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北 이탈 주민 2만 명 시대

입력 2010.10.2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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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중순이면 국내에 들어와 정착한 탈북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와 희망을 찾아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탈북자 2만 명 시대의 명암을 조명해봅니다.



서울 남산동에 위치한 카페.



지난 3월에 문을 연 이곳에는 특별한 바리스타들이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북한에서 온 청년들입니다.



탈북청년 다섯 명은 두 달 동안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김일회(탈북청년 카페 운영) : "이곳에서 정착하거나 전문적으로 일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해서 이 친구들이 어떻게 이 남한 땅에서 자립할 수 있고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카페를 만들게 됐고요."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탈북 청년이 4천 5백여 명에 이르는 가운데, 탈북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적 기업입니다.



국내에 들어온 지 이제 갓 5개월이 된 청년부터 8년이 넘은 청년까지.



생계를 위해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던 탈북 청년들은 이곳에서 바리스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서울 공덕동에는 탈북자들이 함께 운영하는 북한음식전문점이 있습니다.



함흥냉면, 평양온면, 개성만둣국 등 북한 각지의 음식을 두루 맛볼 수 있는 이곳은 지난 4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함흥에서 대를 이어 냉면을 팔았다는 안 모 씨는 지난 2005년에 탈북 한 이후 어엿한 식당 사장님으로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녹취> 안OO(2005년 탈북) : "식당에 들어가서 밑바닥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북한에는 가스라는 게 없기 때문에 가스 불 켜는 거, 세제 쓰는 거 그것부터 배우면서."



지난 2008년에는 직접 음식점을 개업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 때문에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녹취> 안OO(2005년 탈북) : “빨갱이가 하는 음식점이라고 아침에 출근해서 오면 밖에 이만한 쪽지 같은 걸 붙여놓고 빨갱이 식당 이렇게 써놓고요.”



식당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영희 씨는 북한에서 못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루고 있는 중입니다.



<인터뷰> 이영희(2003년 탈북) : “저희 어머니의 꿈이 북한에서 이런 큰 가게를 꾸리는 거였어요.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우리 가게를 같이 하자 그랬는데, 북한에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많은 탈북자들은 새로운 터전인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녹취> “사랑스런 누이가 있어요.”



스물여섯 살에 중국으로 팔려가 강제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둘이나 낳고, 2년 전에 목숨을 걸고 홀로 한국으로 탈출한 김 모 씨.



돈을 벌겠다고 찾아온 한국 땅에서 어렵게 구한 일자리는 노래방 도우미입니다.



<녹취> 김OO(2008년 입국) : “식당에서 암만 뼈 빠지게 일해도 100만원 밖에 못 벌어요. 북한에 부모들한테도 돈을 보내줘야 되고, 중국에 있는 자녀들한테도 돈 보내줘야 되고요.”



한 손에 약봉지를 들고 힘겹게 그네를 미는 탈북 2년 차 이 모 씨.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간호 대학에 다니며 꿈을 키웠지만 지난 3월, 돌연 위암 4기 선고를 받은 뒤 힘겹게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혼자서 생활을 책임지다 보니 16개월 된 아들이 엄마 얼굴도 모른다는 점이 미안하기만 합니다.



<녹취> 이OO(2008년 탈북) : “엄마라고 부르고 나한테 와야 하는데 애가 엄마를 잘 모르니까 그게 가슴이 너무 아파요.”



지난 해 탈북한 최 모 씨는 사람들과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되지 않자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녹취> 최OO(2009년 탈북) : “사람들이 말하면 말하는구나 그 정도만 알아듣고 무슨 내용으로 말하는지는 못 알아듣고.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두 달 동안 우울해하면서 살다가.”



20대 초반인 최 씨는 북한에서 전문대학을 다니다 자유를 찾아 혼자 한국으로 왔지만, 같은 또래의 남한 학생들처럼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녹취> 최OO(2009년 탈북) :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좀 애매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다시 다닐 수도 없고 대학 가자니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고요.”



북한에서와 배우는 내용이 다르고,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학습공백을 겪는 탈북 청소년들도 적응이 어렵긴 마찬가집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고등학생 김 모 군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습니다.



<녹취> 김OO(2008년 탈북) : “처음에 학교 갔을 때 북한에서 왔다고 말 안 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왕따인가 (싶고). 막 흉내 내고. 말할 때 따라하고요.”



지난 1950년 첫 귀순자가 나온 이후 지난 달 말까지 집계된 탈북자 수는 모두 만 9천 7백여 명입니다.



월평균 2백 명씩 늘어나는 추세로 볼 때, 다음 달이면 2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중 국경지역인 두만강 상류에는 지금도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초병을 늘리고, 중국은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목숨을 건 탈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90년대에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탈북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2000년 이후에는 사람답게 살겠다는 희망과 자유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녹취> 함북 회령 출신 탈북자 :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게 우리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이 사람 같지 않게 살고.”



탈북자의 거의 절반은 북한에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다 국내로 넘어 왔습니다.



문제는 더 나은 삶을 찾아온 한국에서도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겁니다.



정착한 지 6개월이 넘은 15세부터 64세까지의 탈북자 중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 절반 이상이 정부로부터 기초생계 급여를 지원받는 등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흥광(NK지식인연대 대표/2003년 탈북) : “삶의 만족도 수준은 취업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많이 갈리게 되거든요. 취업을 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정말 좋다, 살만하다고 하고 취업 못한 사람들은 생각과 좀 다르네.”



정부는 세대 인원수에 따라 정착금을 지원하고, 직업훈련, 취업 장려금, 학비보조 등 탈북자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제도를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탈북자들은 여전히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인터뷰> 안찬일(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1979년 탈북) : “차이를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모든 탈북자들은 대접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무시당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일입니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하고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탈북자 정책과 함께 그들을 동반자로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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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北 이탈 주민 2만 명 시대
    • 입력 2010-10-23 10:57:01
    남북의 창
다음 달 중순이면 국내에 들어와 정착한 탈북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와 희망을 찾아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탈북자 2만 명 시대의 명암을 조명해봅니다.

서울 남산동에 위치한 카페.

지난 3월에 문을 연 이곳에는 특별한 바리스타들이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북한에서 온 청년들입니다.

탈북청년 다섯 명은 두 달 동안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김일회(탈북청년 카페 운영) : "이곳에서 정착하거나 전문적으로 일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해서 이 친구들이 어떻게 이 남한 땅에서 자립할 수 있고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카페를 만들게 됐고요."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탈북 청년이 4천 5백여 명에 이르는 가운데, 탈북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적 기업입니다.

국내에 들어온 지 이제 갓 5개월이 된 청년부터 8년이 넘은 청년까지.

생계를 위해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던 탈북 청년들은 이곳에서 바리스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서울 공덕동에는 탈북자들이 함께 운영하는 북한음식전문점이 있습니다.

함흥냉면, 평양온면, 개성만둣국 등 북한 각지의 음식을 두루 맛볼 수 있는 이곳은 지난 4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함흥에서 대를 이어 냉면을 팔았다는 안 모 씨는 지난 2005년에 탈북 한 이후 어엿한 식당 사장님으로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녹취> 안OO(2005년 탈북) : "식당에 들어가서 밑바닥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북한에는 가스라는 게 없기 때문에 가스 불 켜는 거, 세제 쓰는 거 그것부터 배우면서."

지난 2008년에는 직접 음식점을 개업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 때문에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녹취> 안OO(2005년 탈북) : “빨갱이가 하는 음식점이라고 아침에 출근해서 오면 밖에 이만한 쪽지 같은 걸 붙여놓고 빨갱이 식당 이렇게 써놓고요.”

식당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영희 씨는 북한에서 못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루고 있는 중입니다.

<인터뷰> 이영희(2003년 탈북) : “저희 어머니의 꿈이 북한에서 이런 큰 가게를 꾸리는 거였어요.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우리 가게를 같이 하자 그랬는데, 북한에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많은 탈북자들은 새로운 터전인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녹취> “사랑스런 누이가 있어요.”

스물여섯 살에 중국으로 팔려가 강제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둘이나 낳고, 2년 전에 목숨을 걸고 홀로 한국으로 탈출한 김 모 씨.

돈을 벌겠다고 찾아온 한국 땅에서 어렵게 구한 일자리는 노래방 도우미입니다.

<녹취> 김OO(2008년 입국) : “식당에서 암만 뼈 빠지게 일해도 100만원 밖에 못 벌어요. 북한에 부모들한테도 돈을 보내줘야 되고, 중국에 있는 자녀들한테도 돈 보내줘야 되고요.”

한 손에 약봉지를 들고 힘겹게 그네를 미는 탈북 2년 차 이 모 씨.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간호 대학에 다니며 꿈을 키웠지만 지난 3월, 돌연 위암 4기 선고를 받은 뒤 힘겹게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혼자서 생활을 책임지다 보니 16개월 된 아들이 엄마 얼굴도 모른다는 점이 미안하기만 합니다.

<녹취> 이OO(2008년 탈북) : “엄마라고 부르고 나한테 와야 하는데 애가 엄마를 잘 모르니까 그게 가슴이 너무 아파요.”

지난 해 탈북한 최 모 씨는 사람들과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되지 않자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녹취> 최OO(2009년 탈북) : “사람들이 말하면 말하는구나 그 정도만 알아듣고 무슨 내용으로 말하는지는 못 알아듣고.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두 달 동안 우울해하면서 살다가.”

20대 초반인 최 씨는 북한에서 전문대학을 다니다 자유를 찾아 혼자 한국으로 왔지만, 같은 또래의 남한 학생들처럼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녹취> 최OO(2009년 탈북) :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좀 애매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다시 다닐 수도 없고 대학 가자니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고요.”

북한에서와 배우는 내용이 다르고,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학습공백을 겪는 탈북 청소년들도 적응이 어렵긴 마찬가집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고등학생 김 모 군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습니다.

<녹취> 김OO(2008년 탈북) : “처음에 학교 갔을 때 북한에서 왔다고 말 안 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왕따인가 (싶고). 막 흉내 내고. 말할 때 따라하고요.”

지난 1950년 첫 귀순자가 나온 이후 지난 달 말까지 집계된 탈북자 수는 모두 만 9천 7백여 명입니다.

월평균 2백 명씩 늘어나는 추세로 볼 때, 다음 달이면 2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중 국경지역인 두만강 상류에는 지금도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초병을 늘리고, 중국은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목숨을 건 탈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90년대에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탈북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2000년 이후에는 사람답게 살겠다는 희망과 자유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녹취> 함북 회령 출신 탈북자 :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게 우리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이 사람 같지 않게 살고.”

탈북자의 거의 절반은 북한에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다 국내로 넘어 왔습니다.

문제는 더 나은 삶을 찾아온 한국에서도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겁니다.

정착한 지 6개월이 넘은 15세부터 64세까지의 탈북자 중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 절반 이상이 정부로부터 기초생계 급여를 지원받는 등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흥광(NK지식인연대 대표/2003년 탈북) : “삶의 만족도 수준은 취업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많이 갈리게 되거든요. 취업을 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정말 좋다, 살만하다고 하고 취업 못한 사람들은 생각과 좀 다르네.”

정부는 세대 인원수에 따라 정착금을 지원하고, 직업훈련, 취업 장려금, 학비보조 등 탈북자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제도를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탈북자들은 여전히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인터뷰> 안찬일(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1979년 탈북) : “차이를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모든 탈북자들은 대접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무시당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일입니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하고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탈북자 정책과 함께 그들을 동반자로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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