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eye] “中, 옛 영광 다시 한 번…”

입력 2012.04.08 (09:24) 수정 2012.04.0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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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중국 역사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라 하면 당.송 시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송나라 시대는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고 풍요로웠던 시기로 일컬어지는데, 요즘 중국이 떠오르는 시기를 맞아서 그런 걸까요?

이 옛 시대의 영화를 추억하려는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손관수 특파원이 중국의 청명 문화제로 안내해 드립니다.

<리포트>

우리에겐 판관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허난성의 카이펑.

천년전 송나라의 수도 시절로 조성된 공원에서 청명절을 맞아 풍요로웠던 당시의 생활 모습이 재현됐습니다. 나들이를 나온 부잣집 마나님과, 귀공자, 아가씨들, 사대부의 넉넉한 발걸음과 서민들의 소박하지만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군것질에, 장난감을 고르고 이것 저것 패물을 가늠해보고 물길로는 관청 식량이 배로 옮겨지는 당시의 넉넉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한가로운 장면들입니다.

이 장면들은 바로 풍요로운 중국의 상징이 된 송나라 시절의 카이펑 주민들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그린 청명상하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재현한 것입니다.

<인터뷰>까오이팡(청명문화제 공연 단원) : “저는 귀부인 역할을 맡았는데요. 당시 비교적 부유하던 시기에 귀공자하고 놀러다니는 그런 역할이죠.”

재현이 끝나면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울어지는 한바탕 놀이마당이 전개됩니다. 당시 손수레를 직접 들어보기도 하고 드라마에서나 본 옛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체험해 보면서 마냥 즐거워합니다.

<인터뷰>관람객 : “너무 좋아요.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예요.”

나귀를 타고 옛 거리를 돌아보는 즐거움에서 송나라시대의 풍요로움과 현대 중국의 여유로움이 함께 묻어납니다.

여러분 등따습고 배부르면 되지 라는 말 들어보셨죠? 최소한 배를 곯은 사람은 없는, 이곳 사람들이 온포사회라고 부르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데요. 놀랍게도 천 년 전 송나라가 바로 그런 온포사회였습니다.

이런 풍요는 시와 문학은 물론 놀이문화의 발전도 가져왔습니다. 갖가지 묘기에 관객들의 탄성이 터지는 서커스..아슬아슬한 묘기에 가슴 졸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진가 봅니다. 사실 이 송나라시대에 처음으로 서양의 도시민에 해당하는 '성곽주민'이 생겨나고 전문 오락시설까지 생겨났습니다.

<인터뷰>쩡광칭(카이펑 박물관장) : “송나라는 정치,경제,문화,과학 기술 그리고 교육 방면에서 모두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중국 봉건사회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야간에 펼쳐지는 이 공연은 송나라 역사의 부침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닭싸움으로 표현되는 서민들의 익살부터 .주머니가 두툼했던 장사꾼들, 평탄했던 삶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당나라와 함께 시와 문학이 가장 번성했던 것은 바로 이 물질적 풍요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특색의 형형색색의 조명을 이용한 무대 예술에 웅장한 규모의 집단 군무, 그리고 행진은 송나라의 영화를 새로운 중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회생시킵니다.

<인터뷰>우훼이핑(교사) :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조국을 더 부강하게 건설하는데 일조하고 싶어요. 정말이예요. 정말 그런 생각이예요.”

카이펑시가 최근에 고안한 청명절 채화 의식...청명 앞에 오는 한식에 끈 불을 새롭게 다시 살린다는 의미의 이행사는 불이 가진 의미를 살려 새로운 희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녹취> “이 새로운 불이 대대손손 전해져,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강렬한 생명력이 되기를!“

길거리 행진을 통해서도 옛 영화를 마음껏 뽑냅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의 행진...카이펑의 상징 포청천의 행렬...청명절 카이펑은 그야말로 축제의 한마당입니다.

<인터뷰>이앤위레이(카이펑 주민) : “정말 좋습니다.우리가 개발한 문화의 저력이 서민들이 카이펑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하는데 정말 큰 역할을 합니다.”

<인터뷰>웡시(카이펑 주민) : “우리가 허난성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그 강대하고 부유했던 송나라도 금나라에 쫓기더니 결국 몽골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카이펑은 이 천년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카이펑의 특수성으로 송나라 유물이 많지 않고, 발굴도 힘들다는 점입니다.

'성위의 성'으로 불리는 이 유적지에 그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인근 황하의 범람으로 도시 전체가 주기적으로 묻혔기 때문입니다. 발굴된 것으로만 봐도 명나라 시대의 성터 위에 청나라 시대에 다시 성을 쌓은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궈스쥔(카이펑 성곽관리소 소장) : “가장 일찍 지어진 (전국시대의) 따량성은 현재의 지표면에서 15미터 깊이에 있습니다. 송나라 시대 것은 8미터 깊이구요. 명나라 시대 것은 5~6미터 깊이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시대 성곽은 지표면 3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적인 범람으로 도시가 묻히면서 땅속 깊이 들어갈수록 오래된 역사의 생활터전과 유물이 발견되는 이런 퇴적층이 켜켜히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하는 왜 그렇게 자주, 왜 그렇게 쉽게 범람했던 것일까?

이곳 황하에서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직선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카이펑의 고도가 이곳 황하의 수면보다 10여미터 정도 낮다는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카이펑은 그토록 험난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터뷰>왕용촨(황하 수리국 부국장) :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카이펑은 둑이 338차례 터졌고, 16차례 홍수로 고립됐으며 10차례는 완전히 물에 잠겼습니다. 따라서 황하와 카이펑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인 것이죠. 황하가 아무 일 없으면 카이펑도 아무 일 없습니다.”

지금도 황하변 곳곳에.. 2중, 3중으로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카이펑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의 휘황한 수도였던 카이펑의 천년의 부침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역사의 경고였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문명을 잉태한 황하.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어머니 강으로 부르는 황하는 천년 만에 다시 찾아온 중화의 부활을. 자식의 일취월장을 바라보면서도 가슴 조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늘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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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eye] “中, 옛 영광 다시 한 번…”
    • 입력 2012-04-08 09:24:42
    • 수정2012-04-08 10:38:12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중국 역사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라 하면 당.송 시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송나라 시대는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고 풍요로웠던 시기로 일컬어지는데, 요즘 중국이 떠오르는 시기를 맞아서 그런 걸까요? 이 옛 시대의 영화를 추억하려는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손관수 특파원이 중국의 청명 문화제로 안내해 드립니다. <리포트> 우리에겐 판관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허난성의 카이펑. 천년전 송나라의 수도 시절로 조성된 공원에서 청명절을 맞아 풍요로웠던 당시의 생활 모습이 재현됐습니다. 나들이를 나온 부잣집 마나님과, 귀공자, 아가씨들, 사대부의 넉넉한 발걸음과 서민들의 소박하지만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군것질에, 장난감을 고르고 이것 저것 패물을 가늠해보고 물길로는 관청 식량이 배로 옮겨지는 당시의 넉넉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한가로운 장면들입니다. 이 장면들은 바로 풍요로운 중국의 상징이 된 송나라 시절의 카이펑 주민들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그린 청명상하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재현한 것입니다. <인터뷰>까오이팡(청명문화제 공연 단원) : “저는 귀부인 역할을 맡았는데요. 당시 비교적 부유하던 시기에 귀공자하고 놀러다니는 그런 역할이죠.” 재현이 끝나면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울어지는 한바탕 놀이마당이 전개됩니다. 당시 손수레를 직접 들어보기도 하고 드라마에서나 본 옛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체험해 보면서 마냥 즐거워합니다. <인터뷰>관람객 : “너무 좋아요.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예요.” 나귀를 타고 옛 거리를 돌아보는 즐거움에서 송나라시대의 풍요로움과 현대 중국의 여유로움이 함께 묻어납니다. 여러분 등따습고 배부르면 되지 라는 말 들어보셨죠? 최소한 배를 곯은 사람은 없는, 이곳 사람들이 온포사회라고 부르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데요. 놀랍게도 천 년 전 송나라가 바로 그런 온포사회였습니다. 이런 풍요는 시와 문학은 물론 놀이문화의 발전도 가져왔습니다. 갖가지 묘기에 관객들의 탄성이 터지는 서커스..아슬아슬한 묘기에 가슴 졸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진가 봅니다. 사실 이 송나라시대에 처음으로 서양의 도시민에 해당하는 '성곽주민'이 생겨나고 전문 오락시설까지 생겨났습니다. <인터뷰>쩡광칭(카이펑 박물관장) : “송나라는 정치,경제,문화,과학 기술 그리고 교육 방면에서 모두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중국 봉건사회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야간에 펼쳐지는 이 공연은 송나라 역사의 부침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닭싸움으로 표현되는 서민들의 익살부터 .주머니가 두툼했던 장사꾼들, 평탄했던 삶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당나라와 함께 시와 문학이 가장 번성했던 것은 바로 이 물질적 풍요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특색의 형형색색의 조명을 이용한 무대 예술에 웅장한 규모의 집단 군무, 그리고 행진은 송나라의 영화를 새로운 중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회생시킵니다. <인터뷰>우훼이핑(교사) :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조국을 더 부강하게 건설하는데 일조하고 싶어요. 정말이예요. 정말 그런 생각이예요.” 카이펑시가 최근에 고안한 청명절 채화 의식...청명 앞에 오는 한식에 끈 불을 새롭게 다시 살린다는 의미의 이행사는 불이 가진 의미를 살려 새로운 희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녹취> “이 새로운 불이 대대손손 전해져,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강렬한 생명력이 되기를!“ 길거리 행진을 통해서도 옛 영화를 마음껏 뽑냅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의 행진...카이펑의 상징 포청천의 행렬...청명절 카이펑은 그야말로 축제의 한마당입니다. <인터뷰>이앤위레이(카이펑 주민) : “정말 좋습니다.우리가 개발한 문화의 저력이 서민들이 카이펑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하는데 정말 큰 역할을 합니다.” <인터뷰>웡시(카이펑 주민) : “우리가 허난성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그 강대하고 부유했던 송나라도 금나라에 쫓기더니 결국 몽골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카이펑은 이 천년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카이펑의 특수성으로 송나라 유물이 많지 않고, 발굴도 힘들다는 점입니다. '성위의 성'으로 불리는 이 유적지에 그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인근 황하의 범람으로 도시 전체가 주기적으로 묻혔기 때문입니다. 발굴된 것으로만 봐도 명나라 시대의 성터 위에 청나라 시대에 다시 성을 쌓은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궈스쥔(카이펑 성곽관리소 소장) : “가장 일찍 지어진 (전국시대의) 따량성은 현재의 지표면에서 15미터 깊이에 있습니다. 송나라 시대 것은 8미터 깊이구요. 명나라 시대 것은 5~6미터 깊이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시대 성곽은 지표면 3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적인 범람으로 도시가 묻히면서 땅속 깊이 들어갈수록 오래된 역사의 생활터전과 유물이 발견되는 이런 퇴적층이 켜켜히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하는 왜 그렇게 자주, 왜 그렇게 쉽게 범람했던 것일까? 이곳 황하에서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직선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카이펑의 고도가 이곳 황하의 수면보다 10여미터 정도 낮다는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카이펑은 그토록 험난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터뷰>왕용촨(황하 수리국 부국장) :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카이펑은 둑이 338차례 터졌고, 16차례 홍수로 고립됐으며 10차례는 완전히 물에 잠겼습니다. 따라서 황하와 카이펑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인 것이죠. 황하가 아무 일 없으면 카이펑도 아무 일 없습니다.” 지금도 황하변 곳곳에.. 2중, 3중으로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카이펑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의 휘황한 수도였던 카이펑의 천년의 부침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역사의 경고였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문명을 잉태한 황하.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어머니 강으로 부르는 황하는 천년 만에 다시 찾아온 중화의 부활을. 자식의 일취월장을 바라보면서도 가슴 조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늘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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