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재구성④] 트럼프식 계산법

입력 2019.04.16 (11:48) 수정 2019.04.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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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회담에 대한 김정은의 첫 육성이 나왔다. 키워드는 ‘미국 계산법’이다.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최선희 부상이 기자회견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던 그 ‘미국식 계산법’이다.

“이번에 제가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에서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좀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노이 회담장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에 건넨 종이에 적혀 있다는 ‘미국 계산법’,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다. 북한이 비핵화하고 나야 미국이 제재를 풀어준다는 것이다. 평소 북한의 거친 어법으로 보자면 ‘강도 같은 요구’라 부를 만도 한데, 점잖게 ‘미국 계산법’이라 말한다.

실제로 북한은 ‘강도적인 요구’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인 지난해 7월 폼페이오가 방북했을 때였다. 당시 폼페이오가 전한 입장은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였다. ‘비핵화’ 대상엔 핵무기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못 박았다. 김영철 앞에서 이 얘기를 꺼낸 폼페이오는 김정은을 만나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는 폼페이오의 뒤통수에다 대고 북한 외무성이 쏘아붙인 담화가 ‘강도적인 요구’였다. 북한은 그때도 황당해 했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하자면 이 정도 될 것이다. ‘이거 실화냐? 어디서 약을 팔아? 가서 형아 데려와.’

그리고 7달이 흘러 하노이 회담이 열렸다. 회담 결렬 직후 북한은 또다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폼페이오가 그냥 흥정용으로 던진 말인 줄 알았는데, 트럼프와 협상하면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그게 에누리 없는 ‘트럼프의’ 요구라는 게 명확해진 것이다. 북한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강도적인 요구’를 한 사람은 분명 ‘트럼프’다.

트럼프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은의 3차 정상회담 언급에 화답한 트럼프의 트윗에 이런 분위기가 묻어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여전히 아주 좋다는 북한 김정은에 동의한다. 훌륭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입장이 어떤지 완전히 이해했으니까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데도 동의한다.”

[트위터] https://twitter.com/realDonaldTrump/status/1117033379776667648

트럼프의 트윗치고는 점잖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이 어떤지 완전히(fully) 이해했으니까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란 말에는 뼈가 있다. 그전까지는 북한이 트럼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많이 놀랐지?’

북한은 왜 강도 같은 요구라고 할까?

북한의 입장은 상식적인 측면이 있다. 북한 것은 당장, 게다가 몽땅 넘겨야 하고 미국 것은 나중에 천천히 준다고 한다. 북한 입장에선 목숨이 걸린 핵인데, 뭘 믿고 당장, 몽땅 넘기겠는가? 하노이 회담 직후 리용호 외상의 발언에서 황당함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조미 양국 사이의 현 신뢰 수준을 놓고 볼 때 현 단계에 우리가 내 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입니다.”


이 발언을 듣고 놀랐다. 세계적인 북한핵 전문가 지크프리트 헤커(Siegfried Hecker) 박사가 KBS <시사기획 창> 인터뷰에서 했던 조언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북한이 헤커 박사의 조언을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공개된 조언이므로 참고는 했을 수 있다.

[동영상]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11791

헤커 박사의 조언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북미 간의 현재 신뢰 수준에선 북한은 핵시설 리스트를 미국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게 ‘여기를 폭격하세요’라고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에 리스트를 주고 나서 협상을 진행하다가 중간에 결렬이라도 되면? 미국은 핵 리스트를 그대로 갖게 된다. ‘핵 리스트’는 ‘폭격 표적 리스트’가 된다. 미국은 풀어줬던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다. 북한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북한 입장에선 말 그대로 ‘강도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북미가 하나씩 주고받기를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는 게 헤커의 조언이다.

트럼프는 강도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걸까?

헤커의 조언은 완벽해 보이지만 트럼프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헤커의 방식대로 하면, 북한 비핵화는 10년이 걸린다. 어쩌면 1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기술적으로만 그렇다. 정치적인 암초들이 나타나면 20년이 걸릴지 3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북미 양측과 한국,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가 완벽하게 손발을 맞춰 진행한다 해도 빨라야 2년에서 5년이다.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헤커의 설명 한 대목을 들어보자. 지난 200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알 키바르(Al Kibar)를 폭격했다. 이곳에 흑연감속 원자로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핵 개발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기습한 것이다. 그런데 시리아는 이 핵연료를 어디서 구했을까? 국제사회는 북한을 지목한다. 물론 북한은 부인할 것이다.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되면 이 핵물질이 정말 북한에서 온 건지, 왔다면 얼마나 왔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서 생산된 건지, 북한에 기록은 남아 있는지 일일이 맞춰봐야 한다. 12년 전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시리아 원자로를 샅샅이 뒤져서 숫자들을 깨알같이 맞춰봐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런 암초들이 몇 개나 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비핵화를 위한 절차와 과정을 정교한 로드맵으로 합의해 놓으면 좀 나아질까?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문관을 지낸 버지니아 대학의 필립 젤리코(Philip D. Zelikow) 교수는 지난 30년간 북한 비핵화가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로 로드맵을 지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클린턴 시절인 1994년 제네바 합의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진행하고, 미국은 경수로를 지어주고, 경수로가 완성될 때까지 대체에너지로 중유를 제공한다는 로드맵이었다. 그럴듯해 보였지만 유가 상승 등을 이유로 미국의 중유 제공 약속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9·11 테러가 일어났다.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했다. 북한은 흑연감속로를 재가동했고 미국은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로드맵의 단계들 하나하나가 폭탄이 될 수 있다. 10년, 20년이면 정권교체 등 이런저런 이유들이 생겨난다. 어디서 터져도 터지기 마련이다.

이런 스몰딜을 트럼프가 받을 수 있겠는가? 내년이면 재선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올 하반기면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를 텐데,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한 끼 잘 먹자고 지금 이 고생을 하면서 밥상을 차리겠는가? 중간에 엎어질지도 모르는 밥상을? 나중에 누가 먹게 될지도 모르는 밥상을? 트럼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트럼프라면 빅딜

트럼프가 이른바 스몰딜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내정치이다. 지난 번 기사에서도 썼지만 트럼프한테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

[연관 기사] [트럼프의 재구성③] 볼턴, 이 남자가 사는 법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을 한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이란 핵협상을 파기했다. 당시엔 오바마가 해놓은 것들은 무조건 지워버린다는 ‘Anything but Obama’라고 말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트럼프가 오바마를 비난하는 핵심은 이란에게 돈을 갖다 바친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오바마처럼 선물이나 주고 환심을 사는 한심한 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러니까 이게 트럼프가 보는 최저점이다. 북한 핵협상이 이란 핵협상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아 보인다면 트럼프 입장에선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오바마와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북한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을 거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암시해왔다. 며칠 전 트윗이 그렇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리더십 아래 대단한 성장과 경제적 성공, 부를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나는 곧 다가올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핵무기와 제제가 없어지는 그 날을. 그리고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라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부자 되세요’라고 하는데, 어디에도 보태주겠다는 말은 없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되라는 말이다. 트럼프의 일관된 입장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전인 지난해 5월, 카다피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리비아 모델’은 북한과는 정반대라면서 ‘남한 모델(South Korean Model)’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김정은의 나라는 아주 부자가 될 겁니다. 국민들은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남한을 보세요. 이것은 ‘남한’ 모델입니다. 근면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는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또 카다피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뚱딴지처럼 돈 이야기를 꺼낸다. 좀 길지만 옮겨본다.

“우리는 카다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어. 군사력을 강화시켜주겠어. 우리가 다 해 줄게’ 우리가 개입해서 내전으로 붕괴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서도 똑같이 했어요. 글쎄, 우리가 그랬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요. 제 말씀은, 저는 처음부터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을 보세요. 우리는 7조 달러를 썼어요. 믿어집니까? 중동에 7조 달러를 썼어요. 돈을 그냥 창밖으로 내다 버린 거죠. 중동에서 사회간접자본을 지어줬고 공항 같은 것들도 지어줬어요. 우리는 중동에 7조 달러를 썼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남은 게 뭡니까? 슬프죠. 카다피의 모델을 보면요, 완전히 내전모델입니다. 우리가 개입해서 날린 거죠. 그 모델이 일어날 수도 있죠, 우리가 딜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딜을 성사시킨다면 제 생각엔 김정은은 아주 아주 행복할 겁니다. 정말 아주 행복할 거라 믿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이해가 편할 것 같다. 만약 트럼프가 그리고 있는 빅딜이 성사된다면 트럼프는 어떤 자랑을 하고 다닐까? 아마 이럴 것이다.

이란에 돈이나 갖다 바치고 비핵화를 구걸하는 오바마는 정말 한심해. 돈을 창밖에 내다 버린 꼴이지. 북한에 땡전 한 푼 안 주고 미국 본토를 위협하던 핵 위협을 일거에 없애버린 나 트럼프야말로 진정한 ‘협상의 달인’이야.

이런 말들은 트럼프의 지지층에게, 혹은 잠재적 지지층에게 잘 먹히는 말들이다. 지난 기사에서 썼지만, ‘협상의 달인’ 이미지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었다. 단순히 업적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달인 인증’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표가 따라온다.

[연관 기사] [트럼프의 재구성①] 트럼프는 정말로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을까?

물론 트럼프가 그런 자랑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베트남을 보면, 미국이 땡전 한 푼 안 줬는데 경제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트럼프식으로 말하면 ‘남한 모델’이다. 관계를 정상화하고 제재를 해제하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아주 큰 것을 주는 것이다. 김정은 역시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은 딜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은 빅딜을 받을 수 있을까?

남은 문제는 ‘김정은이 트럼프의 빅딜을 받을 수 있느냐?’다. 헤커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협상이 중간에 어그러질 경우 미국의 폭격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CBS Face the Nation의 마가렛 브레넌 앵커가 볼턴에게 물었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실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생각에는 김정은은 북한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이고 그가 비핵화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한다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한 건 트럼프가 이 부분에서 김정은을 안심시키려고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다피에겐 체제보장을 약속해준 적이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김정은에게는 체제보장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이 그렇다.

“카다피를 지켜주겠다는 합의는 없었죠. 리비아 모델은 아주 다른 협상이었습니다. 김정은의 경우는 그 자리에 있을 거고, 자기 나라에 있게 될 거고, 그 나라를 운영하게 될 겁니다. 그의 나라는 아주 부유해질 겁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니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트럼프는 김정은의 체제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열을 올린다. 당장 몽땅 내놓으면 미국 대통령인 내가 책임지고 보장해주겠다는 말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기아의 고르디움에 도착했을 때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있었다. 신탁에 따르면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고 했다. 풀어 보려다가 실패한 알렉산더는 칼을 뽑아들더니 매듭을 잘라버렸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북한 핵문제는 난마처럼 엉키기만 했다. 위기가 터지고 합의로 겨우 봉합되고 또 파기되기를 반복하면서 꼬일 대로 꼬여버린 북핵의 실타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닮았다.

트럼프가 알렉산더 대왕급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비핵화의 실타래는 이제 잘라버리는 것 말고는 풀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풀어서 해결하려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을,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를 일을, 앞으로 어느 미국 대통령이 풀겠다고 달려들까? 칼로 싹둑 잘라서라도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그동안 트럼프가 해놓은 일들이 그렇듯, 비핵화로 가는 길은 깎아놓은 듯이 반듯한 길이거나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길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우여곡절과 좌충우돌, 야단법석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또다시 밀고 당기기에 돌입했다. 속 시원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험악했던 재작년을 떠올려보면 희망을 가질 이유는 있다. 이 사람들은 '당신과 대화하고 싶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사람들이다.

‘꼬마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늙다리 미치광이와 꼬마 로켓맨이 어떻게든 잘 좀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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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의 재구성④] 트럼프식 계산법
    • 입력 2019-04-16 11:48:23
    • 수정2019-04-16 11:55:03
    취재K
하노이 회담에 대한 김정은의 첫 육성이 나왔다. 키워드는 ‘미국 계산법’이다.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최선희 부상이 기자회견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던 그 ‘미국식 계산법’이다.

“이번에 제가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에서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좀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노이 회담장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에 건넨 종이에 적혀 있다는 ‘미국 계산법’,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다. 북한이 비핵화하고 나야 미국이 제재를 풀어준다는 것이다. 평소 북한의 거친 어법으로 보자면 ‘강도 같은 요구’라 부를 만도 한데, 점잖게 ‘미국 계산법’이라 말한다.

실제로 북한은 ‘강도적인 요구’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인 지난해 7월 폼페이오가 방북했을 때였다. 당시 폼페이오가 전한 입장은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였다. ‘비핵화’ 대상엔 핵무기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못 박았다. 김영철 앞에서 이 얘기를 꺼낸 폼페이오는 김정은을 만나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는 폼페이오의 뒤통수에다 대고 북한 외무성이 쏘아붙인 담화가 ‘강도적인 요구’였다. 북한은 그때도 황당해 했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하자면 이 정도 될 것이다. ‘이거 실화냐? 어디서 약을 팔아? 가서 형아 데려와.’

그리고 7달이 흘러 하노이 회담이 열렸다. 회담 결렬 직후 북한은 또다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폼페이오가 그냥 흥정용으로 던진 말인 줄 알았는데, 트럼프와 협상하면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그게 에누리 없는 ‘트럼프의’ 요구라는 게 명확해진 것이다. 북한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강도적인 요구’를 한 사람은 분명 ‘트럼프’다.

트럼프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은의 3차 정상회담 언급에 화답한 트럼프의 트윗에 이런 분위기가 묻어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여전히 아주 좋다는 북한 김정은에 동의한다. 훌륭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입장이 어떤지 완전히 이해했으니까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데도 동의한다.”

[트위터] https://twitter.com/realDonaldTrump/status/1117033379776667648

트럼프의 트윗치고는 점잖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이 어떤지 완전히(fully) 이해했으니까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란 말에는 뼈가 있다. 그전까지는 북한이 트럼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많이 놀랐지?’

북한은 왜 강도 같은 요구라고 할까?

북한의 입장은 상식적인 측면이 있다. 북한 것은 당장, 게다가 몽땅 넘겨야 하고 미국 것은 나중에 천천히 준다고 한다. 북한 입장에선 목숨이 걸린 핵인데, 뭘 믿고 당장, 몽땅 넘기겠는가? 하노이 회담 직후 리용호 외상의 발언에서 황당함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조미 양국 사이의 현 신뢰 수준을 놓고 볼 때 현 단계에 우리가 내 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입니다.”


이 발언을 듣고 놀랐다. 세계적인 북한핵 전문가 지크프리트 헤커(Siegfried Hecker) 박사가 KBS <시사기획 창> 인터뷰에서 했던 조언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북한이 헤커 박사의 조언을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공개된 조언이므로 참고는 했을 수 있다.

[동영상]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11791

헤커 박사의 조언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북미 간의 현재 신뢰 수준에선 북한은 핵시설 리스트를 미국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게 ‘여기를 폭격하세요’라고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에 리스트를 주고 나서 협상을 진행하다가 중간에 결렬이라도 되면? 미국은 핵 리스트를 그대로 갖게 된다. ‘핵 리스트’는 ‘폭격 표적 리스트’가 된다. 미국은 풀어줬던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다. 북한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북한 입장에선 말 그대로 ‘강도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북미가 하나씩 주고받기를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는 게 헤커의 조언이다.

트럼프는 강도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걸까?

헤커의 조언은 완벽해 보이지만 트럼프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헤커의 방식대로 하면, 북한 비핵화는 10년이 걸린다. 어쩌면 1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기술적으로만 그렇다. 정치적인 암초들이 나타나면 20년이 걸릴지 3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북미 양측과 한국,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가 완벽하게 손발을 맞춰 진행한다 해도 빨라야 2년에서 5년이다.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헤커의 설명 한 대목을 들어보자. 지난 200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알 키바르(Al Kibar)를 폭격했다. 이곳에 흑연감속 원자로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핵 개발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기습한 것이다. 그런데 시리아는 이 핵연료를 어디서 구했을까? 국제사회는 북한을 지목한다. 물론 북한은 부인할 것이다.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되면 이 핵물질이 정말 북한에서 온 건지, 왔다면 얼마나 왔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서 생산된 건지, 북한에 기록은 남아 있는지 일일이 맞춰봐야 한다. 12년 전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시리아 원자로를 샅샅이 뒤져서 숫자들을 깨알같이 맞춰봐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런 암초들이 몇 개나 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비핵화를 위한 절차와 과정을 정교한 로드맵으로 합의해 놓으면 좀 나아질까?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문관을 지낸 버지니아 대학의 필립 젤리코(Philip D. Zelikow) 교수는 지난 30년간 북한 비핵화가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로 로드맵을 지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클린턴 시절인 1994년 제네바 합의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진행하고, 미국은 경수로를 지어주고, 경수로가 완성될 때까지 대체에너지로 중유를 제공한다는 로드맵이었다. 그럴듯해 보였지만 유가 상승 등을 이유로 미국의 중유 제공 약속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9·11 테러가 일어났다.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정했다. 북한은 흑연감속로를 재가동했고 미국은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로드맵의 단계들 하나하나가 폭탄이 될 수 있다. 10년, 20년이면 정권교체 등 이런저런 이유들이 생겨난다. 어디서 터져도 터지기 마련이다.

이런 스몰딜을 트럼프가 받을 수 있겠는가? 내년이면 재선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올 하반기면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를 텐데,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한 끼 잘 먹자고 지금 이 고생을 하면서 밥상을 차리겠는가? 중간에 엎어질지도 모르는 밥상을? 나중에 누가 먹게 될지도 모르는 밥상을? 트럼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트럼프라면 빅딜

트럼프가 이른바 스몰딜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내정치이다. 지난 번 기사에서도 썼지만 트럼프한테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

[연관 기사] [트럼프의 재구성③] 볼턴, 이 남자가 사는 법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을 한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이란 핵협상을 파기했다. 당시엔 오바마가 해놓은 것들은 무조건 지워버린다는 ‘Anything but Obama’라고 말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트럼프가 오바마를 비난하는 핵심은 이란에게 돈을 갖다 바친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오바마처럼 선물이나 주고 환심을 사는 한심한 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러니까 이게 트럼프가 보는 최저점이다. 북한 핵협상이 이란 핵협상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아 보인다면 트럼프 입장에선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오바마와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북한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을 거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암시해왔다. 며칠 전 트윗이 그렇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리더십 아래 대단한 성장과 경제적 성공, 부를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나는 곧 다가올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핵무기와 제제가 없어지는 그 날을. 그리고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라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부자 되세요’라고 하는데, 어디에도 보태주겠다는 말은 없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되라는 말이다. 트럼프의 일관된 입장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전인 지난해 5월, 카다피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리비아 모델’은 북한과는 정반대라면서 ‘남한 모델(South Korean Model)’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김정은의 나라는 아주 부자가 될 겁니다. 국민들은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남한을 보세요. 이것은 ‘남한’ 모델입니다. 근면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는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또 카다피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뚱딴지처럼 돈 이야기를 꺼낸다. 좀 길지만 옮겨본다.

“우리는 카다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어. 군사력을 강화시켜주겠어. 우리가 다 해 줄게’ 우리가 개입해서 내전으로 붕괴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서도 똑같이 했어요. 글쎄, 우리가 그랬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요. 제 말씀은, 저는 처음부터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을 보세요. 우리는 7조 달러를 썼어요. 믿어집니까? 중동에 7조 달러를 썼어요. 돈을 그냥 창밖으로 내다 버린 거죠. 중동에서 사회간접자본을 지어줬고 공항 같은 것들도 지어줬어요. 우리는 중동에 7조 달러를 썼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남은 게 뭡니까? 슬프죠. 카다피의 모델을 보면요, 완전히 내전모델입니다. 우리가 개입해서 날린 거죠. 그 모델이 일어날 수도 있죠, 우리가 딜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딜을 성사시킨다면 제 생각엔 김정은은 아주 아주 행복할 겁니다. 정말 아주 행복할 거라 믿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이해가 편할 것 같다. 만약 트럼프가 그리고 있는 빅딜이 성사된다면 트럼프는 어떤 자랑을 하고 다닐까? 아마 이럴 것이다.

이란에 돈이나 갖다 바치고 비핵화를 구걸하는 오바마는 정말 한심해. 돈을 창밖에 내다 버린 꼴이지. 북한에 땡전 한 푼 안 주고 미국 본토를 위협하던 핵 위협을 일거에 없애버린 나 트럼프야말로 진정한 ‘협상의 달인’이야.

이런 말들은 트럼프의 지지층에게, 혹은 잠재적 지지층에게 잘 먹히는 말들이다. 지난 기사에서 썼지만, ‘협상의 달인’ 이미지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주었다. 단순히 업적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달인 인증’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표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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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트럼프가 그런 자랑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베트남을 보면, 미국이 땡전 한 푼 안 줬는데 경제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트럼프식으로 말하면 ‘남한 모델’이다. 관계를 정상화하고 제재를 해제하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아주 큰 것을 주는 것이다. 김정은 역시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은 딜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은 빅딜을 받을 수 있을까?

남은 문제는 ‘김정은이 트럼프의 빅딜을 받을 수 있느냐?’다. 헤커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협상이 중간에 어그러질 경우 미국의 폭격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CBS Face the Nation의 마가렛 브레넌 앵커가 볼턴에게 물었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실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생각에는 김정은은 북한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이고 그가 비핵화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한다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한 건 트럼프가 이 부분에서 김정은을 안심시키려고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다피에겐 체제보장을 약속해준 적이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김정은에게는 체제보장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이 그렇다.

“카다피를 지켜주겠다는 합의는 없었죠. 리비아 모델은 아주 다른 협상이었습니다. 김정은의 경우는 그 자리에 있을 거고, 자기 나라에 있게 될 거고, 그 나라를 운영하게 될 겁니다. 그의 나라는 아주 부유해질 겁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니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트럼프는 김정은의 체제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열을 올린다. 당장 몽땅 내놓으면 미국 대통령인 내가 책임지고 보장해주겠다는 말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기아의 고르디움에 도착했을 때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있었다. 신탁에 따르면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고 했다. 풀어 보려다가 실패한 알렉산더는 칼을 뽑아들더니 매듭을 잘라버렸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북한 핵문제는 난마처럼 엉키기만 했다. 위기가 터지고 합의로 겨우 봉합되고 또 파기되기를 반복하면서 꼬일 대로 꼬여버린 북핵의 실타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닮았다.

트럼프가 알렉산더 대왕급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비핵화의 실타래는 이제 잘라버리는 것 말고는 풀 방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풀어서 해결하려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을,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를 일을, 앞으로 어느 미국 대통령이 풀겠다고 달려들까? 칼로 싹둑 잘라서라도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그동안 트럼프가 해놓은 일들이 그렇듯, 비핵화로 가는 길은 깎아놓은 듯이 반듯한 길이거나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길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우여곡절과 좌충우돌, 야단법석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또다시 밀고 당기기에 돌입했다. 속 시원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험악했던 재작년을 떠올려보면 희망을 가질 이유는 있다. 이 사람들은 '당신과 대화하고 싶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사람들이다.

‘꼬마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늙다리 미치광이와 꼬마 로켓맨이 어떻게든 잘 좀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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