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軍 패잔병 마을

입력 2012.12.09 (10:27) 수정 2012.12.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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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제 패잔병이 필리핀 등 동남아 밀림에 숨어살다가 몇 십년만에 발견됐다는 뉴스도 오래 전 있었는데요, 오늘은 장제스, 즉 장개석 총통이 이끌던 중국 국민당군의 패잔병들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 태국 땅까지 들어와 지금껏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예, 이 기구한 사연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홍군, 즉 중국 공산당군의 만5천 킬로미터, 옌안 대장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공산당군 대장정보다 더 긴 후퇴 장정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장제스 총통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패잔병도 있다는데요, 한재호 특파원이 이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가르는, 해발 천 500미터의 고산 마을. 굽은 길을 돌고 돌자 제법 큰 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메사롱 마을입니다.

길가에 토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가게마다 한자로 된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사는 곳이란 걸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중국도 아닌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이 첩첩산중까지 중국 사람들이 왜 들어와 모여 사는 것일까?

연유를 좇아보면 이들의 삶은 중국 현대사의 극적인 전환점과 맞물립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입니다.

이 중국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 50여년 전인 1959년부텁니다.

중국 국민당군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 쫒겨 미얀마 산악지대로 들어간 뒤 다시 태국땅으로 들어와 정착한 곳입니다.

홍군, 즉 중국 공산당군은 대장정 이후 세가 커졌고, 이에 국민당군의 93사단, 96사단이 패배하면서 중국 쿤밍에서 미얀마까지 고달픈 퇴주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이 가운데 일부가 다시 생존을 위해 50년 대 말 국경을 넘어 태국 치앙라이로 들어온 겁니다.

당시 태국으로 이주해 온 군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00명 정도만 생존해 있습니다.

올해 나이 아흔의 찐푸옌 할아버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살아온 시간들은 숱한 곡절과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여생,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들과 옛 얘기를 하고 증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지내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인터뷰> 푸옌(옛 중국 국민당군 병사) : "마오쩌둥 군이 우리를 계속 몰아부쳐 우리는 미얀마로 도망갔어요. 거기서 총을 고치라는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옛 기억에 가슴이 아려올 땐 산으로 사령관을 찾아갑니다.

자신들을 태국으로 이끌고 온 국민당 군 93사단장 돤시원 장군의 넋을 모신 사당입니다.

쟝제스 총통의 국민당군 최정예 부대장으로 전공도 많았지만 이젠 그 이름과 영정 사진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안내인은 당시 국민당 군 복장을 그대로 갖춰 입었습니다.

쫒겨와 타향에서 보낸 고통의 시간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풍토병에 죽어 나가는 전우들의 모습.

사령관 앞에 선 할아버지는 금새 감정에 복받칩니다.

<인터뷰> 첸더푸(옛 중국 국민당 군 병사) : "미얀마에서 메사롱까지 한 달을 걸어서 왔습니다. 담요도, 신발도 없었죠. 옷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시련속에서도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인 특유의 근면과 생존의 기질을 발휘했습니다.

산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녹차밭. 고산족인 아카족 아낙네들이 찻닢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1년 내내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이 녹차밭의 주인은 모두 중국 사람들입니다.

50년 전 국민당 군인들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땐 사방이 온통 산뿐이었습니다.

그런 땅을 개간해 녹차 밭을 만들었고 지금은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녹차 산지로 바꿔놨습니다.

이 차밭에 중국인들의 억척스런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초창기. 먹을 것이라고 해야 밥 한 사발에 채소국 한 그릇이 전부. 그것도 하루 2끼만 먹고 매일같이 연장을 들고 산으로 나갔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따로 없었습니다.

<인터뷰> 이 팡(중국인 거주민) :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됐죠. 재산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먹고 살려면 그렇게 해야됐어요."

녹차밭을 가꾸기 전 이들의 생존을 가능케 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이었습니다.

1960년 대 말까지 이 곳은 세계 최대 헤로인 생산지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잔당을 이끌고 정착한 돤시원 장군은 공산당과 싸우려면 마약을 재배해야 한다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이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은 건 태국 왕실의 로열 프로젝트. 태국은 무장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마약왕 쿤사와 전투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메사롱의 국민당 패잔병들이 태국군에 편입돼 쿤사를 몰아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인터뷰> 성롱창(돤시원 장군 묘역 안내인) : "아버지는 돤시원 장군의 부하로 마약 전쟁에서 태국군을 돕다 전투 중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국민당원들입니다."

이를 계기로 태국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태국 국적을 부여하며 살길을 열어줬습니다.

그게 바로 녹차밭입니다.

녹차밭엔 일년 내내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녹색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평온과 안정감이 찾아온다는 게 관광객들의 말입니다.

차까지 마시다 보면 많은 돈을 들여 이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토마스(스위스 관광객) : "나는 원래 차를 안 마셨는데, 이젠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메사롱 지역엔 그 동안 중국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자녀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기 좋다는 소문이 돌자 중국과 타이완에서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옵니다.

지금은 5천 명의 아주 큰 고산 마을로 변신했습니다.

메사롱 마을에 있는 중국인 가정은 약 6백 여 가구.

대부분이 자리를 잡아 살림이 넉넉합니다.

이따금 중국의 고향이 생각 나기도 한다지만 그렇다고 태국을 떠날 생각들은 없어 보입니다.

<인터뷰> 리칭퐁(국수가게 주인) : "메사롱 생활은 참 편하고 좋습니다. 복잡하지가 않아요. 일도 즐겁고, 잠도 잘 잡니다."

혹독한 시기를 거쳐온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역시 교육.

아이들의 장난 소리로 시끌벅적한 메사롱의 이 학교에선 중국인 초, 중, 고등학생 천 명이 공부합니다.

선대가 본토에서 쫒겨나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지난 역사를 특별히 강조하진 않습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고 시대도 너무 변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역시 대장정이니, 국공합작이니 하는 지난 역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인터뷰> 타우 푸 차오(중학생) :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 왜 모르죠? "배운 적이 없거든요."

메사롱의 모습은 분명 중국의 현대사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굴절된 이미집니다.

아직도 쟝제스 총통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패잔병들.

복잡하고 골치 아픈 과거를 알고 싶지 않다는 청소년들.

그 틈바구니에서 사상과 이념은 이미 지나간 20세기의 유물처럼 메사롱의 깊은 골짜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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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제스軍 패잔병 마을
    • 입력 2012-12-09 10:27:22
    • 수정2012-12-09 10:45:04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일제 패잔병이 필리핀 등 동남아 밀림에 숨어살다가 몇 십년만에 발견됐다는 뉴스도 오래 전 있었는데요, 오늘은 장제스, 즉 장개석 총통이 이끌던 중국 국민당군의 패잔병들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 태국 땅까지 들어와 지금껏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예, 이 기구한 사연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홍군, 즉 중국 공산당군의 만5천 킬로미터, 옌안 대장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공산당군 대장정보다 더 긴 후퇴 장정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장제스 총통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패잔병도 있다는데요, 한재호 특파원이 이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가르는, 해발 천 500미터의 고산 마을. 굽은 길을 돌고 돌자 제법 큰 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메사롱 마을입니다.

길가에 토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가게마다 한자로 된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사는 곳이란 걸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중국도 아닌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이 첩첩산중까지 중국 사람들이 왜 들어와 모여 사는 것일까?

연유를 좇아보면 이들의 삶은 중국 현대사의 극적인 전환점과 맞물립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입니다.

이 중국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 50여년 전인 1959년부텁니다.

중국 국민당군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 쫒겨 미얀마 산악지대로 들어간 뒤 다시 태국땅으로 들어와 정착한 곳입니다.

홍군, 즉 중국 공산당군은 대장정 이후 세가 커졌고, 이에 국민당군의 93사단, 96사단이 패배하면서 중국 쿤밍에서 미얀마까지 고달픈 퇴주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이 가운데 일부가 다시 생존을 위해 50년 대 말 국경을 넘어 태국 치앙라이로 들어온 겁니다.

당시 태국으로 이주해 온 군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00명 정도만 생존해 있습니다.

올해 나이 아흔의 찐푸옌 할아버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살아온 시간들은 숱한 곡절과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여생,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들과 옛 얘기를 하고 증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지내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인터뷰> 푸옌(옛 중국 국민당군 병사) : "마오쩌둥 군이 우리를 계속 몰아부쳐 우리는 미얀마로 도망갔어요. 거기서 총을 고치라는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옛 기억에 가슴이 아려올 땐 산으로 사령관을 찾아갑니다.

자신들을 태국으로 이끌고 온 국민당 군 93사단장 돤시원 장군의 넋을 모신 사당입니다.

쟝제스 총통의 국민당군 최정예 부대장으로 전공도 많았지만 이젠 그 이름과 영정 사진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안내인은 당시 국민당 군 복장을 그대로 갖춰 입었습니다.

쫒겨와 타향에서 보낸 고통의 시간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풍토병에 죽어 나가는 전우들의 모습.

사령관 앞에 선 할아버지는 금새 감정에 복받칩니다.

<인터뷰> 첸더푸(옛 중국 국민당 군 병사) : "미얀마에서 메사롱까지 한 달을 걸어서 왔습니다. 담요도, 신발도 없었죠. 옷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시련속에서도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인 특유의 근면과 생존의 기질을 발휘했습니다.

산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녹차밭. 고산족인 아카족 아낙네들이 찻닢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1년 내내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이 녹차밭의 주인은 모두 중국 사람들입니다.

50년 전 국민당 군인들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땐 사방이 온통 산뿐이었습니다.

그런 땅을 개간해 녹차 밭을 만들었고 지금은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녹차 산지로 바꿔놨습니다.

이 차밭에 중국인들의 억척스런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초창기. 먹을 것이라고 해야 밥 한 사발에 채소국 한 그릇이 전부. 그것도 하루 2끼만 먹고 매일같이 연장을 들고 산으로 나갔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따로 없었습니다.

<인터뷰> 이 팡(중국인 거주민) :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됐죠. 재산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먹고 살려면 그렇게 해야됐어요."

녹차밭을 가꾸기 전 이들의 생존을 가능케 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이었습니다.

1960년 대 말까지 이 곳은 세계 최대 헤로인 생산지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잔당을 이끌고 정착한 돤시원 장군은 공산당과 싸우려면 마약을 재배해야 한다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이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은 건 태국 왕실의 로열 프로젝트. 태국은 무장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마약왕 쿤사와 전투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메사롱의 국민당 패잔병들이 태국군에 편입돼 쿤사를 몰아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인터뷰> 성롱창(돤시원 장군 묘역 안내인) : "아버지는 돤시원 장군의 부하로 마약 전쟁에서 태국군을 돕다 전투 중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국민당원들입니다."

이를 계기로 태국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태국 국적을 부여하며 살길을 열어줬습니다.

그게 바로 녹차밭입니다.

녹차밭엔 일년 내내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녹색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평온과 안정감이 찾아온다는 게 관광객들의 말입니다.

차까지 마시다 보면 많은 돈을 들여 이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토마스(스위스 관광객) : "나는 원래 차를 안 마셨는데, 이젠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메사롱 지역엔 그 동안 중국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자녀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기 좋다는 소문이 돌자 중국과 타이완에서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옵니다.

지금은 5천 명의 아주 큰 고산 마을로 변신했습니다.

메사롱 마을에 있는 중국인 가정은 약 6백 여 가구.

대부분이 자리를 잡아 살림이 넉넉합니다.

이따금 중국의 고향이 생각 나기도 한다지만 그렇다고 태국을 떠날 생각들은 없어 보입니다.

<인터뷰> 리칭퐁(국수가게 주인) : "메사롱 생활은 참 편하고 좋습니다. 복잡하지가 않아요. 일도 즐겁고, 잠도 잘 잡니다."

혹독한 시기를 거쳐온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역시 교육.

아이들의 장난 소리로 시끌벅적한 메사롱의 이 학교에선 중국인 초, 중, 고등학생 천 명이 공부합니다.

선대가 본토에서 쫒겨나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지난 역사를 특별히 강조하진 않습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고 시대도 너무 변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역시 대장정이니, 국공합작이니 하는 지난 역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인터뷰> 타우 푸 차오(중학생) :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 왜 모르죠? "배운 적이 없거든요."

메사롱의 모습은 분명 중국의 현대사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굴절된 이미집니다.

아직도 쟝제스 총통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패잔병들.

복잡하고 골치 아픈 과거를 알고 싶지 않다는 청소년들.

그 틈바구니에서 사상과 이념은 이미 지나간 20세기의 유물처럼 메사롱의 깊은 골짜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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