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격동의 南과 北

입력 2015.11.28 (08:06) 수정 2015.11.2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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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민주화의 거목’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내 언론은 물론 주요 외신들도 관련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요,

유독 북한만은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침묵에는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남북관계가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요동쳤던 당시 남북관계를 <클로즈업 북한>에서 재조명했습니다.

<리포트>

저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정계에 투신한 이후길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확고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녹취> 1993년 2월 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 :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작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부 출범 채 한 달이 안 된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가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된다.

대북 유화 정책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녹취> 이현옥(이인모 씨 딸) : "2살 때 헤어져서 지금 44살에 만나니까 그 감격은 뭐라고 더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녹취> 조선중앙TV : "나라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부득이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에 위기가 엄습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백 일 만에 대북 정책의 방향을 선회한다.

<녹취> 1993년 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듬해... 남북 관계를 더욱 급랭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 특사 교환 실무 회담.

<녹취> 1994년 3월,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이다.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고, 미국은 항공모함 5대를 동해로 보내 핵시설 공습 준비를 하는 등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을 둘러싼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첨예해졌다.

그 해 6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IAEA도 탈퇴한다.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제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북한이 IAEA의 특별 사찰 결의를 거부하고 급기야 탈퇴선언까지 한 것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에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그런 핵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강경책으로 영변에 대한 외과 수술식 기습 공격을 할 것을 검토하게 됩니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백악관과의 ‘핫라인’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전달한다.

클린턴에게 ‘65만의 군인들 중 단 한 사람도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영변 폭격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만약에 영변을 폭격했을 경우에 북한이 반발을 해서 충동적이든 의도적이든 대량의 미사일을 우리 쪽으로 쏘아대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끔찍한 표현이 소동화 될 수도 있는 현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통령과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동의 없이 북한을 함부로 폭격하면 일종의 전쟁 유발 행위인데 어떻게 그걸 책임을 지겠는가.."

북-미 갈등에 이어 한-미 동맹마저 흔들릴 위기였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에 예상치 못했던 돌파구가 마련됐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분단 이래 역사적인 첫 남북 회담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도 크게 고무됐다.

<녹취> 김영삼 당시 대통령(1994년 6월) : "이제 장소하고 시간만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 만나자, 어디서 만나자. 이것만 이제 합의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여 앞둔 1994년 7월 8일.

상황은 급반전된다.

<녹취> 김일성 사망 발표(1994년 7월)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정상회담의 한 당사자인 김일성의 급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남북 첫 정상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대통령과 참모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우리도 솔직히 당황했죠. 정상회담 날짜를 잡아놨는데, 7월 말로. 7월 8일 날 죽어버렸으니. 우리 선발대가 들어가기 직전까지 있었고 나름대로 우리가 경호 대책부터 시작해서 의제, 회담 선정..그때 잠 못 자고 24시간 준비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그냥 이 양반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죠."

그런데 김일성의 사망은 남북관계를 뜻밖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남한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김일성 조문 움직임이 일자 정부가 민간 차원의 조문을 공식 금지하고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린 것이다.

이른바 조문 파동이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대화할 때는 동족이지만 전선에서는 서로 마주보고 지켜야 할 적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우리가 조문을 가버리면 상대 국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셈이 되면 우리 헌법 정신하고 위배되고 수없이 우리가 도발과 테러를 당해왔는데 재야인사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조문단을 보낸다는 건 그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그때 안 하기로 했던 겁니다."

남북 관계는 또 다시 요동쳤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민족의 역도’, ‘극악한 원수’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남과 북이 악화일로를 걷던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의 대표단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격 회동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제 지원을 하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수차례 진통 끝에 타결된 합의...

<녹취> 로버트 갈루치(미국 측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녹취> 강석주(북한 측 수석대표) :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합의문을 승인하도록 갈루치한테 지시를 하였고..."

1차 북핵 위기가 일단락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제네바 합의 직후 이루어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핵 협상에 있어 순진하고 과도한 신축성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문가는 설명한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외교에 있어서 김영삼 대통령이 상당히 자주성과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주도력, 이런 걸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북 관계의 진전도 우리의 주도
로 이뤄져야 되고, 북핵 문제도 한국이 주도해서 이뤄져야 된다. 따라서 한국을 제쳐놓고 북한하고 미국하고 회담을 하는 건 별로 모양이 좋지 않다..."

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해빙을 위해 전환점은 필요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결단을 내린다.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던 북한에 쌀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인도적 지원 과정에서 남북 간 신뢰를 쌓고, 이를 정치적 긴장 해소로 연결시킬 기회로 삼고자 했다.

15만 톤의 쌀이 북측으로 건너가면서 남북 관계의 희망적인 전망도 쏟아졌다.

그러나 1년 뒤...

26명의 무장공비를 태운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녹취> 김동신(당시 합참작전참모부장) : "이번 상황은 북괴의 심대한 대남도발이며 명확한 침투행위로서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상황입니다."

당시 잠수함 내부의 CCTV에는 강릉 해안으로 침투하기 위해 잠수함에서 벗어나는 무장공비들의 모습이 생생히 촬영됐다.

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49일에 걸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펼쳐졌다.

남북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역대 탈북자 중 가장 고위급 인사인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남한 땅을 밟고,

남한으로 망명한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가 피살되는 등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격변의 남북 관계를 보내야 했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북미 간에 정면 대립을 통해서 나름대로 북한이 활로를 모색해나가는 그런 상황에서 집권했기 때문에 어떤 우리의 우호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함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이 애초에 생각했던 남북 관계 개선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17년 후...

여든 여덟을 일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북한과의 화해는 고인이 되고서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9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신속히 관련 소식을 전하고 조전을 보냈던 북한은, 이번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에는 관련 보도조차 내놓지 않았다.

국제 정세의 급변, 그리고 1차 북핵 위기라는 격랑을 최일선에서 헤쳐 나가야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그는 떠났지만, 70년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시대를 열어야 할 무거운 과제가 남과 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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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격동의 南과 北
    • 입력 2015-11-28 08:44:39
    • 수정2015-11-28 09:30:37
    남북의 창
<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민주화의 거목’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내 언론은 물론 주요 외신들도 관련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요,

유독 북한만은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침묵에는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남북관계가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요동쳤던 당시 남북관계를 <클로즈업 북한>에서 재조명했습니다.

<리포트>

저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정계에 투신한 이후길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확고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녹취> 1993년 2월 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 :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작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부 출범 채 한 달이 안 된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가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된다.

대북 유화 정책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녹취> 이현옥(이인모 씨 딸) : "2살 때 헤어져서 지금 44살에 만나니까 그 감격은 뭐라고 더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녹취> 조선중앙TV : "나라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부득이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에 위기가 엄습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백 일 만에 대북 정책의 방향을 선회한다.

<녹취> 1993년 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듬해... 남북 관계를 더욱 급랭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 특사 교환 실무 회담.

<녹취> 1994년 3월,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이다.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고, 미국은 항공모함 5대를 동해로 보내 핵시설 공습 준비를 하는 등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을 둘러싼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첨예해졌다.

그 해 6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IAEA도 탈퇴한다.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제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북한이 IAEA의 특별 사찰 결의를 거부하고 급기야 탈퇴선언까지 한 것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에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그런 핵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최강경책으로 영변에 대한 외과 수술식 기습 공격을 할 것을 검토하게 됩니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백악관과의 ‘핫라인’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전달한다.

클린턴에게 ‘65만의 군인들 중 단 한 사람도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영변 폭격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만약에 영변을 폭격했을 경우에 북한이 반발을 해서 충동적이든 의도적이든 대량의 미사일을 우리 쪽으로 쏘아대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끔찍한 표현이 소동화 될 수도 있는 현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대통령과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동의 없이 북한을 함부로 폭격하면 일종의 전쟁 유발 행위인데 어떻게 그걸 책임을 지겠는가.."

북-미 갈등에 이어 한-미 동맹마저 흔들릴 위기였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에 예상치 못했던 돌파구가 마련됐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분단 이래 역사적인 첫 남북 회담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도 크게 고무됐다.

<녹취> 김영삼 당시 대통령(1994년 6월) : "이제 장소하고 시간만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 만나자, 어디서 만나자. 이것만 이제 합의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여 앞둔 1994년 7월 8일.

상황은 급반전된다.

<녹취> 김일성 사망 발표(1994년 7월)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정상회담의 한 당사자인 김일성의 급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남북 첫 정상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대통령과 참모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우리도 솔직히 당황했죠. 정상회담 날짜를 잡아놨는데, 7월 말로. 7월 8일 날 죽어버렸으니. 우리 선발대가 들어가기 직전까지 있었고 나름대로 우리가 경호 대책부터 시작해서 의제, 회담 선정..그때 잠 못 자고 24시간 준비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그냥 이 양반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죠."

그런데 김일성의 사망은 남북관계를 뜻밖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남한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김일성 조문 움직임이 일자 정부가 민간 차원의 조문을 공식 금지하고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린 것이다.

이른바 조문 파동이다.

<인터뷰> 남주홍(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안보통일특보) : "대화할 때는 동족이지만 전선에서는 서로 마주보고 지켜야 할 적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우리가 조문을 가버리면 상대 국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셈이 되면 우리 헌법 정신하고 위배되고 수없이 우리가 도발과 테러를 당해왔는데 재야인사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조문단을 보낸다는 건 그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그때 안 하기로 했던 겁니다."

남북 관계는 또 다시 요동쳤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민족의 역도’, ‘극악한 원수’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남과 북이 악화일로를 걷던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의 대표단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격 회동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제 지원을 하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수차례 진통 끝에 타결된 합의...

<녹취> 로버트 갈루치(미국 측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녹취> 강석주(북한 측 수석대표) :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합의문을 승인하도록 갈루치한테 지시를 하였고..."

1차 북핵 위기가 일단락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제네바 합의 직후 이루어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핵 협상에 있어 순진하고 과도한 신축성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문가는 설명한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외교에 있어서 김영삼 대통령이 상당히 자주성과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주도력, 이런 걸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북 관계의 진전도 우리의 주도
로 이뤄져야 되고, 북핵 문제도 한국이 주도해서 이뤄져야 된다. 따라서 한국을 제쳐놓고 북한하고 미국하고 회담을 하는 건 별로 모양이 좋지 않다..."

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해빙을 위해 전환점은 필요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결단을 내린다.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던 북한에 쌀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인도적 지원 과정에서 남북 간 신뢰를 쌓고, 이를 정치적 긴장 해소로 연결시킬 기회로 삼고자 했다.

15만 톤의 쌀이 북측으로 건너가면서 남북 관계의 희망적인 전망도 쏟아졌다.

그러나 1년 뒤...

26명의 무장공비를 태운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녹취> 김동신(당시 합참작전참모부장) : "이번 상황은 북괴의 심대한 대남도발이며 명확한 침투행위로서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상황입니다."

당시 잠수함 내부의 CCTV에는 강릉 해안으로 침투하기 위해 잠수함에서 벗어나는 무장공비들의 모습이 생생히 촬영됐다.

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49일에 걸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펼쳐졌다.

남북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역대 탈북자 중 가장 고위급 인사인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남한 땅을 밟고,

남한으로 망명한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가 피살되는 등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격변의 남북 관계를 보내야 했다.

<인터뷰> 홍현익(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북미 간에 정면 대립을 통해서 나름대로 북한이 활로를 모색해나가는 그런 상황에서 집권했기 때문에 어떤 우리의 우호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함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이 애초에 생각했던 남북 관계 개선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17년 후...

여든 여덟을 일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북한과의 화해는 고인이 되고서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9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신속히 관련 소식을 전하고 조전을 보냈던 북한은, 이번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에는 관련 보도조차 내놓지 않았다.

국제 정세의 급변, 그리고 1차 북핵 위기라는 격랑을 최일선에서 헤쳐 나가야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그는 떠났지만, 70년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시대를 열어야 할 무거운 과제가 남과 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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