물, 뜯겨나간 교실 바닥 밑으로 흙바닥이 보이고, 오랜만의 인기척에 숨어있던 박쥐가 날아오릅니다. <인터뷰> 외네르(쿠르드족): “코류쥬 시스템을 안 받아들인 마을은 정부가 쫓아냈고, 받아들인 마을은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마을이 3천개가 넘습니다. <인터뷰> 마르카르 에사얀(일간지 '타라프' 편집장): "100만 명 이상의 쿠르드인들이, 불태워진 마을에서 큰 도시로 이주해 가난한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쓰리 우착씨가 오랜만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녹취>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아멘.” 죽은 자들의 안녕과 산 자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착씨 자신도 언제쯤 기도가 이뤄질 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쿠르드 무장독립 단체는 여전히 테러를 멈추지 않고, 터키 정부는 아예 이들의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에 나선 상황, 평화를 향한 길은 여전히 멀어보이기만 합니다. <인터뷰> 아쓰리 우착(쿠르드족): “이 일이 끝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진전은 전혀 없어요. 이 일은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겁니다.” '나눠서 다스린다'는 터키 정부의 분리 통치정책은 쿠르드인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평화가 오지 않는 이상 쿠르드인들의 상처는 아물 틈없이 계속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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