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세계기록유산 등재

입력 2015.10.12 (17:49) 수정 2015.10.12 (22:1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음악 들리시죠.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방송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잘 아시다시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처음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진행자였던 분이죠.

유철종 박사 그리고 배진아 공주대 교수와 얘기 나눠보죠.

안녕하십니까?-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때가 방학 때였는지 제가 방송하시는 걸 봤어요, 집에서.

저희 어머니랑.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집에서 그걸 본 걸 보면 아마 여름에 하는데 저도 처음에 보면서 저분들은 진짜 슬픈 건가, 기쁜 건가.

제가 그 당시에 어려서.

그냥 감정의 표출이 여과없이 정말 북받친 설움이라고 그럴까 그런 게 터져나오는 걸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옆에서 진행하신 입장에서는 감회가 남다르셨을 거예요.

-제가 그때 50대예요.

-그러셨어요?

-50대인데 동안이라서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청 힘들었던 프로죠.

왜냐하면 갑자기 감정이 엄습을 하는데 저는 원래 울지는 않아요.

-울지 않으세요?

-워낙 슬픈 사연이 많아서 울지를 않았는데 그때 그 방송 때문에 굉장히 울었습니다.

울 적에 울음을 참으면 배 안이 아픈 것 아세요?

-네, 맞아요.

속으로.

-뱃가죽이 아파요, 참으면.

그걸 그때 처음 느꼈죠.

-정말 방송 진행 중에 펑펑 우실 수도 없고.

그 사연 하나하나가 다 절절했었죠?

-그때 그랬어요.

그래서 같이 방송하는 이지연 씨가 진행을 할 적에는 제가 좀 마음놓고 울 수가 있는데.

그래서 서로가 교대로 이렇게 할 때가 많았어요.

-눈물, 콧물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럼?

-그게 참 어려워요.

어떤 때는 웃는데도.

요즘 제가 방송을 봐요.

KBS에서 요새 잔치하는 바람에 나오는데 제가 이상하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이상한 소리도 나오고 그래요.

-울음을 참으시느라고 그런 소리가 났을 것 같아요.

-그때 50대셨군요.

저렇게 나와계신 분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서 아직은 찾지 못한 상황이니까.

-표정들이.

-긴장되어 있으세요.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저게 각본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각본이 전혀 없죠.

-이렇게 방송 프로그램이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적이 처음이라고요.

-방송 프로그램 자체가 등재된 것은 처음이고요.

방송 기록으로서는 두번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2011년에 베를린장벽 붕괴를 다뤘던 독일의 베를린 브란데부르크 방송기록 이게 첫번째고요.

저희가 이제 두번째인데요.

그런데 그때하고의 차이를 얘기를 한다면 그때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상이 되었던 반면에.

-그래서 방송이 남아 있었던 거군요.

-그 기록이라면 이건 KBS가 주도를 해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을 했고 그러면서 그 계기가 굉장히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같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이런 과정들이 프로그램 안에 다 담긴 것이죠.

그래서 그 프로그램 자체가 이제 그 문화유산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고요.

특히 앞으로도 이제 이런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에서 방송 콘텐츠가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장을 열었다.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여튼 조금 전에도 조금씩 맛보기로 보여드렸습니다마는 그 당시 뜨거웠던 방송 현장의 모습을 직접 다시 한 번 보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보여주시죠.

1983년이니까 30년이 넘었군요, 뜨거웠던 여름.

여의도 KBS 앞에 모인 저 인파를 보십시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분들 정말 부둥켜 안다가 저렇게 넘어지기까지 합니다.

유철종 선생님께서 인터뷰하시는 장면도 나오네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안순아?

-엄마 안 죽었네, 그래도.

-엄마 안 죽었는데 왜 이렇게 안 와?-나 엄마 죽은 줄 알았다.

-닮으셨어요.

역시.

-혈육의 정에 대한 그리움은 만나는 순간 더 사무치게 다가오죠.

-엄마 돌아가셨어?그럼 오빠는 어디 있니?

-가족을 찾는 애타는 사연들이 이렇게 KBS의 벽과 바닥까지 뒤덮었습니다.

수만장의 사이에서 기적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먼저 붙였는데 어떤 분이 떼는 거예요, 제 것을.

서로 만나서 대조를 해 보니가 똑같아요,틀림없어요.

-처음에는 95분 일회성 방송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다음 날부터 밀물처럼 밀려든 이산가족의 사연으로 이 방송은 무려 138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요즘 KBS 본관에 오시면 이렇게 이산가족 방송했던 그대로 재현해 놨어요, 벽보도 붙여놓고요.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일입니다.

저는 화면만 봐도 이렇게 눈물이 나서 정말 진행자로서는 곤혹스러운 방송이 아니었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저렇게 붙여놓을 줄 몰랐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찾아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오실 줄 상상도 못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첫날 밀려오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이렇게 오시지.

어떻게들 왔어, 밤늦게 어떻게 오셨을까 이러면서 그게.

-연장되기 시작한 거죠?

-일종의 뭐라 그럴까요.

저희가 무의식 상태라고 할까요?최면에서는 최면술에 걸렸다는 말 쓰잖아요.

그런 심리상태.

뭔가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냥 열기 속에서 정신없이 그냥 같이 몇 개월을 같이 생활했어요.

-138일 동안이나 하셨다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할 계획이었어요?

-처음에는 하루죠.

-하루.

그다음에 조금 늘어났죠.

-그다음 날 하면 또 어떻게 되겠지.

-한 번 더.

-어떻게 되겠지, 어떻게 끝나겠지.

신청자가 이제 안 오시겠지.

이런 기대하면서 석 달 넘게 가는 거죠.

-그래도, 그래도 또 밀려드는 사연들을 어떻게든지 소화를 조금씩 해 보자 어떻게 보면 그런 생각으로 하신 게 100일이 넘는 대장정이 된 거죠.

-KBS 전체의 직원들이 어떤 수입이라든가 자기의.

왜 우리 노동을 하게 되면 수당을 받아야 되고 그런 관념 다 어디로 가버린 거예요.

그냥 전체가 그냥 심신이 다 여기 집어던져서 환자도 많이 나왔어요.

-당시 출연료도 하나도 못 받으셨다면서요.

-못 받은 게 아니라 원래 1시간이죠.

1시간 출연료만 받는 거예요.

저는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수당으로 받아야 되는데 애국심으로 하라.

-다들 가족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 거 생각도 안 하고.

-다 가족가족마다 사연이 있지만 그래도 혹시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참 기억에 남는다는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분 한 분이 그렇게 지금도 생각이 나요.

할아버지인데 헤어지셔서 다시 결혼을 하셔서 자녀가 다 있으신데 부인을 찾은 거예요.

그런데 먼저 부인한테서 자녀가 또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부인도 또 남편을 찾았어요.

찾아서 오셔서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이게 막 맞추려고 애를 쓰죠.

맞냐, 안 맞냐 이러다가 그때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맞다가 됐는데 이제 거기서 아이쿠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결혼을 하셔서 자녀가 있고 먼저 부인은 재가하지 않고.

-기다리고.

-그냥 자녀들을 키우셨어요.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 표정을 보니까 그 감정 이입이 돼요.

얼마나 난처하실까.

나중에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업고 그 스튜디오에서 이렇게 막 뺑뺑 도셨어요, 이렇게.

그런데 그걸 보면서 이게 참 이산가족이라는 문제가 이게 그렇게.

-남북분단이 개인의 가정사를 휘저어놓고 폭풍처럼 지나간 거죠.

그런데 지금 이제 이산가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걸 계기로 사실 어떻게 보면 KBS만이 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KBS의 공적책무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사실 더 커졌어요.

우리가 어떤, KBS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주문하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고요.

▼ 앞으로 KBS가 수행해야 할 책무는? ▼

-KBS에 대한 주문이요?사실은 이게 어떻게 보면 공영방송 KBS가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반드시 했어야만 하는 일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고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수신료에 의해서 운영되는 그런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던 그런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오늘날에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어떤 매체의 영향력이 굉장히 컸고 KBS가 방송의 중심으로서 전국민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지금 2015년에는 또 많은 매체들이 등장을 했고 매체 환경이 변화했잖아요.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KBS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를 좀 더 깊이 있게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주신 말씀 잘 명심하고요.

KBS가 과연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고요.

시사진단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세계기록유산 등재
    • 입력 2015-10-12 18:37:24
    • 수정2015-10-12 22:16:35
    시사진단
-지금 음악 들리시죠.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방송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잘 아시다시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처음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진행자였던 분이죠.

유철종 박사 그리고 배진아 공주대 교수와 얘기 나눠보죠.

안녕하십니까?-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때가 방학 때였는지 제가 방송하시는 걸 봤어요, 집에서.

저희 어머니랑.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집에서 그걸 본 걸 보면 아마 여름에 하는데 저도 처음에 보면서 저분들은 진짜 슬픈 건가, 기쁜 건가.

제가 그 당시에 어려서.

그냥 감정의 표출이 여과없이 정말 북받친 설움이라고 그럴까 그런 게 터져나오는 걸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옆에서 진행하신 입장에서는 감회가 남다르셨을 거예요.

-제가 그때 50대예요.

-그러셨어요?

-50대인데 동안이라서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청 힘들었던 프로죠.

왜냐하면 갑자기 감정이 엄습을 하는데 저는 원래 울지는 않아요.

-울지 않으세요?

-워낙 슬픈 사연이 많아서 울지를 않았는데 그때 그 방송 때문에 굉장히 울었습니다.

울 적에 울음을 참으면 배 안이 아픈 것 아세요?

-네, 맞아요.

속으로.

-뱃가죽이 아파요, 참으면.

그걸 그때 처음 느꼈죠.

-정말 방송 진행 중에 펑펑 우실 수도 없고.

그 사연 하나하나가 다 절절했었죠?

-그때 그랬어요.

그래서 같이 방송하는 이지연 씨가 진행을 할 적에는 제가 좀 마음놓고 울 수가 있는데.

그래서 서로가 교대로 이렇게 할 때가 많았어요.

-눈물, 콧물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럼?

-그게 참 어려워요.

어떤 때는 웃는데도.

요즘 제가 방송을 봐요.

KBS에서 요새 잔치하는 바람에 나오는데 제가 이상하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이상한 소리도 나오고 그래요.

-울음을 참으시느라고 그런 소리가 났을 것 같아요.

-그때 50대셨군요.

저렇게 나와계신 분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서 아직은 찾지 못한 상황이니까.

-표정들이.

-긴장되어 있으세요.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저게 각본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각본이 전혀 없죠.

-이렇게 방송 프로그램이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적이 처음이라고요.

-방송 프로그램 자체가 등재된 것은 처음이고요.

방송 기록으로서는 두번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2011년에 베를린장벽 붕괴를 다뤘던 독일의 베를린 브란데부르크 방송기록 이게 첫번째고요.

저희가 이제 두번째인데요.

그런데 그때하고의 차이를 얘기를 한다면 그때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상이 되었던 반면에.

-그래서 방송이 남아 있었던 거군요.

-그 기록이라면 이건 KBS가 주도를 해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을 했고 그러면서 그 계기가 굉장히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같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이런 과정들이 프로그램 안에 다 담긴 것이죠.

그래서 그 프로그램 자체가 이제 그 문화유산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고요.

특히 앞으로도 이제 이런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에서 방송 콘텐츠가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장을 열었다.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여튼 조금 전에도 조금씩 맛보기로 보여드렸습니다마는 그 당시 뜨거웠던 방송 현장의 모습을 직접 다시 한 번 보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보여주시죠.

1983년이니까 30년이 넘었군요, 뜨거웠던 여름.

여의도 KBS 앞에 모인 저 인파를 보십시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분들 정말 부둥켜 안다가 저렇게 넘어지기까지 합니다.

유철종 선생님께서 인터뷰하시는 장면도 나오네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안순아?

-엄마 안 죽었네, 그래도.

-엄마 안 죽었는데 왜 이렇게 안 와?-나 엄마 죽은 줄 알았다.

-닮으셨어요.

역시.

-혈육의 정에 대한 그리움은 만나는 순간 더 사무치게 다가오죠.

-엄마 돌아가셨어?그럼 오빠는 어디 있니?

-가족을 찾는 애타는 사연들이 이렇게 KBS의 벽과 바닥까지 뒤덮었습니다.

수만장의 사이에서 기적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먼저 붙였는데 어떤 분이 떼는 거예요, 제 것을.

서로 만나서 대조를 해 보니가 똑같아요,틀림없어요.

-처음에는 95분 일회성 방송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다음 날부터 밀물처럼 밀려든 이산가족의 사연으로 이 방송은 무려 138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요즘 KBS 본관에 오시면 이렇게 이산가족 방송했던 그대로 재현해 놨어요, 벽보도 붙여놓고요.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일입니다.

저는 화면만 봐도 이렇게 눈물이 나서 정말 진행자로서는 곤혹스러운 방송이 아니었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저렇게 붙여놓을 줄 몰랐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찾아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오실 줄 상상도 못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첫날 밀려오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이렇게 오시지.

어떻게들 왔어, 밤늦게 어떻게 오셨을까 이러면서 그게.

-연장되기 시작한 거죠?

-일종의 뭐라 그럴까요.

저희가 무의식 상태라고 할까요?최면에서는 최면술에 걸렸다는 말 쓰잖아요.

그런 심리상태.

뭔가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냥 열기 속에서 정신없이 그냥 같이 몇 개월을 같이 생활했어요.

-138일 동안이나 하셨다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할 계획이었어요?

-처음에는 하루죠.

-하루.

그다음에 조금 늘어났죠.

-그다음 날 하면 또 어떻게 되겠지.

-한 번 더.

-어떻게 되겠지, 어떻게 끝나겠지.

신청자가 이제 안 오시겠지.

이런 기대하면서 석 달 넘게 가는 거죠.

-그래도, 그래도 또 밀려드는 사연들을 어떻게든지 소화를 조금씩 해 보자 어떻게 보면 그런 생각으로 하신 게 100일이 넘는 대장정이 된 거죠.

-KBS 전체의 직원들이 어떤 수입이라든가 자기의.

왜 우리 노동을 하게 되면 수당을 받아야 되고 그런 관념 다 어디로 가버린 거예요.

그냥 전체가 그냥 심신이 다 여기 집어던져서 환자도 많이 나왔어요.

-당시 출연료도 하나도 못 받으셨다면서요.

-못 받은 게 아니라 원래 1시간이죠.

1시간 출연료만 받는 거예요.

저는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수당으로 받아야 되는데 애국심으로 하라.

-다들 가족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 거 생각도 안 하고.

-다 가족가족마다 사연이 있지만 그래도 혹시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참 기억에 남는다는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분 한 분이 그렇게 지금도 생각이 나요.

할아버지인데 헤어지셔서 다시 결혼을 하셔서 자녀가 다 있으신데 부인을 찾은 거예요.

그런데 먼저 부인한테서 자녀가 또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부인도 또 남편을 찾았어요.

찾아서 오셔서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이게 막 맞추려고 애를 쓰죠.

맞냐, 안 맞냐 이러다가 그때 아주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맞다가 됐는데 이제 거기서 아이쿠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결혼을 하셔서 자녀가 있고 먼저 부인은 재가하지 않고.

-기다리고.

-그냥 자녀들을 키우셨어요.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 표정을 보니까 그 감정 이입이 돼요.

얼마나 난처하실까.

나중에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업고 그 스튜디오에서 이렇게 막 뺑뺑 도셨어요, 이렇게.

그런데 그걸 보면서 이게 참 이산가족이라는 문제가 이게 그렇게.

-남북분단이 개인의 가정사를 휘저어놓고 폭풍처럼 지나간 거죠.

그런데 지금 이제 이산가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걸 계기로 사실 어떻게 보면 KBS만이 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KBS의 공적책무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사실 더 커졌어요.

우리가 어떤, KBS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주문하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고요.

▼ 앞으로 KBS가 수행해야 할 책무는? ▼

-KBS에 대한 주문이요?사실은 이게 어떻게 보면 공영방송 KBS가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반드시 했어야만 하는 일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고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수신료에 의해서 운영되는 그런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던 그런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오늘날에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어떤 매체의 영향력이 굉장히 컸고 KBS가 방송의 중심으로서 전국민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지금 2015년에는 또 많은 매체들이 등장을 했고 매체 환경이 변화했잖아요.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KBS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를 좀 더 깊이 있게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주신 말씀 잘 명심하고요.

KBS가 과연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고요.

시사진단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