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후 항쟁과 진상규명…민주주의의 힘
입력 2025.05.15 (21:42)
수정 2025.05.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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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18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을 알고도 도청에 남았습니다.
이런 희생은 함께 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으로 남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면 참여와 연대, 실천으로 되살아났습니다.
12·3 사태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연속기획, 오늘은 5·18 최후 항쟁과 진상규명의 과정을 이성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6일,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는 대학생수습대책위원회 방송반입니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이날 계엄군이 들어닥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도청에 있던 시민군 17명이 사살되고, 2백80여명이 연행됐습니다.
도청에 남았던 이들은 이날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결국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 "거기에 있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부채감이랄지 광주에 대한 미안함이랄지 이런 부분이 그 이후에 87년 6월 항쟁이나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지 않는가…."]
죽음을 각오하며 무력에 맞섰던 오월 정신은 44년이 지난 12·3 계엄의 밤을 밝혔습니다.
[박찬대/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지난해 12월 14일 : "44년 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는 그때마다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1988년 5공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그 자체로 광주와 5·18을 기억하는 투쟁으로 이어진 겁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 "(12·3 비상계엄 상황에서)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하는 시민 직접 이에 참여한 실천했던 시민들이 80년 오월을 현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침묵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80년 5월 광주는 45년이 지나서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등대로 죽은 자들에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성각입니다.
촬영기자:안재훈
5·18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을 알고도 도청에 남았습니다.
이런 희생은 함께 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으로 남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면 참여와 연대, 실천으로 되살아났습니다.
12·3 사태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연속기획, 오늘은 5·18 최후 항쟁과 진상규명의 과정을 이성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6일,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는 대학생수습대책위원회 방송반입니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이날 계엄군이 들어닥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도청에 있던 시민군 17명이 사살되고, 2백80여명이 연행됐습니다.
도청에 남았던 이들은 이날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결국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 "거기에 있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부채감이랄지 광주에 대한 미안함이랄지 이런 부분이 그 이후에 87년 6월 항쟁이나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지 않는가…."]
죽음을 각오하며 무력에 맞섰던 오월 정신은 44년이 지난 12·3 계엄의 밤을 밝혔습니다.
[박찬대/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지난해 12월 14일 : "44년 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는 그때마다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1988년 5공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그 자체로 광주와 5·18을 기억하는 투쟁으로 이어진 겁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 "(12·3 비상계엄 상황에서)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하는 시민 직접 이에 참여한 실천했던 시민들이 80년 오월을 현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침묵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80년 5월 광주는 45년이 지나서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등대로 죽은 자들에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성각입니다.
촬영기자:안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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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5-05-15 22: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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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을 알고도 도청에 남았습니다.
이런 희생은 함께 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으로 남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면 참여와 연대, 실천으로 되살아났습니다.
12·3 사태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연속기획, 오늘은 5·18 최후 항쟁과 진상규명의 과정을 이성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6일,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는 대학생수습대책위원회 방송반입니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이날 계엄군이 들어닥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도청에 있던 시민군 17명이 사살되고, 2백80여명이 연행됐습니다.
도청에 남았던 이들은 이날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결국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 "거기에 있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부채감이랄지 광주에 대한 미안함이랄지 이런 부분이 그 이후에 87년 6월 항쟁이나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지 않는가…."]
죽음을 각오하며 무력에 맞섰던 오월 정신은 44년이 지난 12·3 계엄의 밤을 밝혔습니다.
[박찬대/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지난해 12월 14일 : "44년 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는 그때마다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1988년 5공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그 자체로 광주와 5·18을 기억하는 투쟁으로 이어진 겁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 "(12·3 비상계엄 상황에서)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하는 시민 직접 이에 참여한 실천했던 시민들이 80년 오월을 현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침묵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80년 5월 광주는 45년이 지나서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등대로 죽은 자들에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성각입니다.
촬영기자:안재훈
5·18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을 알고도 도청에 남았습니다.
이런 희생은 함께 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으로 남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면 참여와 연대, 실천으로 되살아났습니다.
12·3 사태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연속기획, 오늘은 5·18 최후 항쟁과 진상규명의 과정을 이성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6일,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는 대학생수습대책위원회 방송반입니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이날 계엄군이 들어닥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도청에 있던 시민군 17명이 사살되고, 2백80여명이 연행됐습니다.
도청에 남았던 이들은 이날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결국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 "거기에 있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부채감이랄지 광주에 대한 미안함이랄지 이런 부분이 그 이후에 87년 6월 항쟁이나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지 않는가…."]
죽음을 각오하며 무력에 맞섰던 오월 정신은 44년이 지난 12·3 계엄의 밤을 밝혔습니다.
[박찬대/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지난해 12월 14일 : "44년 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는 그때마다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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