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오월 광주엔 민주경찰 있었다”…아들 안호재가 말하는 故안병하 치안감

입력 2023.04.12 (07: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979년 2월부터 1980년까지 전남 경찰국장을 맡은 故안병하 전 치안감1979년 2월부터 1980년까지 전남 경찰국장을 맡은 故안병하 전 치안감

"도망가는 시위 학생들을 뒤쫓지 마라.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시민군에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을 텐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 1980년 당시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를 포함한 전남 지역 치안 책임자는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습니다. 당시 전남 경찰국장은 신군부의 발포 명령과 전남도청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가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강제 사직당했습니다. 이후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5·18 청문회 직후인 1988년 10월 사망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지키려 했던 '민주경찰' 故안병하 치안감 이야기입니다.

지금 (경찰이) 무장하게 되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될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부친(故안병하 치안감)과 참모들이 결정해서 '절대 회수한 무기는 현장 경찰관에게 돌려주지 말라 끝까지.' 모든 책임은 부친이 지기로 하고 이제 지시를 내렸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병하 전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안병하 전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

5·18 당시 지역 경찰관들의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에 앞장서온 故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평화롭던 광주를 폭력으로 물들인 계엄군
5월 16일, 경찰하고 박관현 학생회장하고 약속을 했고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사상자 없이 집회가 끝났다고 합니다. 부친은 한달여 만에 처음으로 관사로 귀가하셨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평화롭게 끝났고 광주에 지원 나왔던 많은 경찰도 원래 경찰서로 귀대했다고 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잇따랐고 5월 16일(금)까지 광주에서도 대규모 횃불 대행진이 열렸습니다. 사실상 경찰의 보호 아래 평화로운 집회가 진행됐고, 사상자는 물론 어떤 불상사도 없었습니다.

특전사 군인이 개입하면서 경찰 진압 병력을 2선으로 퇴진시켰습니다. 시위 전문가인 경찰의 방식을 벗어난 군 방식대로 진압하다보니 많은 불상사가 일어나고 피해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군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경찰관 한 명 한 명이 '이건 잘못된 거다' 해서. 내가 알기는 처음에 부친(故안병하 치안감)의 명령 떨어지기 전부터 시민들을 나름대로 보호하려고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보고를 받은 부친이 결정해서 '일단 시위대를 우선으로 살려라, 경찰의 본분을 다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발포·진압 명령 거부한 대가
1980년 5월 25일 광주공항에 내린 최규하 대통령1980년 5월 25일 광주공항에 내린 최규하 대통령

1980년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이 때문에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가 나오기도 했지만 결과는 강경 진압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방문은 신군부가 전남도청 진압을 앞두고 기획한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던 겁니다. 이 최후통첩엔 전남 경찰국장 안병하에 대한 것도 포함됐습니다. 경찰에 도청 시민군 진압을 명령한 겁니다.

최규하 대통령하고 이제 군 수뇌부들이 왔을 때 제가 알기로는 그게 마지막 지시였다고 들었습니다. '경찰이 먼저 앞장서서 도청을 진입해라.' 그런데 부친은 이게 뻔히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경찰이 또 한번 이렇게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면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거기서 이제 반항을 한 거죠. 당신네들의 뜻을 못 따르겠다.


■고문 끝에 강제 사직

신군부에 항명한 안병하 국장은 바로 후임 경찰국장이 정해진 뒤 치안본부로 끌려갔습니다. 치안본부 조사 뒤에는 보안사로 압송돼 고문을 당했고 경찰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친이 중한 상태인지 몰랐습니다. 집에 오실 때도 혼자 오셨어요. 보안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급을 안 하셨어요. 다음 날부터 쓰러지기 시작하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고 해서 가족들이 고문 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부친이 고문은 이야기를 안 하시고 한 가지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다. 잠 잘까봐 계속 불을 비추고 있다. 나머지는 수치스러우니까 말을 할 수가 없다.'


■시민을 지킨 대가로 불명예 퇴직당한 '민주경찰'
전남경찰청 뜰에 조성된 안병하 전 전남 경찰국장 흉상. 1980년 당시 계엄군과 시민 사이 저지선을 만들다 희생된 경찰관들의 흉상도 함께 세워져 있다.전남경찰청 뜰에 조성된 안병하 전 전남 경찰국장 흉상. 1980년 당시 계엄군과 시민 사이 저지선을 만들다 희생된 경찰관들의 흉상도 함께 세워져 있다.

안병하 국장과 뜻을 함께했던 전남 경찰국 간부들도 신군부의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습니다. 10명 가량의 경찰 간부들이 치안본부 압박으로 같은 날 사표를 쓰게 된 겁니다. 당시 안병하 국장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참모들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안사로부터 약속받았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안병하 치안감을 비롯해 1980년 당시 경찰관들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은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아직도 더딘 상황입니다.

관련 보도 참고.
5.18 희생 경찰관 반쪽짜리 명예회복(2018.10.23)
5.18 진압 거부 경찰들…명예회복 언제쯤?(2019.10.14)

보안사 가서 약속을 한 게 '내가 뭐든 책임을 지고 잘못한 것으로 할테니까 나의 지시를 따른 참모들은 건드리지 말아달라' 약속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부친이 이제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며칠 지나자마자 뒤바뀐 것이죠. 거기에는 그 당시에 모 치안본부장, 그 사람이 신군부에 잘 보이려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안병하 비망록'
‘안병하 비망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안병하 비망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당시 상황을 복기한 기록을 이른바 '비망록'으로 남겼습니다. 1988년 국회 5·18 청문회 이후 비망록 작성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안 치안감은 끝내 비망록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세상을 떴습니다. 후배 경찰관들의 이름조차 다 쓰지 못한 채였습니다.

1988년도 청문회가 있었어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학생 대표·시민군 대표, 그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걸 보고 알게 됐죠. 부친이 아마 그 때 큰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안병하 비망록'이라고 하는 부친이 남기신 글씨가 있는데 그 시절에 쓰신 것 같아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로는 못 하니까 기록을 남기신 거죠. 80년 5월에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됐는지 전개 과정, 그리고 경찰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부친이 바라본 그 내용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네 분인가 다섯 분 이름을 쓰시고 뒤에는 번호만 매기고 못 쓰셨더라고요. 그걸 쓰시다가 이제 돌아가신 것 같아요.


후배 경찰관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메모후배 경찰관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메모

■5·18 민주경찰 명예회복 나선 안호재
안호재 씨가 아버지 묘비를 닦고 있다안호재 씨가 아버지 묘비를 닦고 있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故안병하 치안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고군분투했습니다. 강제 해직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안 씨는 아버지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하면서 1980년 당시 이른바 수많은 '민주경찰'들에 눈을 떴습니다.

구 (전남)도청이 보존되어 있다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경찰국 흔적,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경찰국의 경찰관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인 일을 하고도 아무런 역사적인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

당시 시민 피해를 줄이려고 했던 그 경찰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경찰은 국민을 지키지만 그러한 경찰은 국민이 지켜줘야 합니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영웅이었습니다. 그분들을 인정해 주시고 제대로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더 나은 세상 꿈꾸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 이름을 딴 '안병하 인권학교'를 개설해 인권을 화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0년 당시 '민주경찰'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의 민주화와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당신이 혼자 소신을 지키려면 힘들다. 같은 부서에 두 명이면 강해지고 셋이 되면 힘이 될 수 있고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게 해달라고 만나는 신임 경찰마다 제가 부탁을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경찰 조직이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시로 안병하 인권학교를 개설해서 거기서 인권에 대해서 같이 토론하고 상의하고, 그런 활동을 지금 계속 하고 있습니다.


안호재 씨는 인터뷰 말미에 "다시는 우리 같은 가족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고군분투해온 안 씨의 노력은 '80년 오월 광주'의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냈고 경찰 조직의 민주화, 나아가 우리 사회 인권 증진의 밀알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영상채록 5·18] “오월 광주엔 민주경찰 있었다”…아들 안호재가 말하는 故안병하 치안감
    • 입력 2023-04-12 07:00:27
    취재K
1979년 2월부터 1980년까지 전남 경찰국장을 맡은 故안병하 전 치안감
"도망가는 시위 학생들을 뒤쫓지 마라.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시민군에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을 텐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 1980년 당시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를 포함한 전남 지역 치안 책임자는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습니다. 당시 전남 경찰국장은 신군부의 발포 명령과 전남도청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가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강제 사직당했습니다. 이후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5·18 청문회 직후인 1988년 10월 사망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지키려 했던 '민주경찰' 故안병하 치안감 이야기입니다.

지금 (경찰이) 무장하게 되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될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부친(故안병하 치안감)과 참모들이 결정해서 '절대 회수한 무기는 현장 경찰관에게 돌려주지 말라 끝까지.' 모든 책임은 부친이 지기로 하고 이제 지시를 내렸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병하 전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
5·18 당시 지역 경찰관들의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에 앞장서온 故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평화롭던 광주를 폭력으로 물들인 계엄군
5월 16일, 경찰하고 박관현 학생회장하고 약속을 했고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사상자 없이 집회가 끝났다고 합니다. 부친은 한달여 만에 처음으로 관사로 귀가하셨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평화롭게 끝났고 광주에 지원 나왔던 많은 경찰도 원래 경찰서로 귀대했다고 합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잇따랐고 5월 16일(금)까지 광주에서도 대규모 횃불 대행진이 열렸습니다. 사실상 경찰의 보호 아래 평화로운 집회가 진행됐고, 사상자는 물론 어떤 불상사도 없었습니다.

특전사 군인이 개입하면서 경찰 진압 병력을 2선으로 퇴진시켰습니다. 시위 전문가인 경찰의 방식을 벗어난 군 방식대로 진압하다보니 많은 불상사가 일어나고 피해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군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경찰관 한 명 한 명이 '이건 잘못된 거다' 해서. 내가 알기는 처음에 부친(故안병하 치안감)의 명령 떨어지기 전부터 시민들을 나름대로 보호하려고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보고를 받은 부친이 결정해서 '일단 시위대를 우선으로 살려라, 경찰의 본분을 다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발포·진압 명령 거부한 대가
1980년 5월 25일 광주공항에 내린 최규하 대통령
1980년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이 때문에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가 나오기도 했지만 결과는 강경 진압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방문은 신군부가 전남도청 진압을 앞두고 기획한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던 겁니다. 이 최후통첩엔 전남 경찰국장 안병하에 대한 것도 포함됐습니다. 경찰에 도청 시민군 진압을 명령한 겁니다.

최규하 대통령하고 이제 군 수뇌부들이 왔을 때 제가 알기로는 그게 마지막 지시였다고 들었습니다. '경찰이 먼저 앞장서서 도청을 진입해라.' 그런데 부친은 이게 뻔히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경찰이 또 한번 이렇게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면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거기서 이제 반항을 한 거죠. 당신네들의 뜻을 못 따르겠다.


■고문 끝에 강제 사직

신군부에 항명한 안병하 국장은 바로 후임 경찰국장이 정해진 뒤 치안본부로 끌려갔습니다. 치안본부 조사 뒤에는 보안사로 압송돼 고문을 당했고 경찰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친이 중한 상태인지 몰랐습니다. 집에 오실 때도 혼자 오셨어요. 보안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급을 안 하셨어요. 다음 날부터 쓰러지기 시작하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고 해서 가족들이 고문 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부친이 고문은 이야기를 안 하시고 한 가지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다. 잠 잘까봐 계속 불을 비추고 있다. 나머지는 수치스러우니까 말을 할 수가 없다.'


■시민을 지킨 대가로 불명예 퇴직당한 '민주경찰'
전남경찰청 뜰에 조성된 안병하 전 전남 경찰국장 흉상. 1980년 당시 계엄군과 시민 사이 저지선을 만들다 희생된 경찰관들의 흉상도 함께 세워져 있다.
안병하 국장과 뜻을 함께했던 전남 경찰국 간부들도 신군부의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습니다. 10명 가량의 경찰 간부들이 치안본부 압박으로 같은 날 사표를 쓰게 된 겁니다. 당시 안병하 국장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참모들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안사로부터 약속받았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안병하 치안감을 비롯해 1980년 당시 경찰관들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은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아직도 더딘 상황입니다.

관련 보도 참고.
5.18 희생 경찰관 반쪽짜리 명예회복(2018.10.23)
5.18 진압 거부 경찰들…명예회복 언제쯤?(2019.10.14)

보안사 가서 약속을 한 게 '내가 뭐든 책임을 지고 잘못한 것으로 할테니까 나의 지시를 따른 참모들은 건드리지 말아달라' 약속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부친이 이제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며칠 지나자마자 뒤바뀐 것이죠. 거기에는 그 당시에 모 치안본부장, 그 사람이 신군부에 잘 보이려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안병하 비망록'
‘안병하 비망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당시 상황을 복기한 기록을 이른바 '비망록'으로 남겼습니다. 1988년 국회 5·18 청문회 이후 비망록 작성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안 치안감은 끝내 비망록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세상을 떴습니다. 후배 경찰관들의 이름조차 다 쓰지 못한 채였습니다.

1988년도 청문회가 있었어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학생 대표·시민군 대표, 그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걸 보고 알게 됐죠. 부친이 아마 그 때 큰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안병하 비망록'이라고 하는 부친이 남기신 글씨가 있는데 그 시절에 쓰신 것 같아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로는 못 하니까 기록을 남기신 거죠. 80년 5월에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됐는지 전개 과정, 그리고 경찰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부친이 바라본 그 내용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네 분인가 다섯 분 이름을 쓰시고 뒤에는 번호만 매기고 못 쓰셨더라고요. 그걸 쓰시다가 이제 돌아가신 것 같아요.


후배 경찰관들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메모
■5·18 민주경찰 명예회복 나선 안호재
안호재 씨가 아버지 묘비를 닦고 있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故안병하 치안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고군분투했습니다. 강제 해직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안 씨는 아버지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하면서 1980년 당시 이른바 수많은 '민주경찰'들에 눈을 떴습니다.

구 (전남)도청이 보존되어 있다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경찰국 흔적,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경찰국의 경찰관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인 일을 하고도 아무런 역사적인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

당시 시민 피해를 줄이려고 했던 그 경찰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경찰은 국민을 지키지만 그러한 경찰은 국민이 지켜줘야 합니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영웅이었습니다. 그분들을 인정해 주시고 제대로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더 나은 세상 꿈꾸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 이름을 딴 '안병하 인권학교'를 개설해 인권을 화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0년 당시 '민주경찰'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의 민주화와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당신이 혼자 소신을 지키려면 힘들다. 같은 부서에 두 명이면 강해지고 셋이 되면 힘이 될 수 있고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게 해달라고 만나는 신임 경찰마다 제가 부탁을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경찰 조직이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시로 안병하 인권학교를 개설해서 거기서 인권에 대해서 같이 토론하고 상의하고, 그런 활동을 지금 계속 하고 있습니다.


안호재 씨는 인터뷰 말미에 "다시는 우리 같은 가족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고군분투해온 안 씨의 노력은 '80년 오월 광주'의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냈고 경찰 조직의 민주화, 나아가 우리 사회 인권 증진의 밀알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