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In] ④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는 ‘무진기행’ 김승옥

입력 2016.07.09 (09:58) 수정 2016.07.0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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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김승옥의 글은 문학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창작 교본이었다. 베껴 쓰는 것만으로도 마치 작가가 된 듯 가슴이 벅차 올랐다.

소설가 신경숙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스무살에 만난 빛이었다”고 평했고 소설가 이응준은 “김승옥은 내게 있어 빛과 그림자였다. 닮고 싶어했을 때는 찬란한 빛이었으나 빠져 나왔을 때는 잔혹한 어둠이었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1960년대 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승옥’이라는 이름 석자는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생명연습』,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章』 등 발표하는 작품 마다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글을 두고 시인 김지하는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면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승옥의 ‘운림산방’김승옥의 ‘운림산방’


그런 그가 이제는 글을 놓고 그림으로 우리와 소통을 한다.

2003년 초 찾아온 뇌졸중 때문이다. 김승옥은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이문구의 부음을 접하고 장례식장을 찾은 길에 쓰러졌다. 당시 바쁘게 지내던 일상이 화근이었다.

김승옥의 ‘다산초당’김승옥의 ‘다산초당’


뇌졸중으로 말과 글을 잃어버린 대신 붓을 잡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북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담았다. 어느덧 60여 편의 수채화가 모였고 8일 서울 혜화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


지난 2010년 순천문학관에 김승옥관이 문을 열게 된 후부터는 일주일에 이삼일은 그곳에 머물면서 순천의 풍경을 그렸다. 그에게 고향 순천은 무진(霧津)과도 같은 곳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 한국 남화의 고향인 진도 ‘운림산방’ 등 그가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말 대신 그림으로 전했다.

김승옥의 ‘영랑생가’김승옥의 ‘영랑생가’


기자와의 대화도 필담으로 이뤄졌다. 뇌졸중으로 얻은 후유증 때문이다.

“옛 친구들이 그리우시겠어요?”

한때 세련된 문체로 문단을 압도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담담히 몇 개의 단어로 그의 심정을 나타낸다.

‘김현, 김치수, 최하림...’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어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됐다며 그들이 진짜 친구였다고 말한다.

김승옥과의 필담. 김현, 김치수, 최하림, 별세, 진짜 친구라고 적혀 있다.김승옥과의 필담. 김현, 김치수, 최하림, 별세, 진짜 친구라고 적혀 있다.


애당초 그는 글 솜씨 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대학 1학년 시절 한 경제지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4컷 시사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만화 작가로서의 이름은 본명 대신 필명 김이구(金二究)를 썼다. 순천 고향집 번지 수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김승옥의 시사 만화 ‘파고다 영감’김승옥의 시사 만화 ‘파고다 영감’


그의 예술적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소설가이자 만화가였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다.

각색과 감독까지 맡은 김동인의 ‘감자’로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대됐고, 1968년에는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해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 제작 중인 김승옥영화 제작 중인 김승옥


70년대 대표적 영화인 ‘영자의 전성시대’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여자들만 사는 거리’ 등의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 비록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작업이었으나 영화 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김승옥은 뇌졸중은 극복했지만 작가의 생명인 언어를 잃었다. 언어를 상실한 소설가의 그림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霧津)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김승옥만의 ‘무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를 그림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문화人·In]
☞ ③ 아코디언 전설이 된 ‘대통령의 악사’
☞ ② 신명나게 ‘현실’을 비판한 작가, 오윤
☞ ① “서화에 생명 불어넣은 50년,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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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人·In] ④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는 ‘무진기행’ 김승옥
    • 입력 2016-07-09 09:58:07
    • 수정2016-07-09 22:03:10
    취재K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김승옥의 글은 문학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창작 교본이었다. 베껴 쓰는 것만으로도 마치 작가가 된 듯 가슴이 벅차 올랐다. 소설가 신경숙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스무살에 만난 빛이었다”고 평했고 소설가 이응준은 “김승옥은 내게 있어 빛과 그림자였다. 닮고 싶어했을 때는 찬란한 빛이었으나 빠져 나왔을 때는 잔혹한 어둠이었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1960년대 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승옥’이라는 이름 석자는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생명연습』,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章』 등 발표하는 작품 마다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글을 두고 시인 김지하는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면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승옥의 ‘운림산방’ 그런 그가 이제는 글을 놓고 그림으로 우리와 소통을 한다. 2003년 초 찾아온 뇌졸중 때문이다. 김승옥은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이문구의 부음을 접하고 장례식장을 찾은 길에 쓰러졌다. 당시 바쁘게 지내던 일상이 화근이었다. 김승옥의 ‘다산초당’ 뇌졸중으로 말과 글을 잃어버린 대신 붓을 잡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북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담았다. 어느덧 60여 편의 수채화가 모였고 8일 서울 혜화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 지난 2010년 순천문학관에 김승옥관이 문을 열게 된 후부터는 일주일에 이삼일은 그곳에 머물면서 순천의 풍경을 그렸다. 그에게 고향 순천은 무진(霧津)과도 같은 곳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 한국 남화의 고향인 진도 ‘운림산방’ 등 그가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말 대신 그림으로 전했다. 김승옥의 ‘영랑생가’ 기자와의 대화도 필담으로 이뤄졌다. 뇌졸중으로 얻은 후유증 때문이다. “옛 친구들이 그리우시겠어요?” 한때 세련된 문체로 문단을 압도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담담히 몇 개의 단어로 그의 심정을 나타낸다. ‘김현, 김치수, 최하림...’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어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됐다며 그들이 진짜 친구였다고 말한다. 김승옥과의 필담. 김현, 김치수, 최하림, 별세, 진짜 친구라고 적혀 있다. 애당초 그는 글 솜씨 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대학 1학년 시절 한 경제지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4컷 시사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만화 작가로서의 이름은 본명 대신 필명 김이구(金二究)를 썼다. 순천 고향집 번지 수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김승옥의 시사 만화 ‘파고다 영감’ 그의 예술적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소설가이자 만화가였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다. 각색과 감독까지 맡은 김동인의 ‘감자’로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대됐고, 1968년에는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해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 제작 중인 김승옥 70년대 대표적 영화인 ‘영자의 전성시대’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여자들만 사는 거리’ 등의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 비록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작업이었으나 영화 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김승옥은 뇌졸중은 극복했지만 작가의 생명인 언어를 잃었다. 언어를 상실한 소설가의 그림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霧津)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김승옥만의 ‘무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를 그림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문화人·In] ☞ ③ 아코디언 전설이 된 ‘대통령의 악사’ ☞ ② 신명나게 ‘현실’을 비판한 작가, 오윤 ☞ ① “서화에 생명 불어넣은 50년,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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