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새명물/부활하는 영도다리
입력 2005.02.21 (07:41)
수정 2005.02.2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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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뉴스광장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새롭게 마련한 순서, 우리 고장 새 명물 시간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 부산의 영도다리가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는 소식을 박순서 기자가 전합니다.
⊙기자: 1950년대, 높이 들어올려진 영도다리를 구경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부산 남포동과 영도를 잇는 국내 최초의 연육교 영도다리는 1934년 완공 이후 줄곧 구경꾼들을 모으는 부산의 큰 명물이었습니다.
66년까지 32년 동안 단 하루도 빼지 않고 하루 두 차례씩 다리 상판을 들어올렸던 영도다리.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남의 다리로 더욱 유명해집니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유행했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는 피난민들의 이 같은 애환과 만남에 대한 기대가 녹아 있습니다.
⊙박명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주로 그 당시에는 부두 노동자들이 판잣집에 많이 살았거든요.
판잣집이 영도에 많이 있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오고 가고 하면서 여기에다 낙서도 하고 서로 언제 만나자 또 보고 싶다 이래서 그 글자를 찾아가면서 서로가 만나서 회포를 풀고...
⊙기자: 영도다리 옆에 들어섰던 40여 군데의 점집들도 난리 이후 가족의 생사나 소재를 물으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던 장소입니다.
지금은 사랑과 우정의 낙서로 채워진 다리 난관들도 당시에는 가족이나 친지를 찾는 애절한 사연으로 가득했습니다.
66년부터 다리 노후화와 교통문제로 더 이상 상판을 들어올리지 않았지만 영화 친구 등 각종 영화의 촬영지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영도다리는 인근에 제2롯데월드가 건립되면서 7년 동안 존폐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다리를 철거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보강해 2007년부터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기로 결정됐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무려 70여 년의 세월을 버텨온 영도다리.
이제 3년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돼 41년 만에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는 추억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KBS뉴스 박순서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 부산의 영도다리가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는 소식을 박순서 기자가 전합니다.
⊙기자: 1950년대, 높이 들어올려진 영도다리를 구경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부산 남포동과 영도를 잇는 국내 최초의 연육교 영도다리는 1934년 완공 이후 줄곧 구경꾼들을 모으는 부산의 큰 명물이었습니다.
66년까지 32년 동안 단 하루도 빼지 않고 하루 두 차례씩 다리 상판을 들어올렸던 영도다리.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남의 다리로 더욱 유명해집니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유행했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는 피난민들의 이 같은 애환과 만남에 대한 기대가 녹아 있습니다.
⊙박명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주로 그 당시에는 부두 노동자들이 판잣집에 많이 살았거든요.
판잣집이 영도에 많이 있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오고 가고 하면서 여기에다 낙서도 하고 서로 언제 만나자 또 보고 싶다 이래서 그 글자를 찾아가면서 서로가 만나서 회포를 풀고...
⊙기자: 영도다리 옆에 들어섰던 40여 군데의 점집들도 난리 이후 가족의 생사나 소재를 물으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던 장소입니다.
지금은 사랑과 우정의 낙서로 채워진 다리 난관들도 당시에는 가족이나 친지를 찾는 애절한 사연으로 가득했습니다.
66년부터 다리 노후화와 교통문제로 더 이상 상판을 들어올리지 않았지만 영화 친구 등 각종 영화의 촬영지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영도다리는 인근에 제2롯데월드가 건립되면서 7년 동안 존폐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다리를 철거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보강해 2007년부터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기로 결정됐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무려 70여 년의 세월을 버텨온 영도다리.
이제 3년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돼 41년 만에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는 추억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KBS뉴스 박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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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고장 새명물/부활하는 영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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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05-02-21 0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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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뉴스광장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새롭게 마련한 순서, 우리 고장 새 명물 시간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 부산의 영도다리가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는 소식을 박순서 기자가 전합니다.
⊙기자: 1950년대, 높이 들어올려진 영도다리를 구경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부산 남포동과 영도를 잇는 국내 최초의 연육교 영도다리는 1934년 완공 이후 줄곧 구경꾼들을 모으는 부산의 큰 명물이었습니다.
66년까지 32년 동안 단 하루도 빼지 않고 하루 두 차례씩 다리 상판을 들어올렸던 영도다리.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남의 다리로 더욱 유명해집니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유행했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는 피난민들의 이 같은 애환과 만남에 대한 기대가 녹아 있습니다.
⊙박명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주로 그 당시에는 부두 노동자들이 판잣집에 많이 살았거든요.
판잣집이 영도에 많이 있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오고 가고 하면서 여기에다 낙서도 하고 서로 언제 만나자 또 보고 싶다 이래서 그 글자를 찾아가면서 서로가 만나서 회포를 풀고...
⊙기자: 영도다리 옆에 들어섰던 40여 군데의 점집들도 난리 이후 가족의 생사나 소재를 물으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던 장소입니다.
지금은 사랑과 우정의 낙서로 채워진 다리 난관들도 당시에는 가족이나 친지를 찾는 애절한 사연으로 가득했습니다.
66년부터 다리 노후화와 교통문제로 더 이상 상판을 들어올리지 않았지만 영화 친구 등 각종 영화의 촬영지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영도다리는 인근에 제2롯데월드가 건립되면서 7년 동안 존폐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다리를 철거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보강해 2007년부터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기로 결정됐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무려 70여 년의 세월을 버텨온 영도다리.
이제 3년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돼 41년 만에 다리 상판을 다시 들어올리는 추억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KBS뉴스 박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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