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투쟁 27년…이루지 못한 ‘서울 진격 작전’

입력 2019.04.11 (12:19) 수정 2019.04.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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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해 장장 27년 동안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던 임시 정부.

광복 직전 미군과 함께 '서울 진격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는데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망명정부 27년, 고난의 유랑길을 안양봉 특파원이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독립 의지를 크게 알립니다.

이후 일제의 보복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기고, 이곳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해 무장투쟁 기반을 조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사범대학 교수 : "(군사 인재들이) 광복군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저우 밖 지아싱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간 김구 선생은 이때 항일투쟁의 큰 그림을 완성 합니다.

[수메이좬/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합니다. 한국 임시정부의 앞으로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이후 창사,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한국광복군이 출범하고, 지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습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45년엔 병력이 천여 명으로 불어납니다.

[순커즈/중국 상하이 푸단대 교수 :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망명정부로 만들었고,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서울 진격.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작전회의를 마친 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항복, 김구 선생은 천신만고로 준비한 것이 다 허사가 됐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후 임정 요인들은 뿔뿔이 귀국했고,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은 1946년 6월 해산됐습니다.

KBS 뉴스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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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명 투쟁 27년…이루지 못한 ‘서울 진격 작전’
    • 입력 2019-04-11 12:20:18
    • 수정2019-04-11 12:38:47
    뉴스 12
[앵커]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해 장장 27년 동안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던 임시 정부.

광복 직전 미군과 함께 '서울 진격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는데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망명정부 27년, 고난의 유랑길을 안양봉 특파원이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독립 의지를 크게 알립니다.

이후 일제의 보복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기고, 이곳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해 무장투쟁 기반을 조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사범대학 교수 : "(군사 인재들이) 광복군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저우 밖 지아싱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간 김구 선생은 이때 항일투쟁의 큰 그림을 완성 합니다.

[수메이좬/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합니다. 한국 임시정부의 앞으로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이후 창사,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한국광복군이 출범하고, 지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습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45년엔 병력이 천여 명으로 불어납니다.

[순커즈/중국 상하이 푸단대 교수 :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망명정부로 만들었고,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서울 진격.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작전회의를 마친 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항복, 김구 선생은 천신만고로 준비한 것이 다 허사가 됐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후 임정 요인들은 뿔뿔이 귀국했고,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은 1946년 6월 해산됐습니다.

KBS 뉴스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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