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민족 갈등 부추기는 ‘역사교과서’

입력 2014.12.06 (08:21) 수정 2014.12.0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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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동유럽 보스니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데다 역사적으로도 민족간 종교간 갈등이 심했던 나라죠?

20년 전에는, 유고에서 독립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는 내전까지 벌어져 20여만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민족이나 종교별로 서로 다른 역사 교과서로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어서 내전은 끝났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연규선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정식 이름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동유럽의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엔 4개의 서로 다른 종교 사원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1899년 세워진 신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

성당을 지나면 16세기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눈에 띕니다.

유대교 회당은 모스크 왼편에 위치해 있고, 오른편에는 정교회 성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듯 이질적인 4개 종교의 예배당을 한 곳에 품고 있지만, 사라예보의 역사는 전쟁과 증오로 얼룩져 있습니다.

냉전 시대 때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였던, 사라예보는 소련 붕괴 이후 민족 간의 갈등에 휩싸이게 됩니다.

유고 연방 잔류냐, 독립이냐를 높고는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계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간, 종교간 분쟁으로 확대됩니다.

3년 이상 계속된 전쟁, 이른바 '인종 청소'로 불리는 학살극으로,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인터뷰> 하시시치(역사학자) : "내전 이후 (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다수인 서부와 이슬람계가 대다수인 동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국경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양측 간의 긴장감이 늘 존재합니다."

전쟁은 세 민족이 평화 공존했던 다문화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살아도 종교와 민족이 다른 이들과는 왕래도, 안부도 나누지 않고 있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수도원을 지키며 내전의 참상을 직접 목격해온 70대의 노 사제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스테판(신부) : "전쟁 전에는 종교와 민족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해요"

보스니아에서 현재, 세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곳은 교육 현장.

내전 이후 교육 정책은 각 지역의 자치 정부에 맡겨졌고, 물론 역사책도 지역 별로 다릅니다.

자기 민족 중심으로 자기 민족 입장에서 기술한 역사 교과서들, 상대 민족은 침략자로 자신들은 피해자로 묘사하기 일쑵니다.

<인터뷰> 샤미라(역사 교사) : “여러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대신, 교묘히 조작한 내용만 전달해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어요.“

편향된 역사 교육의 사례로 자주 지적되는 것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어났던 세르비아인 학살 사건.

'발칸의 아우슈비츠'로 불렸던 야세노바치 수용소에서는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학살과 고문이 자행됐습니다.

나치를 추종했던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지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고 않고 있습니다.

생존자 한 사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녹취> “사람들은 눈이 뽑혀졌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명씩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계가 다수인 지역에서 편찬된 역사교과서에는 이런 대규모 학살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통합된 역사가 아닌 개별 민족만의 조각난 과거.

각자의 민족적 정체성만 강조하다 보니 '증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터뷰> 비세르(중학교 3학년 학생) : "(역사 교과서)가 민족 간의 분쟁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어요. 민족 간의 여론을 나쁘게 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이용되는 것이죠."

세 민족으로 나눠져 있는 정치권의 갈등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민족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의 퇴행적 행동 때문입니다.

<인터뷰> 허시치(여성 역사학자) : "정치인들은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리에 앉아 중립적인 결정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기초한 다양한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 없이는 국민 통합은 물론 한 나라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란 인식입니다.

<인터뷰> 플리포비치(시민운동가) : “'잘못했다' 라고 말하는 게 바로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보스니아 국민들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기대합니다."

사라예보 북서쪽 야이체 마을.

이곳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계 민간인을 학살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크로아티아계인 호지 씨는 친척과 친구들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가슴 깊이 상처를 안고 있는 그는, 그러나 치유의 길은 과거에 있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미안하다며 아직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인터뷰> 호지(크로아티아 주민) : "젊은 세대를 위해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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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민족 갈등 부추기는 ‘역사교과서’
    • 입력 2014-12-06 08:43:55
    • 수정2014-12-06 09:54:23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동유럽 보스니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데다 역사적으로도 민족간 종교간 갈등이 심했던 나라죠?

20년 전에는, 유고에서 독립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는 내전까지 벌어져 20여만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민족이나 종교별로 서로 다른 역사 교과서로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어서 내전은 끝났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연규선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정식 이름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동유럽의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엔 4개의 서로 다른 종교 사원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1899년 세워진 신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

성당을 지나면 16세기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눈에 띕니다.

유대교 회당은 모스크 왼편에 위치해 있고, 오른편에는 정교회 성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듯 이질적인 4개 종교의 예배당을 한 곳에 품고 있지만, 사라예보의 역사는 전쟁과 증오로 얼룩져 있습니다.

냉전 시대 때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였던, 사라예보는 소련 붕괴 이후 민족 간의 갈등에 휩싸이게 됩니다.

유고 연방 잔류냐, 독립이냐를 높고는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계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간, 종교간 분쟁으로 확대됩니다.

3년 이상 계속된 전쟁, 이른바 '인종 청소'로 불리는 학살극으로,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인터뷰> 하시시치(역사학자) : "내전 이후 (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다수인 서부와 이슬람계가 대다수인 동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국경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양측 간의 긴장감이 늘 존재합니다."

전쟁은 세 민족이 평화 공존했던 다문화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살아도 종교와 민족이 다른 이들과는 왕래도, 안부도 나누지 않고 있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수도원을 지키며 내전의 참상을 직접 목격해온 70대의 노 사제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스테판(신부) : "전쟁 전에는 종교와 민족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해요"

보스니아에서 현재, 세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곳은 교육 현장.

내전 이후 교육 정책은 각 지역의 자치 정부에 맡겨졌고, 물론 역사책도 지역 별로 다릅니다.

자기 민족 중심으로 자기 민족 입장에서 기술한 역사 교과서들, 상대 민족은 침략자로 자신들은 피해자로 묘사하기 일쑵니다.

<인터뷰> 샤미라(역사 교사) : “여러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대신, 교묘히 조작한 내용만 전달해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어요.“

편향된 역사 교육의 사례로 자주 지적되는 것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어났던 세르비아인 학살 사건.

'발칸의 아우슈비츠'로 불렸던 야세노바치 수용소에서는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학살과 고문이 자행됐습니다.

나치를 추종했던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지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고 않고 있습니다.

생존자 한 사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녹취> “사람들은 눈이 뽑혀졌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명씩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계가 다수인 지역에서 편찬된 역사교과서에는 이런 대규모 학살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통합된 역사가 아닌 개별 민족만의 조각난 과거.

각자의 민족적 정체성만 강조하다 보니 '증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터뷰> 비세르(중학교 3학년 학생) : "(역사 교과서)가 민족 간의 분쟁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어요. 민족 간의 여론을 나쁘게 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이용되는 것이죠."

세 민족으로 나눠져 있는 정치권의 갈등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민족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의 퇴행적 행동 때문입니다.

<인터뷰> 허시치(여성 역사학자) : "정치인들은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리에 앉아 중립적인 결정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기초한 다양한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 없이는 국민 통합은 물론 한 나라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란 인식입니다.

<인터뷰> 플리포비치(시민운동가) : “'잘못했다' 라고 말하는 게 바로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보스니아 국민들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기대합니다."

사라예보 북서쪽 야이체 마을.

이곳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계 민간인을 학살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크로아티아계인 호지 씨는 친척과 친구들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가슴 깊이 상처를 안고 있는 그는, 그러나 치유의 길은 과거에 있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미안하다며 아직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인터뷰> 호지(크로아티아 주민) : "젊은 세대를 위해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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