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산’이 된 4·3기록물…진실을 지켜낸 이들
입력 2025.04.15 (09:51)
수정 2025.04.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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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기록을 지켜내면서 4·3의 진실을 밝힌 이들을 통해 들어봤습니다.
안서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94년 4·3 피해 신고실의 첫 조사요원이던 강덕환 씨.
4·3이 발생한 지 40여 년만의 공식 조사였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혼자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진짜 사람들이 유족들이 엄청 몰려드는거죠. 9시까지 출근해 보면 막 복도에 열을 지어 있는 거예요."]
조사요원은 17명으로 늘고, 신고자는 1년 만에 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전부 사람 목숨이잖아요. 하나하나 낱낱이. 그래서 이런 (피해 실태) 보고서를 내고 또 국회와 정부에 전부 보냈어요 이 책을. 국회의원 숫자대로 전부."]
총 1만 3,968장의 피해신고서는 조사 이후 하마터면 폐기될 뻔했지만, 강 씨 덕분에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이것을 폐기 처분해도 된다'고 했었어요. 근데 저는 버릴 수가 없잖아요. 부둥켜안고. 그 캐비닛을 들고 가야 할 때 서러움도 컸죠."]
1994년 말, 정부기록보존소에 근무하던 김재순 씨는 4·3 수형인 명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서울에서는 마이크로필름을 신청해서 볼 수밖에 없어서 기록물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해서, 부산 근무 자원을 했습니다."]
그곳엔 제주도민 2천5백여 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불법 군사재판, 군법회의 기록이 있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사형을 한꺼번에, 하루, 몇 시간도 아닌 것 같아요. 쭉 나오는데 하루씩 해서 100명 단위로 그렇게 판결해서. 이건 정식 재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 홀로 끙끙 앓다 1999년 용기를 내어 추미애 의원에게 전달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제가 이걸 실무자로서 절차를 밟아서 공개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이 기록원을 방문해서 확인하면 일거에 정리가 될 것 같고."]
이처럼 진실을 밝힌 이들의 노력이 모여, 1999년 정부는 4·3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특별법을 통해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들은 명예 회복의 근거가 됐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세계의 기록이 됐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밑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힘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 봐요. 저는 확신했어요, 이게 될 거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기록을 지켜내면서 4·3의 진실을 밝힌 이들을 통해 들어봤습니다.
안서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94년 4·3 피해 신고실의 첫 조사요원이던 강덕환 씨.
4·3이 발생한 지 40여 년만의 공식 조사였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혼자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진짜 사람들이 유족들이 엄청 몰려드는거죠. 9시까지 출근해 보면 막 복도에 열을 지어 있는 거예요."]
조사요원은 17명으로 늘고, 신고자는 1년 만에 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전부 사람 목숨이잖아요. 하나하나 낱낱이. 그래서 이런 (피해 실태) 보고서를 내고 또 국회와 정부에 전부 보냈어요 이 책을. 국회의원 숫자대로 전부."]
총 1만 3,968장의 피해신고서는 조사 이후 하마터면 폐기될 뻔했지만, 강 씨 덕분에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이것을 폐기 처분해도 된다'고 했었어요. 근데 저는 버릴 수가 없잖아요. 부둥켜안고. 그 캐비닛을 들고 가야 할 때 서러움도 컸죠."]
1994년 말, 정부기록보존소에 근무하던 김재순 씨는 4·3 수형인 명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서울에서는 마이크로필름을 신청해서 볼 수밖에 없어서 기록물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해서, 부산 근무 자원을 했습니다."]
그곳엔 제주도민 2천5백여 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불법 군사재판, 군법회의 기록이 있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사형을 한꺼번에, 하루, 몇 시간도 아닌 것 같아요. 쭉 나오는데 하루씩 해서 100명 단위로 그렇게 판결해서. 이건 정식 재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 홀로 끙끙 앓다 1999년 용기를 내어 추미애 의원에게 전달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제가 이걸 실무자로서 절차를 밟아서 공개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이 기록원을 방문해서 확인하면 일거에 정리가 될 것 같고."]
이처럼 진실을 밝힌 이들의 노력이 모여, 1999년 정부는 4·3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특별법을 통해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들은 명예 회복의 근거가 됐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세계의 기록이 됐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밑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힘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 봐요. 저는 확신했어요, 이게 될 거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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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4-15 09:51:58
- 수정2025-04-15 10: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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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기록을 지켜내면서 4·3의 진실을 밝힌 이들을 통해 들어봤습니다.
안서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94년 4·3 피해 신고실의 첫 조사요원이던 강덕환 씨.
4·3이 발생한 지 40여 년만의 공식 조사였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혼자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진짜 사람들이 유족들이 엄청 몰려드는거죠. 9시까지 출근해 보면 막 복도에 열을 지어 있는 거예요."]
조사요원은 17명으로 늘고, 신고자는 1년 만에 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전부 사람 목숨이잖아요. 하나하나 낱낱이. 그래서 이런 (피해 실태) 보고서를 내고 또 국회와 정부에 전부 보냈어요 이 책을. 국회의원 숫자대로 전부."]
총 1만 3,968장의 피해신고서는 조사 이후 하마터면 폐기될 뻔했지만, 강 씨 덕분에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이것을 폐기 처분해도 된다'고 했었어요. 근데 저는 버릴 수가 없잖아요. 부둥켜안고. 그 캐비닛을 들고 가야 할 때 서러움도 컸죠."]
1994년 말, 정부기록보존소에 근무하던 김재순 씨는 4·3 수형인 명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서울에서는 마이크로필름을 신청해서 볼 수밖에 없어서 기록물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해서, 부산 근무 자원을 했습니다."]
그곳엔 제주도민 2천5백여 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불법 군사재판, 군법회의 기록이 있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사형을 한꺼번에, 하루, 몇 시간도 아닌 것 같아요. 쭉 나오는데 하루씩 해서 100명 단위로 그렇게 판결해서. 이건 정식 재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 홀로 끙끙 앓다 1999년 용기를 내어 추미애 의원에게 전달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제가 이걸 실무자로서 절차를 밟아서 공개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이 기록원을 방문해서 확인하면 일거에 정리가 될 것 같고."]
이처럼 진실을 밝힌 이들의 노력이 모여, 1999년 정부는 4·3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특별법을 통해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들은 명예 회복의 근거가 됐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세계의 기록이 됐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밑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힘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 봐요. 저는 확신했어요, 이게 될 거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기록을 지켜내면서 4·3의 진실을 밝힌 이들을 통해 들어봤습니다.
안서연 기자입니다.
[리포트]
1994년 4·3 피해 신고실의 첫 조사요원이던 강덕환 씨.
4·3이 발생한 지 40여 년만의 공식 조사였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혼자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진짜 사람들이 유족들이 엄청 몰려드는거죠. 9시까지 출근해 보면 막 복도에 열을 지어 있는 거예요."]
조사요원은 17명으로 늘고, 신고자는 1년 만에 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전부 사람 목숨이잖아요. 하나하나 낱낱이. 그래서 이런 (피해 실태) 보고서를 내고 또 국회와 정부에 전부 보냈어요 이 책을. 국회의원 숫자대로 전부."]
총 1만 3,968장의 피해신고서는 조사 이후 하마터면 폐기될 뻔했지만, 강 씨 덕분에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이것을 폐기 처분해도 된다'고 했었어요. 근데 저는 버릴 수가 없잖아요. 부둥켜안고. 그 캐비닛을 들고 가야 할 때 서러움도 컸죠."]
1994년 말, 정부기록보존소에 근무하던 김재순 씨는 4·3 수형인 명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서울에서는 마이크로필름을 신청해서 볼 수밖에 없어서 기록물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해서, 부산 근무 자원을 했습니다."]
그곳엔 제주도민 2천5백여 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불법 군사재판, 군법회의 기록이 있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사형을 한꺼번에, 하루, 몇 시간도 아닌 것 같아요. 쭉 나오는데 하루씩 해서 100명 단위로 그렇게 판결해서. 이건 정식 재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 홀로 끙끙 앓다 1999년 용기를 내어 추미애 의원에게 전달했습니다.
[김재순/당시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직 : "제가 이걸 실무자로서 절차를 밟아서 공개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의원이 기록원을 방문해서 확인하면 일거에 정리가 될 것 같고."]
이처럼 진실을 밝힌 이들의 노력이 모여, 1999년 정부는 4·3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특별법을 통해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들은 명예 회복의 근거가 됐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세계의 기록이 됐습니다.
[강덕환/당시 조사요원 : "밑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힘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 봐요. 저는 확신했어요, 이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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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연 기자 asy010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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