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합의와 파기의 반복…북미 핵 담판 25년
입력 2018.06.09 (08:08)
수정 2018.06.0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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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역사적 핵 담판, 세기의 핵 협상,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표현하는 어구들입니다.
중대한 이슈다 보니 열린다 안열린다 등 우여곡절도 많았는데요.
북미 두 나라의 핵 협상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뒤 두 나라는 25년이라는 세월동안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핵 협상을 중심으로 한 북미 접촉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6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3초 만에 주저앉은 20미터 높이의 냉각탑.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셋, 둘, 하나, 발파!"]
북한은 미국 등 주요 나라의 언론사를 초청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순간을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강경호/북한 핵무기연구소 부소장 : "조선반도와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 정부의 주동적이며 평화 애호적인 노력이 다시 한 번 명백히 확증되었다."]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1989년. 프랑스 위성이 영변 핵 시설을 포착하면서부터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기에 이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하지만 돌파구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련됐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이었다.
[지미 카터/前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면서 이른바 1차 핵위기는 봉합됐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이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에 대한 중유제공이라든지 에너지지원 이런 것이 꽤 한 6년 7년 정도 집행이 되지 않았었어요. 그러면서 북한입장에서도 상당히 거기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미국이 먼저 합의를 어겼다, 이런 비난을 했었고. 나중에는 KEDO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예산지원 그리고 에너지지원 경제지원이 시작이 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다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8월 : "우리의 과학자·기술자들은 다계단 운반 로켓으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빌미로 계속 핵개발을 이어간 북한은 1998년 8월 최초의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북한과 협상과 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결국 이 북한의 핵문제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냉전의 산물이고 이 냉전의 산물을 깨기 위해서는 결국은 대화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러한 것을 명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어떤 강경한 대책이아니라..."]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리며 더욱 고조됐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였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2000년 10월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2주 뒤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북미 간 역대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와미국의 평화적인 발사 지원에 대한 논의가 오가며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거론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미국 국무장관/2000년 10월 :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180도 변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받아쳤고 얼마 뒤 한 미국 신문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개발 계획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에 지원하던 중유 50만 톤을 중단했고, 이에 맞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했다.
그리고 2003년 NPT를 탈퇴한 데 이어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2차 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2005년 2월 : "우리는 이미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학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북미 간 갈등, 그리고 고조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3년 6자회담이 열렸고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해법이 마련됐다.
이른바 9.19 공동 성명이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 복귀를,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약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9.19공동성명은 상당 부분 2년 이상 끌어왔던 6자회담 중에 최초로 의미 있는 6자회담으로서의 의미 있는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최초의 선언이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고요. 북핵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이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평화적인 문제의 종전선언이라든가 평화체제구축이라든가 북미 간의 수교라든가 이러한 것들의 그림까지 그리고 주고받는 것이죠."]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된다.
[북한 1차 핵실험/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다시 증폭된 위기는 이듬해 2.13과 10.3 두 차례 합의를 통해 봉합됐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역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북한 2차 핵실험/2009년 5월 : "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 지하 핵실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도 그 시기가 2008년도에 김정일이 뇌졸중을 처음 일으키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어쨌든 내부적으로 상당히 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잖아요. 북한은 계속 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미국 오바마는 북한이 계속 쏨에도 불구하고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거를 전략적 인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결과론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이 상당히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런 대처도 못한 그러한 기간이었다는 거죠."]
북미 접촉이 단절된 기간 동안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4차례의 추가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시험 발사를 계기로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조선중앙TV/2017년 11월 29일 : "오늘 비로소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의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 높이 선포하셨다."]
그 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트럼프는 집권 뒤 강도 높은 대북제재 정책을 펼쳤지만 김정은의 대화 제안엔 망설이지 않았고 마침내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선포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날 것입니다."]
양쪽 지도자 모두 전격적이고 일방적이지만 추진력만큼은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나 뭐 김일성과는 다른 서구사회를 경험해 본 자본주의를 경험해 본 그러한 지도자고 트럼프는 워낙 틀리잖아요. 지금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이 패스웨이가 경로를 보면 정상 간에 다 합의를 해 버려요. 먼저.. 정상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요청하니까 트럼프가 받아버리고 그리고 지금도 날짜까지 정해주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실무협의를 해 버리고 있으니까 실무협의는 어떻게든 정상회담 스케줄에 맞춰서 만들어 가야 하는 그러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추진력은 훨씬 강해졌다고 봐야 되겠죠."]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최초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북한과 미국.
합의와 파기로 상징되는 북미관계에서 이들이 핵 담판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역사적 핵 담판, 세기의 핵 협상,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표현하는 어구들입니다.
중대한 이슈다 보니 열린다 안열린다 등 우여곡절도 많았는데요.
북미 두 나라의 핵 협상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뒤 두 나라는 25년이라는 세월동안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핵 협상을 중심으로 한 북미 접촉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6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3초 만에 주저앉은 20미터 높이의 냉각탑.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셋, 둘, 하나, 발파!"]
북한은 미국 등 주요 나라의 언론사를 초청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순간을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강경호/북한 핵무기연구소 부소장 : "조선반도와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 정부의 주동적이며 평화 애호적인 노력이 다시 한 번 명백히 확증되었다."]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1989년. 프랑스 위성이 영변 핵 시설을 포착하면서부터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기에 이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하지만 돌파구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련됐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이었다.
[지미 카터/前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면서 이른바 1차 핵위기는 봉합됐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이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에 대한 중유제공이라든지 에너지지원 이런 것이 꽤 한 6년 7년 정도 집행이 되지 않았었어요. 그러면서 북한입장에서도 상당히 거기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미국이 먼저 합의를 어겼다, 이런 비난을 했었고. 나중에는 KEDO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예산지원 그리고 에너지지원 경제지원이 시작이 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다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8월 : "우리의 과학자·기술자들은 다계단 운반 로켓으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빌미로 계속 핵개발을 이어간 북한은 1998년 8월 최초의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북한과 협상과 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결국 이 북한의 핵문제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냉전의 산물이고 이 냉전의 산물을 깨기 위해서는 결국은 대화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러한 것을 명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어떤 강경한 대책이아니라..."]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리며 더욱 고조됐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였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2000년 10월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2주 뒤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북미 간 역대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와미국의 평화적인 발사 지원에 대한 논의가 오가며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거론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미국 국무장관/2000년 10월 :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180도 변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받아쳤고 얼마 뒤 한 미국 신문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개발 계획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에 지원하던 중유 50만 톤을 중단했고, 이에 맞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했다.
그리고 2003년 NPT를 탈퇴한 데 이어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2차 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2005년 2월 : "우리는 이미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학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북미 간 갈등, 그리고 고조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3년 6자회담이 열렸고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해법이 마련됐다.
이른바 9.19 공동 성명이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 복귀를,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약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9.19공동성명은 상당 부분 2년 이상 끌어왔던 6자회담 중에 최초로 의미 있는 6자회담으로서의 의미 있는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최초의 선언이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고요. 북핵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이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평화적인 문제의 종전선언이라든가 평화체제구축이라든가 북미 간의 수교라든가 이러한 것들의 그림까지 그리고 주고받는 것이죠."]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된다.
[북한 1차 핵실험/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다시 증폭된 위기는 이듬해 2.13과 10.3 두 차례 합의를 통해 봉합됐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역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북한 2차 핵실험/2009년 5월 : "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 지하 핵실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도 그 시기가 2008년도에 김정일이 뇌졸중을 처음 일으키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어쨌든 내부적으로 상당히 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잖아요. 북한은 계속 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미국 오바마는 북한이 계속 쏨에도 불구하고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거를 전략적 인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결과론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이 상당히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런 대처도 못한 그러한 기간이었다는 거죠."]
북미 접촉이 단절된 기간 동안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4차례의 추가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시험 발사를 계기로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조선중앙TV/2017년 11월 29일 : "오늘 비로소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의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 높이 선포하셨다."]
그 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트럼프는 집권 뒤 강도 높은 대북제재 정책을 펼쳤지만 김정은의 대화 제안엔 망설이지 않았고 마침내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선포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날 것입니다."]
양쪽 지도자 모두 전격적이고 일방적이지만 추진력만큼은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나 뭐 김일성과는 다른 서구사회를 경험해 본 자본주의를 경험해 본 그러한 지도자고 트럼프는 워낙 틀리잖아요. 지금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이 패스웨이가 경로를 보면 정상 간에 다 합의를 해 버려요. 먼저.. 정상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요청하니까 트럼프가 받아버리고 그리고 지금도 날짜까지 정해주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실무협의를 해 버리고 있으니까 실무협의는 어떻게든 정상회담 스케줄에 맞춰서 만들어 가야 하는 그러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추진력은 훨씬 강해졌다고 봐야 되겠죠."]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최초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북한과 미국.
합의와 파기로 상징되는 북미관계에서 이들이 핵 담판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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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6-09 08:22:45
- 수정2018-06-09 08:47:15

[앵커]
역사적 핵 담판, 세기의 핵 협상,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표현하는 어구들입니다.
중대한 이슈다 보니 열린다 안열린다 등 우여곡절도 많았는데요.
북미 두 나라의 핵 협상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뒤 두 나라는 25년이라는 세월동안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핵 협상을 중심으로 한 북미 접촉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6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3초 만에 주저앉은 20미터 높이의 냉각탑.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셋, 둘, 하나, 발파!"]
북한은 미국 등 주요 나라의 언론사를 초청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순간을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강경호/북한 핵무기연구소 부소장 : "조선반도와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 정부의 주동적이며 평화 애호적인 노력이 다시 한 번 명백히 확증되었다."]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1989년. 프랑스 위성이 영변 핵 시설을 포착하면서부터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기에 이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하지만 돌파구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련됐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이었다.
[지미 카터/前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면서 이른바 1차 핵위기는 봉합됐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이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에 대한 중유제공이라든지 에너지지원 이런 것이 꽤 한 6년 7년 정도 집행이 되지 않았었어요. 그러면서 북한입장에서도 상당히 거기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미국이 먼저 합의를 어겼다, 이런 비난을 했었고. 나중에는 KEDO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예산지원 그리고 에너지지원 경제지원이 시작이 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다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8월 : "우리의 과학자·기술자들은 다계단 운반 로켓으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빌미로 계속 핵개발을 이어간 북한은 1998년 8월 최초의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북한과 협상과 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결국 이 북한의 핵문제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냉전의 산물이고 이 냉전의 산물을 깨기 위해서는 결국은 대화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러한 것을 명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어떤 강경한 대책이아니라..."]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리며 더욱 고조됐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였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2000년 10월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2주 뒤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북미 간 역대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와미국의 평화적인 발사 지원에 대한 논의가 오가며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거론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미국 국무장관/2000년 10월 :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180도 변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받아쳤고 얼마 뒤 한 미국 신문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개발 계획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에 지원하던 중유 50만 톤을 중단했고, 이에 맞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했다.
그리고 2003년 NPT를 탈퇴한 데 이어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2차 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2005년 2월 : "우리는 이미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학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북미 간 갈등, 그리고 고조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3년 6자회담이 열렸고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해법이 마련됐다.
이른바 9.19 공동 성명이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 복귀를,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약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9.19공동성명은 상당 부분 2년 이상 끌어왔던 6자회담 중에 최초로 의미 있는 6자회담으로서의 의미 있는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최초의 선언이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고요. 북핵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이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평화적인 문제의 종전선언이라든가 평화체제구축이라든가 북미 간의 수교라든가 이러한 것들의 그림까지 그리고 주고받는 것이죠."]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된다.
[북한 1차 핵실험/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다시 증폭된 위기는 이듬해 2.13과 10.3 두 차례 합의를 통해 봉합됐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역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북한 2차 핵실험/2009년 5월 : "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 지하 핵실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도 그 시기가 2008년도에 김정일이 뇌졸중을 처음 일으키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어쨌든 내부적으로 상당히 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잖아요. 북한은 계속 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미국 오바마는 북한이 계속 쏨에도 불구하고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거를 전략적 인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결과론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이 상당히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런 대처도 못한 그러한 기간이었다는 거죠."]
북미 접촉이 단절된 기간 동안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4차례의 추가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시험 발사를 계기로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조선중앙TV/2017년 11월 29일 : "오늘 비로소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의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 높이 선포하셨다."]
그 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트럼프는 집권 뒤 강도 높은 대북제재 정책을 펼쳤지만 김정은의 대화 제안엔 망설이지 않았고 마침내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선포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날 것입니다."]
양쪽 지도자 모두 전격적이고 일방적이지만 추진력만큼은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나 뭐 김일성과는 다른 서구사회를 경험해 본 자본주의를 경험해 본 그러한 지도자고 트럼프는 워낙 틀리잖아요. 지금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이 패스웨이가 경로를 보면 정상 간에 다 합의를 해 버려요. 먼저.. 정상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요청하니까 트럼프가 받아버리고 그리고 지금도 날짜까지 정해주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실무협의를 해 버리고 있으니까 실무협의는 어떻게든 정상회담 스케줄에 맞춰서 만들어 가야 하는 그러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추진력은 훨씬 강해졌다고 봐야 되겠죠."]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최초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북한과 미국.
합의와 파기로 상징되는 북미관계에서 이들이 핵 담판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역사적 핵 담판, 세기의 핵 협상,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표현하는 어구들입니다.
중대한 이슈다 보니 열린다 안열린다 등 우여곡절도 많았는데요.
북미 두 나라의 핵 협상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뒤 두 나라는 25년이라는 세월동안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핵 협상을 중심으로 한 북미 접촉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2008년 6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북한 핵개발의 상징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무너져 내렸다.
3초 만에 주저앉은 20미터 높이의 냉각탑. 미국 국무부 관리자들은 이를 북한 비핵화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성 김/당시 미국 국무부 과장 : "아주 완벽한 냉각탑 폭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핵화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단계로 가기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셋, 둘, 하나, 발파!"]
북한은 미국 등 주요 나라의 언론사를 초청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순간을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강경호/북한 핵무기연구소 부소장 : "조선반도와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 정부의 주동적이며 평화 애호적인 노력이 다시 한 번 명백히 확증되었다."]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1989년. 프랑스 위성이 영변 핵 시설을 포착하면서부터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가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기에 이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북한 대표단의 이른바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1994년 3월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하지만 돌파구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련됐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방북이었다.
[지미 카터/前 미국대통령 : "이렇게 다시 와서 주석 각하를 만나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 : "감사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핵 개발 계획 일시 동결과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약속이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북미는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면서 이른바 1차 핵위기는 봉합됐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이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에 대한 중유제공이라든지 에너지지원 이런 것이 꽤 한 6년 7년 정도 집행이 되지 않았었어요. 그러면서 북한입장에서도 상당히 거기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미국이 먼저 합의를 어겼다, 이런 비난을 했었고. 나중에는 KEDO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예산지원 그리고 에너지지원 경제지원이 시작이 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다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8월 : "우리의 과학자·기술자들은 다계단 운반 로켓으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빌미로 계속 핵개발을 이어간 북한은 1998년 8월 최초의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북한과 협상과 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결국 이 북한의 핵문제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냉전의 산물이고 이 냉전의 산물을 깨기 위해서는 결국은 대화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러한 것을 명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어떤 강경한 대책이아니라..."]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리며 더욱 고조됐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였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2000년 10월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2주 뒤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북미 간 역대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와미국의 평화적인 발사 지원에 대한 논의가 오가며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거론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미국 국무장관/2000년 10월 :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180도 변했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받아쳤고 얼마 뒤 한 미국 신문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개발 계획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에 지원하던 중유 50만 톤을 중단했고, 이에 맞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했다.
그리고 2003년 NPT를 탈퇴한 데 이어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2차 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2005년 2월 : "우리는 이미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학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북미 간 갈등, 그리고 고조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3년 6자회담이 열렸고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해법이 마련됐다.
이른바 9.19 공동 성명이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 복귀를,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약속했다.
[김동엽/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9.19공동성명은 상당 부분 2년 이상 끌어왔던 6자회담 중에 최초로 의미 있는 6자회담으로서의 의미 있는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최초의 선언이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고요. 북핵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이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평화적인 문제의 종전선언이라든가 평화체제구축이라든가 북미 간의 수교라든가 이러한 것들의 그림까지 그리고 주고받는 것이죠."]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된다.
[북한 1차 핵실험/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다시 증폭된 위기는 이듬해 2.13과 10.3 두 차례 합의를 통해 봉합됐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냉각탑을 폭파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역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북한 2차 핵실험/2009년 5월 : "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 지하 핵실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북한도 그 시기가 2008년도에 김정일이 뇌졸중을 처음 일으키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어쨌든 내부적으로 상당히 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잖아요. 북한은 계속 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미국 오바마는 북한이 계속 쏨에도 불구하고 국내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거를 전략적 인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결과론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이 상당히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런 대처도 못한 그러한 기간이었다는 거죠."]
북미 접촉이 단절된 기간 동안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4차례의 추가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시험 발사를 계기로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조선중앙TV/2017년 11월 29일 : "오늘 비로소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의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 높이 선포하셨다."]
그 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트럼프는 집권 뒤 강도 높은 대북제재 정책을 펼쳤지만 김정은의 대화 제안엔 망설이지 않았고 마침내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선포했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날 것입니다."]
양쪽 지도자 모두 전격적이고 일방적이지만 추진력만큼은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 :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나 뭐 김일성과는 다른 서구사회를 경험해 본 자본주의를 경험해 본 그러한 지도자고 트럼프는 워낙 틀리잖아요. 지금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이 패스웨이가 경로를 보면 정상 간에 다 합의를 해 버려요. 먼저.. 정상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요청하니까 트럼프가 받아버리고 그리고 지금도 날짜까지 정해주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실무협의를 해 버리고 있으니까 실무협의는 어떻게든 정상회담 스케줄에 맞춰서 만들어 가야 하는 그러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추진력은 훨씬 강해졌다고 봐야 되겠죠."]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최초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북한과 미국.
합의와 파기로 상징되는 북미관계에서 이들이 핵 담판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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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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