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김옥자 할머니 ‘70여 년 아물지 않는 상처’

입력 2022.10.27 (19:32) 수정 2022.10.27 (19:5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다섯 번째 순서입니다.

김옥자 할머니는 6살 어린 나이에 토벌대에 의해 아버지와 삼촌들, 조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김옥자 할머니를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우리 식구가 다 같이 살았어요. 아버지 쪽 4형제하고 고모님은 그때 결혼하고, 또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들이 진짜 쉽게 말하면 오붓하게 살았어요. 걱정 없이."]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군인들이) 주둔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밝으면 토벌, 빨갱이들 잡으러 올라간다고 했어요. 집에 남자들만 보면 빨갱이 가리키라고 하니 남자들은 일하기 바쁘지, 빨갱이가 어디있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어머니가 빨리 가라고, (토벌대가) 집에 막 불을 붙여서, 할머니 집 불붙여버렸다고 하면서 빈네오름 뒤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보니 벌써 집이 다 타서 아무것도 없었어요. 애월에 삼거리길 거기 가서 집을 하나 빌려서 우리만 간 것이 아니에요. 우리 식구 다에 둘째 아버지 가고. 아버지는 그냥 그 빈네오름에 가면 조그만 굴 하나 있는데 (거기 남았어요.)"]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둘째 아버지)는 성담 지키러 나오라고 해서 가 있는데 한림지서에서 왜 성담 지키는 사람을 다 잡아가서 죽였는지 몰라요. 우리 죄는 피난 간 죄 밖에, 윗동네 산 죄 밖에 없어요. (둘째 아버지 죽고) 할어버지가 너무 억울하다고 하니까, 억울해 한다며 작은할아버지까지 같이 잡아가지 않았겠어요. 할머니도 애월지서에 잡아다가 바른말 하라고 막 때린 거에요. 할머니는 귀가 먹어서 말을 잘 못 알아들었어요, 젊어도 말 안 한다고 막 때려서 팔 이런 데 다 부러져 버렸어요. 언제 죽는지도 몰라요, 그 지서에서."]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있는 곳에 찾아가 보니 굴이었어요. 그 굴에 오래 못 살았어요. 한 달쯤 사나 마나 했어요. 군인들이 갔는지 안 갔는지 망보고 와라 하니 그때 당시 (그 사람이)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붙잡힌 거예요. 어디로 갔냐 하면 저 주정공장, 거기 가서 보니 우리만이 아니고 붙잡혀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서울 뭐 어디 교도소로 간다하고 우리는 애월읍사무소로 갔어요. 아버지가 (마포형무소) 가서 얼마나 추웠는지 옷 한 벌만 보내달라고(편지가 왔어요.) 6·25 나던 해 4월에 (편지가 와서) 7월 되면 내가 나갈 거니까 그때까지만 어떻게 살고 있으라고, 그렇게 그것이 마지막이었어요."]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어머니는) 돌도 안 된 동생 놔두고 일하러 다니면 집에 우리도 먹을 것 없으니까 진짜 동생도 보리쌀 삶은 물 먹여 살았어요. (13살 때 육지 가서) 이틀, 사흘씩 굶으면서 방직회사에 다니고, 안 되니까 남의 집에 식모로 가니 별의별 취급을 다 당하면서 거기서 식모로 살고 걱정 없이 살다가 나와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어요. 차라리 밥그릇 들고 남의 집에서 얻어먹고 사는 것이 편안하지."]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그 기록에는. 무슨 죄가 있어서 무기징역인지. (재심에서 무죄판결) 나오면 뭐합니까?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은 다 형제도 있고 조카도 있고 다 있지 않아요? 난 아무도 없어요. 돈보다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 한 마디, 부모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듣고 살았어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4·3 증언] 김옥자 할머니 ‘70여 년 아물지 않는 상처’
    • 입력 2022-10-27 19:32:08
    • 수정2022-10-27 19:53:00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다섯 번째 순서입니다.

김옥자 할머니는 6살 어린 나이에 토벌대에 의해 아버지와 삼촌들, 조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김옥자 할머니를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우리 식구가 다 같이 살았어요. 아버지 쪽 4형제하고 고모님은 그때 결혼하고, 또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들이 진짜 쉽게 말하면 오붓하게 살았어요. 걱정 없이."]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군인들이) 주둔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밝으면 토벌, 빨갱이들 잡으러 올라간다고 했어요. 집에 남자들만 보면 빨갱이 가리키라고 하니 남자들은 일하기 바쁘지, 빨갱이가 어디있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어머니가 빨리 가라고, (토벌대가) 집에 막 불을 붙여서, 할머니 집 불붙여버렸다고 하면서 빈네오름 뒤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보니 벌써 집이 다 타서 아무것도 없었어요. 애월에 삼거리길 거기 가서 집을 하나 빌려서 우리만 간 것이 아니에요. 우리 식구 다에 둘째 아버지 가고. 아버지는 그냥 그 빈네오름에 가면 조그만 굴 하나 있는데 (거기 남았어요.)"]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둘째 아버지)는 성담 지키러 나오라고 해서 가 있는데 한림지서에서 왜 성담 지키는 사람을 다 잡아가서 죽였는지 몰라요. 우리 죄는 피난 간 죄 밖에, 윗동네 산 죄 밖에 없어요. (둘째 아버지 죽고) 할어버지가 너무 억울하다고 하니까, 억울해 한다며 작은할아버지까지 같이 잡아가지 않았겠어요. 할머니도 애월지서에 잡아다가 바른말 하라고 막 때린 거에요. 할머니는 귀가 먹어서 말을 잘 못 알아들었어요, 젊어도 말 안 한다고 막 때려서 팔 이런 데 다 부러져 버렸어요. 언제 죽는지도 몰라요, 그 지서에서."]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있는 곳에 찾아가 보니 굴이었어요. 그 굴에 오래 못 살았어요. 한 달쯤 사나 마나 했어요. 군인들이 갔는지 안 갔는지 망보고 와라 하니 그때 당시 (그 사람이)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붙잡힌 거예요. 어디로 갔냐 하면 저 주정공장, 거기 가서 보니 우리만이 아니고 붙잡혀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서울 뭐 어디 교도소로 간다하고 우리는 애월읍사무소로 갔어요. 아버지가 (마포형무소) 가서 얼마나 추웠는지 옷 한 벌만 보내달라고(편지가 왔어요.) 6·25 나던 해 4월에 (편지가 와서) 7월 되면 내가 나갈 거니까 그때까지만 어떻게 살고 있으라고, 그렇게 그것이 마지막이었어요."]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어머니는) 돌도 안 된 동생 놔두고 일하러 다니면 집에 우리도 먹을 것 없으니까 진짜 동생도 보리쌀 삶은 물 먹여 살았어요. (13살 때 육지 가서) 이틀, 사흘씩 굶으면서 방직회사에 다니고, 안 되니까 남의 집에 식모로 가니 별의별 취급을 다 당하면서 거기서 식모로 살고 걱정 없이 살다가 나와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어요. 차라리 밥그릇 들고 남의 집에서 얻어먹고 사는 것이 편안하지."]

[김옥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그 기록에는. 무슨 죄가 있어서 무기징역인지. (재심에서 무죄판결) 나오면 뭐합니까?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은 다 형제도 있고 조카도 있고 다 있지 않아요? 난 아무도 없어요. 돈보다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 한 마디, 부모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듣고 살았어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제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