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외신엔] ① 미국 땅에 기록된 대한독립만세 …어떻게 알려졌을까?

입력 2019.02.14 (07:04) 수정 2019.02.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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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 4,000~5,0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오후 2시 한 청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학생들이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탑골공원을 나설 때 수만의 군중이 합세했고, 시위 행렬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온 서울이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이후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독립운동이 즉시 광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그들의 외침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해졌다. 100년 전 미국 신문에 실린 '대한독립만세' 소식은 3·1운동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KBS는 100년 전 미국 신문들이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어떤 경로로, 어떻게 보도하게 됐는지 추적해 연속 보도한다.

3월10일 신문1면 헤드라인에 ‘KOREA DECLARED INDEPENDENT’

미국 언론에 한국의 3·1운동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3월10일이다. 1919년 3월10일에만 4개 신문이 "한국이 3월1일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했다.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 1919년 3월10일자 1면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 1919년 3월10일자 1면

특히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은 3월10일자 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KOREA DECLARED INDEPENDENT)고 명시하며 3·1운동 관련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 신문을 포함해 3월10일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한 4개 신문 보도는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해졌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가 상해로부터 전보를 통해 '한국(조선)이 일본에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 기사에 따르면 한국국민독립연맹(Korean National Independence Union) 특별대표 현순이 보낸 전보문에는 “300만 명으로 구성된 한국국민독립연맹 구성원들이 3월1일 오후 1시에 서울,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적혀 있었다.

일본의 방해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 전보를 보내지 못하고, 상해에서 보낸 전보를 통해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게 됐다는 설명도 포함돼 있었다.

3월13일 “한국은 4300년 역사 가진 자치국가”

3월13일부터는 AP통신을 통해 서울에서 직접 전해진 3·1운동 관련 소식도 보도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 타임즈-디스패치 1919년 3월14일자 2면리치몬드 타임즈-디스패치 1919년 3월14일자 2면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지역지 '리치몬드 타임즈-디스패치'는 3월14일자 2면에 '한국이 일본 군국주의에 반기를 들었다'(KOREA NATION DEFIES JAPANESE MILITARISM)는 제목의 기사로 3·1운동 관련 소식을 전했다.

기사에는 '한국은 4300년의 역사를 가진 자치국가다.', '독립선언은 2천만 한국인의 목소리를 대신해 발표됐다', '우리는 위대한 자유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는 등 독립선언서에 담겨있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일 관계에서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신문인 만큼 일부 보도에서는 일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에 부정적인 목소리도 찾아볼 수 있다. 3월15일자 워싱턴 타임스는 2면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한국인들이 폭동을 멈췄다'(LEADERS ARRESTED, KOREAN RIOTS STOP)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쳤다.

기사는 "혼란 끝에 많은 폭도가 체포됐고, 한국 일부 특히 북부지역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로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며 "이번 사태는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포함된 문서가 유통되고,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벌어졌다"고 전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3·1운동을 바라본 모습이 담긴 셈이다.

4월3일 5800자 분량 ‘3·1독립선언서 전문’ 게재

유타주 도시 오그던에서 발행된 '오그던 스탠다드' 4월3일자 14면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했던 3·1독립선언서 전문이 실리기도 했다.

오그던 스탠다드 1919년 4월3일자 14면오그던 스탠다드 1919년 4월3일자 14면

기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3인의 대표이자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를 소개한 후,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는 문구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31독립선언서) 전문을 영어로 전하고 있다.

선언문 말미에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공약 3장에 이어, '단기 4252년 3월'이라는 마지막 문구까지 그대로 들어가 있다. 전문은 영어 글자 수로 5,800여 자, 1,103단어에 달하는 분량이다.

일제 학살 만행도 보도 통해 알려져

애리조나 리퍼블리칸 1919년 3월17일자 1면애리조나 리퍼블리칸 1919년 3월17일자 1면

3월 중순경에는 일본이 3·1운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AP통신을 통해 상해로부터 전해졌다.

애리조나주 피닉스 지역지 애리조나 리퍼블리칸이 3월17일자 1면에 전한 보도에 따르면 3월4일 성천에서는 한국이 30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다. 서울에 있는 일본 신문이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며 보도한 내용을 번역해 전한 것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평양 남쪽 서흥에서는 4명의 일본 경찰이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궁중을 향해 발포해 51명의 한국인이 죽었고, 양덕에서는 20명의 한국인이 소요사태에 가담해 살해당했다.

위스콘신주 매니토윅 지역지 매니토윅 파일롯도 3월20일자 2면에 '30명이 성천에서 살해됐다'(THIRTY SLAIN AT SUNGCHUN)는 부제를 달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네브래스카주 서부 노스플랫의 노스플랫 세미위클리 트리뷴 역시 3월21일자 2면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죽였다'(JAPS KILL KOREANS)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100년 전 미국 신문 ‘한국 독립 선언’ 문구 62회 등장

3·1운동이 100년 전 미국 지역 신문에 실렸었다는 사실은 미 의회도서관 옛날 신문 검색 서비스 크로니클링 아메리카(CHRONICLING AMERICA)를 이용하면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https://chroniclingamerica.loc.gov

이 서비스는 1789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에서 발행된 옛날 신문의 지면을 디지털로 읽어보고 검색해볼 수 있는 서비스다. 검색 가능한 신문 페이지만 1,468만 장에 달한다.

이 크로니클링 아메리카에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korea declare independence)는 문구를 검색해봤다. 62건의 기사가 나왔다. 62건 중 신문 1면에 보도한 기사도 19건이나 됐다.

월별로 살펴보면 3·1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1, 2월에는 단 한 건의 기사도 없다가, 3·1운동이 벌어진 3월에 48건의 기사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이후 4월과 6월에 각각 2건, 3건의 기사가 게재됐고, 나머지 9건이 7월 이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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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4 07:04:36
    • 수정2019-02-16 19:21:31
    취재K
100년 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 4,000~5,0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오후 2시 한 청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학생들이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탑골공원을 나설 때 수만의 군중이 합세했고, 시위 행렬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온 서울이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이후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독립운동이 즉시 광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그들의 외침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해졌다. 100년 전 미국 신문에 실린 '대한독립만세' 소식은 3·1운동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KBS는 100년 전 미국 신문들이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어떤 경로로, 어떻게 보도하게 됐는지 추적해 연속 보도한다.

3월10일 신문1면 헤드라인에 ‘KOREA DECLARED INDEPENDENT’

미국 언론에 한국의 3·1운동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3월10일이다. 1919년 3월10일에만 4개 신문이 "한국이 3월1일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했다.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 1919년 3월10일자 1면
특히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은 3월10일자 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KOREA DECLARED INDEPENDENT)고 명시하며 3·1운동 관련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 신문을 포함해 3월10일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한 4개 신문 보도는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해졌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가 상해로부터 전보를 통해 '한국(조선)이 일본에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레잇팔스데일리트리뷴 기사에 따르면 한국국민독립연맹(Korean National Independence Union) 특별대표 현순이 보낸 전보문에는 “300만 명으로 구성된 한국국민독립연맹 구성원들이 3월1일 오후 1시에 서울,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적혀 있었다.

일본의 방해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 전보를 보내지 못하고, 상해에서 보낸 전보를 통해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게 됐다는 설명도 포함돼 있었다.

3월13일 “한국은 4300년 역사 가진 자치국가”

3월13일부터는 AP통신을 통해 서울에서 직접 전해진 3·1운동 관련 소식도 보도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 타임즈-디스패치 1919년 3월14일자 2면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지역지 '리치몬드 타임즈-디스패치'는 3월14일자 2면에 '한국이 일본 군국주의에 반기를 들었다'(KOREA NATION DEFIES JAPANESE MILITARISM)는 제목의 기사로 3·1운동 관련 소식을 전했다.

기사에는 '한국은 4300년의 역사를 가진 자치국가다.', '독립선언은 2천만 한국인의 목소리를 대신해 발표됐다', '우리는 위대한 자유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는 등 독립선언서에 담겨있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일 관계에서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신문인 만큼 일부 보도에서는 일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에 부정적인 목소리도 찾아볼 수 있다. 3월15일자 워싱턴 타임스는 2면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한국인들이 폭동을 멈췄다'(LEADERS ARRESTED, KOREAN RIOTS STOP)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쳤다.

기사는 "혼란 끝에 많은 폭도가 체포됐고, 한국 일부 특히 북부지역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로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며 "이번 사태는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포함된 문서가 유통되고,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벌어졌다"고 전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3·1운동을 바라본 모습이 담긴 셈이다.

4월3일 5800자 분량 ‘3·1독립선언서 전문’ 게재

유타주 도시 오그던에서 발행된 '오그던 스탠다드' 4월3일자 14면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했던 3·1독립선언서 전문이 실리기도 했다.

오그던 스탠다드 1919년 4월3일자 14면
기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3인의 대표이자 당시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를 소개한 후,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는 문구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31독립선언서) 전문을 영어로 전하고 있다.

선언문 말미에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공약 3장에 이어, '단기 4252년 3월'이라는 마지막 문구까지 그대로 들어가 있다. 전문은 영어 글자 수로 5,800여 자, 1,103단어에 달하는 분량이다.

일제 학살 만행도 보도 통해 알려져

애리조나 리퍼블리칸 1919년 3월17일자 1면
3월 중순경에는 일본이 3·1운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AP통신을 통해 상해로부터 전해졌다.

애리조나주 피닉스 지역지 애리조나 리퍼블리칸이 3월17일자 1면에 전한 보도에 따르면 3월4일 성천에서는 한국이 30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다. 서울에 있는 일본 신문이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며 보도한 내용을 번역해 전한 것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평양 남쪽 서흥에서는 4명의 일본 경찰이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궁중을 향해 발포해 51명의 한국인이 죽었고, 양덕에서는 20명의 한국인이 소요사태에 가담해 살해당했다.

위스콘신주 매니토윅 지역지 매니토윅 파일롯도 3월20일자 2면에 '30명이 성천에서 살해됐다'(THIRTY SLAIN AT SUNGCHUN)는 부제를 달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네브래스카주 서부 노스플랫의 노스플랫 세미위클리 트리뷴 역시 3월21일자 2면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죽였다'(JAPS KILL KOREANS)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100년 전 미국 신문 ‘한국 독립 선언’ 문구 62회 등장

3·1운동이 100년 전 미국 지역 신문에 실렸었다는 사실은 미 의회도서관 옛날 신문 검색 서비스 크로니클링 아메리카(CHRONICLING AMERICA)를 이용하면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https://chroniclingamerica.loc.gov

이 서비스는 1789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에서 발행된 옛날 신문의 지면을 디지털로 읽어보고 검색해볼 수 있는 서비스다. 검색 가능한 신문 페이지만 1,468만 장에 달한다.

이 크로니클링 아메리카에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korea declare independence)는 문구를 검색해봤다. 62건의 기사가 나왔다. 62건 중 신문 1면에 보도한 기사도 19건이나 됐다.

월별로 살펴보면 3·1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1, 2월에는 단 한 건의 기사도 없다가, 3·1운동이 벌어진 3월에 48건의 기사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이후 4월과 6월에 각각 2건, 3건의 기사가 게재됐고, 나머지 9건이 7월 이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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