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고운택 할아버지의 가슴 아픈 기억

입력 2022.09.01 (19:42) 수정 2022.09.0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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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두 번째 순서입니다.

고운택 할아버지는 4·3 당시 친형이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60여 년 동안 생사도 알지 못하다 유해발굴을 통해 형의 시신 일부를 찾았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땅을 꽤 가지고 있어도 농사도 잘 안되고 자식은 많고, 일곱 식구가 살려고 하니까 어려웠어요. (4·3 때)정방폭포에서 사람을 몇백 명을 죽였냐 하면 산에 올라 갔다 온 사람들 거기서 다 죽여버렸어요. 정방폭포에서 죽여버리고 제대로 묻지 않고 내버리니까 까마귀들이 (시신을) 물어와서."]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우리 형님 데려간 날이 7월 15일입니다. 그러니까 6·25 나서 한 달도 안 됐을 겁니다. 지금도 7월 15일 제사를 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만 여기(동네)에서 13명 잡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비검속 피해자입니다. 한밤 중에 '계십니까, 계십니까?' 젊은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누구냐' 하니 우리 형님이 고행준인데 '고행준을 불러서 좀 갈 일이 있습니다' 하니까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이 '너희들 누군데 우리 아들 데려가냐' 그런데도 말을 안 해요. 나도 잠자다가 일어나 봤죠. 일어나 보니 한밤 중인데 캄캄한 밤중인데 두 사람이 왔어요. '우리가 2~3일 동안 알아볼 것 알아보고 곧 보내겠습니다' 했어요. 우린 믿었습니다. 경찰인지 누군지 우리는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잡아갔다고. 그때 마지막으로 (형님을) 봤습니다."]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형님 행방불명되고 친척들이) 내가 종손이니까 이 아이는 어려워도, 밭을 팔아서라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시켜야 된다고 해서 중학교 들어갈 때 밭 하나 팔고 고등학교 들어갈 때 밭 하나 팔고 나중에 또 내가 죽을 수 있었는데 (면장 하던 친척) 할아버지 집에 가서 살 수 있었고, 위험하니까 내려오라고 해서 나는 거기 가서 살아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들이 경찰 합격해서 경찰학교)가니까 몇 달 있으니 웬 사람들이 와서 한 달포쯤 있었나, 그놈들이 또 왔어요. 그때는 연좌제가 있을 때입니다. 형님이 어떤 나쁜 사상으로 죽었나 해서 동생 아들이 경찰 합격하니까 신원조회 해본다고 온 모양입니다."]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정뜨르 비행장에서 나왔습니다. 땅을 파니까 시신이 백몇십 구가 나왔는데 우리 4남매가 DNA 검사를 하니, 우리 형님이 나왔는데 몸뚱이는 없고 팔하고 다리 일부만 화장해서 지금 4·3평화공원에 안치돼 있습니다. 우리 형님 잡아가서 2~3일 내로 보내겠다고 한 것이 오지 않고 시신으로 (지난 5월에 형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번 판결도 무죄라고 하면서도 무슨 죄명인고 하니 죄명은 없고 똑똑한 게 죄고."]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4·3 때는 안 죽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수없이 양민이 다 죽은 겁니다. 양민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농사짓고 그 어려운 시절에, 농사짓고 먹고 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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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증언] 고운택 할아버지의 가슴 아픈 기억
    • 입력 2022-09-01 19:42:34
    • 수정2022-09-01 21:18:10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두 번째 순서입니다.

고운택 할아버지는 4·3 당시 친형이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60여 년 동안 생사도 알지 못하다 유해발굴을 통해 형의 시신 일부를 찾았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땅을 꽤 가지고 있어도 농사도 잘 안되고 자식은 많고, 일곱 식구가 살려고 하니까 어려웠어요. (4·3 때)정방폭포에서 사람을 몇백 명을 죽였냐 하면 산에 올라 갔다 온 사람들 거기서 다 죽여버렸어요. 정방폭포에서 죽여버리고 제대로 묻지 않고 내버리니까 까마귀들이 (시신을) 물어와서."]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우리 형님 데려간 날이 7월 15일입니다. 그러니까 6·25 나서 한 달도 안 됐을 겁니다. 지금도 7월 15일 제사를 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만 여기(동네)에서 13명 잡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비검속 피해자입니다. 한밤 중에 '계십니까, 계십니까?' 젊은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누구냐' 하니 우리 형님이 고행준인데 '고행준을 불러서 좀 갈 일이 있습니다' 하니까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이 '너희들 누군데 우리 아들 데려가냐' 그런데도 말을 안 해요. 나도 잠자다가 일어나 봤죠. 일어나 보니 한밤 중인데 캄캄한 밤중인데 두 사람이 왔어요. '우리가 2~3일 동안 알아볼 것 알아보고 곧 보내겠습니다' 했어요. 우린 믿었습니다. 경찰인지 누군지 우리는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잡아갔다고. 그때 마지막으로 (형님을) 봤습니다."]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형님 행방불명되고 친척들이) 내가 종손이니까 이 아이는 어려워도, 밭을 팔아서라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시켜야 된다고 해서 중학교 들어갈 때 밭 하나 팔고 고등학교 들어갈 때 밭 하나 팔고 나중에 또 내가 죽을 수 있었는데 (면장 하던 친척) 할아버지 집에 가서 살 수 있었고, 위험하니까 내려오라고 해서 나는 거기 가서 살아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들이 경찰 합격해서 경찰학교)가니까 몇 달 있으니 웬 사람들이 와서 한 달포쯤 있었나, 그놈들이 또 왔어요. 그때는 연좌제가 있을 때입니다. 형님이 어떤 나쁜 사상으로 죽었나 해서 동생 아들이 경찰 합격하니까 신원조회 해본다고 온 모양입니다."]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정뜨르 비행장에서 나왔습니다. 땅을 파니까 시신이 백몇십 구가 나왔는데 우리 4남매가 DNA 검사를 하니, 우리 형님이 나왔는데 몸뚱이는 없고 팔하고 다리 일부만 화장해서 지금 4·3평화공원에 안치돼 있습니다. 우리 형님 잡아가서 2~3일 내로 보내겠다고 한 것이 오지 않고 시신으로 (지난 5월에 형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번 판결도 무죄라고 하면서도 무슨 죄명인고 하니 죄명은 없고 똑똑한 게 죄고."]

[고운택/4·3 희생자 유족 : "4·3 때는 안 죽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수없이 양민이 다 죽은 겁니다. 양민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농사짓고 그 어려운 시절에, 농사짓고 먹고 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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