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돌아보는 8·15]① 제주 주둔 일본군 항복서명식

입력 2021.08.12 (21:49) 수정 2021.08.12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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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올해로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지 76년이 됩니다.

광복 직전 일본은 제주를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결전지로 삼고 군사 요새화에 나섰는데요,

이런 이유로 당시 미군은 제주에서 제주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직접 받고 무장도 해제시켰습니다.

광복 직후 제주에서 벌어졌던 이런 역사적 장면들은 KBS의 영상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광복절 기획, 첫 순서로 제주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 서명식을 유용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일제 강점기 일본군 제58군 사령부가 있던 옛 제주농업학교, 학교 건물 앞으로 차들이 멈춰 서고 미군 장교들이 하나 둘 내립니다.

이들이 건물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굳은 표정으로 도열 하고, 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례로 문서에 서명합니다.

문서의 내용은 당시 제주에 배치된 6만 일본군이 "한국인의 폭동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만 소지한 채 무조건 항복한다"는 겁니다.

이 장면은 1945년 9월 28일, 제주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항복문서 서명식으로 미군이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시 서명식에는 미군 쪽에서 육군 대령 로이 그린과 해군 중령 월든 등이 참석했고, 일본군에서는 일본군 사령관 도야마 노보루 중장 등이 나와 서명했습니다.

이 항복 문서는 지난 1997년 국내 한 대학 연구소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해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양정심/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마지막 옥쇄작전을 펼치고자 했던 일본군의 많은 병력들이 여기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군 또한 따로 제주도를 주목하고 있었고 이 과정 속에서 육지와는 별개로 (항복 서명식을 한 겁니다.)"]

역사학자 중에는 당시 옥쇄작전에 나선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 제주에서 벌어졌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도민들을 수탈하던 일본군은 항복 서명과 함께 초라하게 퇴장했습니다.

KBS 뉴스 유용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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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으로 돌아보는 8·15]① 제주 주둔 일본군 항복서명식
    • 입력 2021-08-12 21:49:40
    • 수정2021-08-12 22:03:44
    뉴스9(제주)
[앵커]

올해로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지 76년이 됩니다.

광복 직전 일본은 제주를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결전지로 삼고 군사 요새화에 나섰는데요,

이런 이유로 당시 미군은 제주에서 제주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직접 받고 무장도 해제시켰습니다.

광복 직후 제주에서 벌어졌던 이런 역사적 장면들은 KBS의 영상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광복절 기획, 첫 순서로 제주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 서명식을 유용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일제 강점기 일본군 제58군 사령부가 있던 옛 제주농업학교, 학교 건물 앞으로 차들이 멈춰 서고 미군 장교들이 하나 둘 내립니다.

이들이 건물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굳은 표정으로 도열 하고, 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례로 문서에 서명합니다.

문서의 내용은 당시 제주에 배치된 6만 일본군이 "한국인의 폭동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만 소지한 채 무조건 항복한다"는 겁니다.

이 장면은 1945년 9월 28일, 제주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항복문서 서명식으로 미군이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시 서명식에는 미군 쪽에서 육군 대령 로이 그린과 해군 중령 월든 등이 참석했고, 일본군에서는 일본군 사령관 도야마 노보루 중장 등이 나와 서명했습니다.

이 항복 문서는 지난 1997년 국내 한 대학 연구소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해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양정심/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마지막 옥쇄작전을 펼치고자 했던 일본군의 많은 병력들이 여기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군 또한 따로 제주도를 주목하고 있었고 이 과정 속에서 육지와는 별개로 (항복 서명식을 한 겁니다.)"]

역사학자 중에는 당시 옥쇄작전에 나선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 제주에서 벌어졌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도민들을 수탈하던 일본군은 항복 서명과 함께 초라하게 퇴장했습니다.

KBS 뉴스 유용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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