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다시 15살로 돌아가면 여군이 되고 싶어요”

입력 2015.08.14 (16:02) 수정 2015.08.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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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할머니를 아시나요?
광복 70주년인 현재, 단 47분 남은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증언을 하고, '강제' 위안부라는 용어를 전파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국제법까지 공부한 정말 강인한 분이죠.
지난 12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91번째 정기수요시위에서는 만세를 외치다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이용수 할머니


그동안 두 차례, 이용수 할머니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서 증언을 하고 막 귀국하셨던 2007년에,
또 한 번은 그로부터 6년 여의 시간이 흐른 2013년에 뵈었는데요,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더욱 깊어진 할머니의 주름살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사죄'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죠, 이런 가운데 광복절을 앞두고
한 신문 1면에 실린 할머니의 소녀 시절 사진은 보는 사람을 무척 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용수이용수

이용수. [사진 출처: 8월 14일자 중앙일보 1면]


■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던 날 밤

두 번의 인터뷰 때마다 이용수 할머니는 손수 그림까지 그려가며 일본군에 끌려가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만큼 기억이 생생하다는 뜻이겠지요.

"하루는 엄마랑 누워 있는데 방에 작은 봉창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로 또래 여자 아이가 보여요. 쳐다보니까 손짓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잘 아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쑥 뜯으러 같이 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일어나 나갔더니 그 여자 아이가 내 어깨를 잡고, 군인들이 제 등 뒤에 뭐를 확 찌르면서 '가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끌려)나오면서 보니까 달이 굉장히 밝아요. 그렇게 조금 가니까 위에는 기차가 다니고 밑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는데 밑을 보니까 여자 셋하고 군인 하나가 있어요. '내려가자!' 그러길래 내려갔어요. 그랬더니 빨간 보자기로 싼 걸 주더라고요. 그래서 받아서 안고 있는데 근처 대구역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거기서 기차를 탔는데, 처음 타봐서 어지럽고 멀미가 나서 '난 안 간다, 저 사람 무섭다'고 하니까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그렇게 정신 없이 끌려 갔어요. 평양으로 가서, 거기서 또 다롄으로 저랑 언니들이랑 5명이 끌려 갔는데, 발이랑 손이랑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려서 도망치지도 못 했어요."

■ 군인 3백 명에 소녀 다섯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왜 끌려 가는지도 몰랐는데 다롄에 가니까 배가 죽 서있어요. 그런데 맨 끝에 배를 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타면 엄마한테 빨리 간다고. 그러면서 밀쳐 넣더니 해군이 한 300명 타요. 그리고는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는데 상하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일본 설이라고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위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어느 날은 배가 굉장히 흔들려서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있는데 일어나려고 하니까 군화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쳐다보니까 못 나가게 막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팔을 세게 물었어요. 그리고 뺨을 맞은 기억은 나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요. 다만 언니들이 와서 저를 끌고 가면서 "눈 뜨지 마라, 눈 뜨면 너 보고 또 달려든다. 죽은 척하고 있어라" 하면서 담요를 덮어 씌워주더라고요. 그런데 담요를 들추고 보니까 군인들이 막 언니들한테 달려들어요. 저는 장난하는 줄 알았어요. 지금 그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요. 어떻게 군인 300명이 타는데 여자 다섯을 태웁니까? 말도 못하죠."

할머니의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먹을 것도 없이 굶어 가며 도착한 육지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고, 맨 처음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때 일본군이 칼로 위협하고 전기 고문까지 가해 아직까지도 흉터와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정말 우연히 알게 되셨다는데,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을 한 곳은 타이완의 신죽이라는 곳이라더군요. 그곳에서 3년간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셨다고요.

■ 딸을 보고 '귀신'이라고 한 엄마

"1946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고 어머니가 '귀신'이라고 그러시더군요. 아버지는 외동딸을 그렇게 잃어버린 뒤 상처를 받아서 술만 드시다 중풍으로 돌아가셨고요. 이건 연극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제가 현실에서 당한 이야기예요. 일본은 저희 가족을 망쳐 놓았죠. 정말 너무 서러워요. 제가 이렇게 당했는데 세월은 해결도 못해주고, 제가 남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스스로 알려야 하잖아요."

■ 가장 아픈 기억을 꺼내고 또 꺼내야 하는 운명

아픈 상처에 딱지가 앉고 흉터만 남은 것처럼 이제는 하도 많이 이야기가 돼 특별히 새롭게 다가오지도 않지만 제일 처음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알리는데는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1946년에 나와서 1992년 6월 25일에 내가 신고를 했어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갔는데 가서 제가 이용수 아니라고 하고, '친구 이용수가 저 아래 있는데 대신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맨 처음에. 무섭고 부끄러워서요. 친구가 대신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한다고.......여러 사람들 앞에서 위안부 생활 증언을 한다는 게 참 부끄럽고 한데, 사람들이 그걸 듣고 눈물 흘리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사실 위안부 앞에 꼭 '강제'를 붙이자고 한 것도 제가 그런 거거든요. 일본에서 들은 말이 그냥 '위안부'라고 하면 우리가 스스로 군인을 따라다니며 즐겁게 해준 거라고, '강제' 위안부라고 해야 일본이 강제로 끌고 간 거다, 일본이 죄를 지은 게 되는 거다라고 해서 그렇다면 마땅히 '강제'라는 말이 꼭 붙어야 한다고 제가 그랬습니다.
사실 저는 성격이 참 온순했었습니다. 마음도 약하고 정도 많았는데, 정대협에 나가서 첫날부터 '사죄해라, 배상해라' 이것을 25년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질이 참 나빠졌어요. 그런 것도 저를 참 성나게 합니다. 좋은 방법으로 일본이 죄를 사과하고, 평화적으로 배상하겠다고 좋게 나왔으면 저도 안 그랬을 텐데 이렇게 외쳐야 하잖아요."

■ 86세에 꾸는 꿈

다행히 이용수 할머니는 아직 건강하십니다. 그러다보니 '200살까지 사시라'는 말씀을 자주 들으신다고요. 할머니 스스로도 건강이 허락되는 데에 참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신다고요,

"제가 일본한테 끌려가지 않고 평범한 가정에서 결혼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도 남한테 정을 줄 수 있고, 지금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고마움을 받고만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게 그렇게 괴로워요. 그래서 나도 남한테 고마움을 드리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택도 없는 상상을 해봐요. 저는 받는 것만 알았지 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용수 할머니가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저는 다시 15살로 돌아간다면 여군이 되고 싶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여군이 돼가지고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들에서 넘보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싶습니다. 여자라도 장성급이 돼가지고 우리나라를 버젓이 여성으로서 세웠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요. 여성으로서 장하게 우리나라를 지켰다고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요.

할머니의 가장 큰 바람은 물론, 하시라도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잘못했다'는 사죄를 받는 것일 겁니다.
그저 '시대가 낳은 비극적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이 분들의 못다 이룬 꿈, 돌아가시기 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짊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 2007년 내가 증언을 하는 이유



☞ 2013년 한번은 꼭 들어봐야 할, 이용수 할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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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다시 15살로 돌아가면 여군이 되고 싶어요”
    • 입력 2015-08-14 16:02:20
    • 수정2015-08-17 16:31:25
    취재후·사건후
이용수 할머니를 아시나요?
광복 70주년인 현재, 단 47분 남은 '강제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증언을 하고, '강제' 위안부라는 용어를 전파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국제법까지 공부한 정말 강인한 분이죠.
지난 12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91번째 정기수요시위에서는 만세를 외치다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


그동안 두 차례, 이용수 할머니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서 증언을 하고 막 귀국하셨던 2007년에,
또 한 번은 그로부터 6년 여의 시간이 흐른 2013년에 뵈었는데요,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더욱 깊어진 할머니의 주름살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사죄'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죠, 이런 가운데 광복절을 앞두고
한 신문 1면에 실린 할머니의 소녀 시절 사진은 보는 사람을 무척 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용수
이용수. [사진 출처: 8월 14일자 중앙일보 1면]


■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던 날 밤

두 번의 인터뷰 때마다 이용수 할머니는 손수 그림까지 그려가며 일본군에 끌려가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만큼 기억이 생생하다는 뜻이겠지요.

"하루는 엄마랑 누워 있는데 방에 작은 봉창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로 또래 여자 아이가 보여요. 쳐다보니까 손짓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잘 아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쑥 뜯으러 같이 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일어나 나갔더니 그 여자 아이가 내 어깨를 잡고, 군인들이 제 등 뒤에 뭐를 확 찌르면서 '가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끌려)나오면서 보니까 달이 굉장히 밝아요. 그렇게 조금 가니까 위에는 기차가 다니고 밑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는데 밑을 보니까 여자 셋하고 군인 하나가 있어요. '내려가자!' 그러길래 내려갔어요. 그랬더니 빨간 보자기로 싼 걸 주더라고요. 그래서 받아서 안고 있는데 근처 대구역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거기서 기차를 탔는데, 처음 타봐서 어지럽고 멀미가 나서 '난 안 간다, 저 사람 무섭다'고 하니까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그렇게 정신 없이 끌려 갔어요. 평양으로 가서, 거기서 또 다롄으로 저랑 언니들이랑 5명이 끌려 갔는데, 발이랑 손이랑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려서 도망치지도 못 했어요."

■ 군인 3백 명에 소녀 다섯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왜 끌려 가는지도 몰랐는데 다롄에 가니까 배가 죽 서있어요. 그런데 맨 끝에 배를 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타면 엄마한테 빨리 간다고. 그러면서 밀쳐 넣더니 해군이 한 300명 타요. 그리고는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는데 상하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일본 설이라고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위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어느 날은 배가 굉장히 흔들려서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있는데 일어나려고 하니까 군화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쳐다보니까 못 나가게 막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팔을 세게 물었어요. 그리고 뺨을 맞은 기억은 나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요. 다만 언니들이 와서 저를 끌고 가면서 "눈 뜨지 마라, 눈 뜨면 너 보고 또 달려든다. 죽은 척하고 있어라" 하면서 담요를 덮어 씌워주더라고요. 그런데 담요를 들추고 보니까 군인들이 막 언니들한테 달려들어요. 저는 장난하는 줄 알았어요. 지금 그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요. 어떻게 군인 300명이 타는데 여자 다섯을 태웁니까? 말도 못하죠."

할머니의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먹을 것도 없이 굶어 가며 도착한 육지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고, 맨 처음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때 일본군이 칼로 위협하고 전기 고문까지 가해 아직까지도 흉터와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정말 우연히 알게 되셨다는데,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을 한 곳은 타이완의 신죽이라는 곳이라더군요. 그곳에서 3년간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셨다고요.

■ 딸을 보고 '귀신'이라고 한 엄마

"1946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고 어머니가 '귀신'이라고 그러시더군요. 아버지는 외동딸을 그렇게 잃어버린 뒤 상처를 받아서 술만 드시다 중풍으로 돌아가셨고요. 이건 연극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제가 현실에서 당한 이야기예요. 일본은 저희 가족을 망쳐 놓았죠. 정말 너무 서러워요. 제가 이렇게 당했는데 세월은 해결도 못해주고, 제가 남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스스로 알려야 하잖아요."

■ 가장 아픈 기억을 꺼내고 또 꺼내야 하는 운명

아픈 상처에 딱지가 앉고 흉터만 남은 것처럼 이제는 하도 많이 이야기가 돼 특별히 새롭게 다가오지도 않지만 제일 처음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알리는데는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1946년에 나와서 1992년 6월 25일에 내가 신고를 했어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갔는데 가서 제가 이용수 아니라고 하고, '친구 이용수가 저 아래 있는데 대신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맨 처음에. 무섭고 부끄러워서요. 친구가 대신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한다고.......여러 사람들 앞에서 위안부 생활 증언을 한다는 게 참 부끄럽고 한데, 사람들이 그걸 듣고 눈물 흘리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사실 위안부 앞에 꼭 '강제'를 붙이자고 한 것도 제가 그런 거거든요. 일본에서 들은 말이 그냥 '위안부'라고 하면 우리가 스스로 군인을 따라다니며 즐겁게 해준 거라고, '강제' 위안부라고 해야 일본이 강제로 끌고 간 거다, 일본이 죄를 지은 게 되는 거다라고 해서 그렇다면 마땅히 '강제'라는 말이 꼭 붙어야 한다고 제가 그랬습니다.
사실 저는 성격이 참 온순했었습니다. 마음도 약하고 정도 많았는데, 정대협에 나가서 첫날부터 '사죄해라, 배상해라' 이것을 25년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질이 참 나빠졌어요. 그런 것도 저를 참 성나게 합니다. 좋은 방법으로 일본이 죄를 사과하고, 평화적으로 배상하겠다고 좋게 나왔으면 저도 안 그랬을 텐데 이렇게 외쳐야 하잖아요."

■ 86세에 꾸는 꿈

다행히 이용수 할머니는 아직 건강하십니다. 그러다보니 '200살까지 사시라'는 말씀을 자주 들으신다고요. 할머니 스스로도 건강이 허락되는 데에 참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신다고요,

"제가 일본한테 끌려가지 않고 평범한 가정에서 결혼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도 남한테 정을 줄 수 있고, 지금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고마움을 받고만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게 그렇게 괴로워요. 그래서 나도 남한테 고마움을 드리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택도 없는 상상을 해봐요. 저는 받는 것만 알았지 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용수 할머니가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저는 다시 15살로 돌아간다면 여군이 되고 싶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여군이 돼가지고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들에서 넘보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싶습니다. 여자라도 장성급이 돼가지고 우리나라를 버젓이 여성으로서 세웠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요. 여성으로서 장하게 우리나라를 지켰다고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요.

할머니의 가장 큰 바람은 물론, 하시라도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잘못했다'는 사죄를 받는 것일 겁니다.
그저 '시대가 낳은 비극적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이 분들의 못다 이룬 꿈, 돌아가시기 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짊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 2007년 내가 증언을 하는 이유



☞ 2013년 한번은 꼭 들어봐야 할, 이용수 할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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