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외신엔] ③ ‘무력한 한국’ 이미지, 3·1운동이 바꿨다

입력 2019.02.16 (16:04) 수정 2019.02.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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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돌아간 선교사는 100년 전 우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렇게 칭했다.

그가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저항운동'이라고 불렀던 3·1운동은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닿았다. 워싱턴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버지니아, 애리조나, 몬타나 등 미국 방방곡곡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로소 미국에서도 한국(KOREA)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3·1운동의 의미는 전국이 들고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에 독립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10여년 전까지만해도 반만년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었고, 일본의 지배 벗어나기 위해 온국민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한국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의지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미 의회도서관 옛날 신문 검색 서비스 크로니클링 아메리카(CHRONICLING AMERICA)를 이용하면 100년 전 미국 신문 속 한국 독립운동 관련 보도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1910년부터 광복 순간까지 36년간 이어진 독립활동 중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이 한국의 독립 의지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확인해봤다.

KOREA INDEPENDENT 들어간 기사 절반 이상 1919년에 집중


크로니클링 아메리카에서 한국(KOREA)과 독립(INDEPENDENT), 이 두 단어가 함께 포함된 기사를 검색했다. 기간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었던 1910년부터 나라를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 1945년까지로 했다. 이렇게 36년간 '한국'과 '독립'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온 기사는 총 718건이다. 그리고 이 중 절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402건이 1919년 한 해에 등장했던 것으로 집계됐다.

1919년 한 해 등장한 기사를 월별로 살펴보면 1~2월 3건에 불과했다가 3월에만 112건이 나온다. 4월 97건을 포함하면 두 달간 209건. 이해 나온 402건 중 절반 넘는 기사가 3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연도별로 보면 1919년 이듬해인 1920년과 그 이듬해인 1921년에도 각각 50건씩의 '한국 독립' 관련 보도가 나왔다. 미국 신문 속에 한국의 독립을 전하는 소식이 3·1운동을 계기로 급증한 셈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전 'GOOD-BY, KOREA!' 등장

조선 독립 관련 보도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3·1운동 이전 시기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한일강제병합으로 한국이 주권을 상실한 1910년 8월29일 전후로 보도가 집중돼 있다.

강제병합이 발표되기 일주일 전인 1910년 8월22일 워싱턴 헤럴드는 'GOOD-BY, KOREA!'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국의 상황을 전했다. 기사 제목이 '한국(조선)이여 안녕'인 것이다.

워싱턴 헤럴드 1910년 8월22일자 4면워싱턴 헤럴드 1910년 8월22일자 4면

기사 속에서 한국은 '현대화 과정에 대한 요구에 귀를 닫아'온 '은둔의 왕국'으로 묘사된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준비가 됐다고 발표했다는 소식 뒤에는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한국인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 표현돼 있다. 당시 암울한 조선의 상황을 보여준다.

일본의 현대화와 상공업 발전, 대륙을 향한 영토 확장 의지 등 일본의 필요 때문에 한국이 선택됐다는 것과 일본이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세관과 관청을 흡수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우스다코타주 래피드시티 지역지 'The Black Hills union and western stock review'는 9월2일자 2면에 '한국, 일본의 지역으로 편입'(COREA IS NOW A PROVINCE OF JAPAN)이라는 제목의 2문장짜리 단신 기사가 실려 있다. 600년 이상 독립국이었던 한국이 이제부터 일본의 지역으로 편입됐다는 내용이다.

1919년 3월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한일강제병합이 발표된 1910년을 전후로 미국 신문에 등장한 한국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이후 급증한 한국 관련 기사 속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은 10여 년 전과 180도 달랐다.

1919년에 미국 신문 속에 나온 'KOREA INDEPENDENT'가 포함된 보도만 402건이다. 이 400여 건의 기사 중 1면에 보도된 기사만 129건에 달했다.


129건을 전부 살펴 3·1운동과 독립활동을 직접 언급한 보도가 얼마나 될지 확인해보니, 60%에 달하는 76건의 기사가 3·1운동과 독립선언, 한국인들의 만세운동 소식을 직접 전하고 있었다.

와치맨 앤 서드런 1919년 3월22일자 1면와치맨 앤 서드런 1919년 3월22일자 1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도시 섬터 지역지 '와치맨 앤 서드런'의 1919년 3월22일자 1면에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Korea's Fight Most Wonderful)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미국인 선교사는 그곳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평화적 저항운동이라고 설명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시 벌어진 3·1운동이 얼마나 평화적인 저항운동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129건 중 35건에 달하는 파리강화회의 관련 기사 역시 한국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독립운동 관련 기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이 1919년 5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접수했다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탄원서에는 한국이 독립국이고 1910년 8월 체결된 일본과의 (강제병합)조약을 무효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결국, 129건의 보도 중 미 의회에서 아일랜드, 필리핀과 함께 한국 독립 문제를 논의한 기사 등 기타로 분류한 18건을 제외한 111건의 보도가 모두 한국의 독립의지를 미국에 널리 알린 보도였다.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력한 코리아'에서 '독립을 위한 저항세력'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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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 외신엔] ③ ‘무력한 한국’ 이미지, 3·1운동이 바꿨다
    • 입력 2019-02-16 16:04:40
    • 수정2019-02-16 19:21:09
    취재K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돌아간 선교사는 100년 전 우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렇게 칭했다.

그가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저항운동'이라고 불렀던 3·1운동은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닿았다. 워싱턴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버지니아, 애리조나, 몬타나 등 미국 방방곡곡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로소 미국에서도 한국(KOREA)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3·1운동의 의미는 전국이 들고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에 독립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10여년 전까지만해도 반만년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었고, 일본의 지배 벗어나기 위해 온국민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한국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의지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미 의회도서관 옛날 신문 검색 서비스 크로니클링 아메리카(CHRONICLING AMERICA)를 이용하면 100년 전 미국 신문 속 한국 독립운동 관련 보도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1910년부터 광복 순간까지 36년간 이어진 독립활동 중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이 한국의 독립 의지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확인해봤다.

KOREA INDEPENDENT 들어간 기사 절반 이상 1919년에 집중


크로니클링 아메리카에서 한국(KOREA)과 독립(INDEPENDENT), 이 두 단어가 함께 포함된 기사를 검색했다. 기간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었던 1910년부터 나라를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 1945년까지로 했다. 이렇게 36년간 '한국'과 '독립'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온 기사는 총 718건이다. 그리고 이 중 절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402건이 1919년 한 해에 등장했던 것으로 집계됐다.

1919년 한 해 등장한 기사를 월별로 살펴보면 1~2월 3건에 불과했다가 3월에만 112건이 나온다. 4월 97건을 포함하면 두 달간 209건. 이해 나온 402건 중 절반 넘는 기사가 3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연도별로 보면 1919년 이듬해인 1920년과 그 이듬해인 1921년에도 각각 50건씩의 '한국 독립' 관련 보도가 나왔다. 미국 신문 속에 한국의 독립을 전하는 소식이 3·1운동을 계기로 급증한 셈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전 'GOOD-BY, KOREA!' 등장

조선 독립 관련 보도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3·1운동 이전 시기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한일강제병합으로 한국이 주권을 상실한 1910년 8월29일 전후로 보도가 집중돼 있다.

강제병합이 발표되기 일주일 전인 1910년 8월22일 워싱턴 헤럴드는 'GOOD-BY, KOREA!'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국의 상황을 전했다. 기사 제목이 '한국(조선)이여 안녕'인 것이다.

워싱턴 헤럴드 1910년 8월22일자 4면
기사 속에서 한국은 '현대화 과정에 대한 요구에 귀를 닫아'온 '은둔의 왕국'으로 묘사된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준비가 됐다고 발표했다는 소식 뒤에는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한국인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 표현돼 있다. 당시 암울한 조선의 상황을 보여준다.

일본의 현대화와 상공업 발전, 대륙을 향한 영토 확장 의지 등 일본의 필요 때문에 한국이 선택됐다는 것과 일본이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세관과 관청을 흡수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우스다코타주 래피드시티 지역지 'The Black Hills union and western stock review'는 9월2일자 2면에 '한국, 일본의 지역으로 편입'(COREA IS NOW A PROVINCE OF JAPAN)이라는 제목의 2문장짜리 단신 기사가 실려 있다. 600년 이상 독립국이었던 한국이 이제부터 일본의 지역으로 편입됐다는 내용이다.

1919년 3월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한일강제병합이 발표된 1910년을 전후로 미국 신문에 등장한 한국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이후 급증한 한국 관련 기사 속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은 10여 년 전과 180도 달랐다.

1919년에 미국 신문 속에 나온 'KOREA INDEPENDENT'가 포함된 보도만 402건이다. 이 400여 건의 기사 중 1면에 보도된 기사만 129건에 달했다.


129건을 전부 살펴 3·1운동과 독립활동을 직접 언급한 보도가 얼마나 될지 확인해보니, 60%에 달하는 76건의 기사가 3·1운동과 독립선언, 한국인들의 만세운동 소식을 직접 전하고 있었다.

와치맨 앤 서드런 1919년 3월22일자 1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도시 섬터 지역지 '와치맨 앤 서드런'의 1919년 3월22일자 1면에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Korea's Fight Most Wonderful)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미국인 선교사는 그곳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평화적 저항운동이라고 설명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시 벌어진 3·1운동이 얼마나 평화적인 저항운동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129건 중 35건에 달하는 파리강화회의 관련 기사 역시 한국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독립운동 관련 기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이 1919년 5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접수했다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탄원서에는 한국이 독립국이고 1910년 8월 체결된 일본과의 (강제병합)조약을 무효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결국, 129건의 보도 중 미 의회에서 아일랜드, 필리핀과 함께 한국 독립 문제를 논의한 기사 등 기타로 분류한 18건을 제외한 111건의 보도가 모두 한국의 독립의지를 미국에 널리 알린 보도였다.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력한 코리아'에서 '독립을 위한 저항세력'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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