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찾은 이름,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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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격전지였던 일본 오키나와에서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만 명이 넘습니다.
조선에선 최소 3천 5백명이 군인과 군무원으로 끌려갔고, 이중 7백 명 이상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요.
KBS 취재팀이 이들의 자취를 추적해 그 후손들을 찾아냈습니다.
윤봄이, 방준원, 두 기자가 이어서 보도합니다.
[연관 기사] [취재후] 명장모와 김만두, 오키나와 묘표 속 조선인 추적기
[리포트]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바다를 바라보는 미군 옆으로 죽은 이를 표시하는 묘표 14개가 서있습니다.
그런데 어색한 일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명촌장모', '금산만두', 일본식으로 개명한 한국인 이름입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숨진 걸까?
에메랄드 빛 바다가 평화롭게 출렁이는 남국의 섬..
사진 속 풍경을 쫓아 묘표가 있던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이 능선을 보고 금방 세소코 섬이란 걸 알았어요. 여긴 70여년 전과 변함이 없어요."]
이곳이 사진 속 묘표가 세워져있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 주민들 만이 과거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나카무라 할아버지.
미군 폭격 직후 일본군이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 화장했고, 주민들이 유골을 땅에 묻었다고 말합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이쪽에서 태워서 유골이 된 걸 통에 한꺼번에 담았어.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다 같이 한꺼번에."]
항구에서 만난 도모리 씨는 구걸하는 조선인들을 아이들이 놀리던 노래를 기억합니다.
["민가의 아줌마, 고구마 주세요. 고구마가 있으면 2~3개만 주세요."]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늘 지쳐 보였다고 했습니다.
[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많은 사람들이 쭉 쓰러져 있었어요. 가끔씩 일본군 병사가 와서 발로 걷어찼어요."]
오키나와 징용자를 연구해 온 오키모토 씨,
이 곳에서 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각각 해군과 육군 군속, 군무원이라고 나옵니다.
근무지는 '히코산마루'. 미군 폭격에 침몰한 배입니다.
[오키모토 후키코/강제 동원 조선인 연구자 : "사망한 날짜가 1945년 1월 22일, 공중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흔적은 여기까집니다.
매장 추정지는 발굴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결국 사진과 기억만 남았습니다.
[오나하 야스타케/일간지 '류큐신보' 기자 : "전쟁이 끝나고 70여 년이 지나면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이 아래에 유골이 아직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모여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KBS 뉴스 윤봄이입니다.
▼ 조선인 명장모와 김만두, 후손 찾았다
[리포트]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우리 이름은 명장모와 김만두입니다.
가기록원에서 이들의 자취를 찾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징용자 명부를 확인했습니다.
명촌장모와 명장모로 확인되는 기록은 4건 금산만두와 김만두로는 41건입니다.
이 가운데 오키나와에서 숨진 사람은 누구일까.
["명촌장모님, (사망하신 곳이) 일본 남쪽 해상인 거 같아요. 이분 본적은 전라남도 고흥군..."]
정부 기록 등을 확인해 유족을 추적했습니다.
[명 씨 문중 관계자 : "명장모 씨라는 분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몰라도 형제분 중에 있었다 하는 그거..."]
명장모 씨의 조카, 성훈 씨는 전남 광양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버렸다던 작은아버지 이름은 기억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숨진 사실은 처음 들었습니다.
[명성훈/명장모 조카 : "여기 가슴이 뭉클하고, 감정이 별로 안 좋네요. 혹시 내가 모셔 갖고 오신다 그러면 제가 잘 모셔야죠."]
김만두 씨의 조카 창기 씨는 통영에서 찾아냈습니다.
아버지가 이따금씩 일본에 끌려간 동생을 그리워했다고 기억했습니다.
[김창기/김만두 조카 : "술 한 잔 드시면, 만두 삼촌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잡혀갔단 말) 뿐이 없는 거라."]
당장이라도 유골 발굴을 통해 DNA 확인을 하고 싶지만, 벽이 만만치 않습니다.
[김정희/김만두 조카며느리 : "모시고 오는 것까지도 좋지만, 거기에 대한 비용이 우리 서민으로선 생각을 못 하겠더라고요."]
10대, 20대 시절, 혈혈단신 고향을 떠난 강제 동원자들, 죽어서도 돌아올 길이 막막합니다.
KBS 뉴스 방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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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에서 찾은 이름,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
- 입력 2018-08-15 21:42:50
- 수정2018-08-15 22:40:58
태평양전쟁 격전지였던 일본 오키나와에서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만 명이 넘습니다.
조선에선 최소 3천 5백명이 군인과 군무원으로 끌려갔고, 이중 7백 명 이상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요.
KBS 취재팀이 이들의 자취를 추적해 그 후손들을 찾아냈습니다.
윤봄이, 방준원, 두 기자가 이어서 보도합니다.
[연관 기사] [취재후] 명장모와 김만두, 오키나와 묘표 속 조선인 추적기
[리포트]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바다를 바라보는 미군 옆으로 죽은 이를 표시하는 묘표 14개가 서있습니다.
그런데 어색한 일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명촌장모', '금산만두', 일본식으로 개명한 한국인 이름입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숨진 걸까?
에메랄드 빛 바다가 평화롭게 출렁이는 남국의 섬..
사진 속 풍경을 쫓아 묘표가 있던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이 능선을 보고 금방 세소코 섬이란 걸 알았어요. 여긴 70여년 전과 변함이 없어요."]
이곳이 사진 속 묘표가 세워져있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 주민들 만이 과거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나카무라 할아버지.
미군 폭격 직후 일본군이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 화장했고, 주민들이 유골을 땅에 묻었다고 말합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이쪽에서 태워서 유골이 된 걸 통에 한꺼번에 담았어.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다 같이 한꺼번에."]
항구에서 만난 도모리 씨는 구걸하는 조선인들을 아이들이 놀리던 노래를 기억합니다.
["민가의 아줌마, 고구마 주세요. 고구마가 있으면 2~3개만 주세요."]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늘 지쳐 보였다고 했습니다.
[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 "많은 사람들이 쭉 쓰러져 있었어요. 가끔씩 일본군 병사가 와서 발로 걷어찼어요."]
오키나와 징용자를 연구해 온 오키모토 씨,
이 곳에서 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각각 해군과 육군 군속, 군무원이라고 나옵니다.
근무지는 '히코산마루'. 미군 폭격에 침몰한 배입니다.
[오키모토 후키코/강제 동원 조선인 연구자 : "사망한 날짜가 1945년 1월 22일, 공중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흔적은 여기까집니다.
매장 추정지는 발굴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결국 사진과 기억만 남았습니다.
[오나하 야스타케/일간지 '류큐신보' 기자 : "전쟁이 끝나고 70여 년이 지나면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이 아래에 유골이 아직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모여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KBS 뉴스 윤봄이입니다.
▼ 조선인 명장모와 김만두, 후손 찾았다
[리포트]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우리 이름은 명장모와 김만두입니다.
가기록원에서 이들의 자취를 찾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징용자 명부를 확인했습니다.
명촌장모와 명장모로 확인되는 기록은 4건 금산만두와 김만두로는 41건입니다.
이 가운데 오키나와에서 숨진 사람은 누구일까.
["명촌장모님, (사망하신 곳이) 일본 남쪽 해상인 거 같아요. 이분 본적은 전라남도 고흥군..."]
정부 기록 등을 확인해 유족을 추적했습니다.
[명 씨 문중 관계자 : "명장모 씨라는 분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몰라도 형제분 중에 있었다 하는 그거..."]
명장모 씨의 조카, 성훈 씨는 전남 광양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버렸다던 작은아버지 이름은 기억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숨진 사실은 처음 들었습니다.
[명성훈/명장모 조카 : "여기 가슴이 뭉클하고, 감정이 별로 안 좋네요. 혹시 내가 모셔 갖고 오신다 그러면 제가 잘 모셔야죠."]
김만두 씨의 조카 창기 씨는 통영에서 찾아냈습니다.
아버지가 이따금씩 일본에 끌려간 동생을 그리워했다고 기억했습니다.
[김창기/김만두 조카 : "술 한 잔 드시면, 만두 삼촌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잡혀갔단 말) 뿐이 없는 거라."]
당장이라도 유골 발굴을 통해 DNA 확인을 하고 싶지만, 벽이 만만치 않습니다.
[김정희/김만두 조카며느리 : "모시고 오는 것까지도 좋지만, 거기에 대한 비용이 우리 서민으로선 생각을 못 하겠더라고요."]
10대, 20대 시절, 혈혈단신 고향을 떠난 강제 동원자들, 죽어서도 돌아올 길이 막막합니다.
KBS 뉴스 방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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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봄이 기자 springyo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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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원 기자 pcban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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