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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외신엔] ⑤ 한인사회 박지성? 대한독립 알린 ‘언성 히어로’
입력 2019.02.16 (16:04) 수정 2019.02.16 (19:21) 취재K
[100년전 외신엔] ⑤ 한인사회 박지성? 대한독립 알린 ‘언성 히어로’
3‧1운동으로 한반도가 들끓고 있을 때 미국 땅에서도 독립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 미주 한인사회의 리더로 한인회를 이끌었던 안창호, 한국에서 독립신문을 만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활발한 활동을 보인 서재필 등은 미국 땅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 외에도 미국 신문 속에 등장해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3·1운동'과 '대한독립만세'를 알리기 위해 힘쓴 미주 한인 사회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이 있다.

'태극기' 대신 '펜' 든 독립투사…헨리정을 아시나요?

100여 년 전이던 1919년 3월, 3·1운동 초기 미국 신문 기사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늘 등장하는 이름이 'Henry Chung'(헨리 정·1920년 헨리 대영으로 개명·정한경)이다. 3·1운동이 미국에 처음 전해진 3월10일경 기사를 보면 한국인들이 3월1일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과 함께 헨리 정이 이 전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여권 발급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지역지 '오마하 데일리 비'(Omaha daily bee)는 1919년 3월 16일자 9면에 'PASSPORT TO PARIS DENIED TO DR CHUNG'(정 박사의 파리행 여권이 거절당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헨리 정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한 파리행이 좌절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마하 데일리 비 1919년 3월 16일자 9면오마하 데일리 비 1919년 3월 16일자 9면

기사는 헨리 정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본이 경찰과 군인들을 동원해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 의지가 없고 일본의 지배를 받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강제로 서명토록 하고 있다. 서명을 거절한 사람들은 체포돼 감옥에 갇힌다." 헨리 정이 인터뷰를 통해 3·1운동이 벌어지는 한국의 실상을 전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와 미국 신문 기사 등에 따르면 헨리 정은 1905년 14살의 나이에 미국에 도착해 1917년 네브래스카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18년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사회학‧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헨리 정은 갓 석사 학위를 취득한 28살의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당시 이승만이 윌슨에게 제출한 '위임통치안'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차 한인회의 개최를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주 독립운동은 외교 선전 활동이 주를 이뤘는데, 헨리 정은 책을 쓰는 저술활동 등을 통해 미국 언론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1919년 '미국의 동양 정책'과 '한국 조약 유취'를 뉴욕에서 발간했고, 1921년에는 '한국의 사정'(Case of Korea)을 출간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 1921년 7월27일자 4면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 1921년 7월27일자 4면

한국의 사정은 미국 신문에 광고를 내는가 하면 한 신문 신간소개 코너에 서평도 실렸다. 미주리주 콜롬비아 지역지 '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Columbia evening Missourian)의 1921년 7월 27일자 4면의 새 책 코너에 헨리 정의 저서 '한국의 사정' 소개 기사가 실린 것이다.

책 소개 기사에는 "만약 이 책에 나온 한국의 상황이 사실이라면 일본인들은 가장 야만적인 정부 중 하나일 것이다. 인류를 위해 강대국들이 단결해 벨기에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끔찍한 일본의 활동을 중단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책 소개 기사만으로 일본이 한국을 야만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상을 고발한 독립활동이 된 셈이다.

헨리 정은 광복 이후인 1948년 미 육군 군무원 신분으로 44년 만에 한국에 귀국해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감독했다. 이듬해인 1949년 4월에는 초대 주일 한국 연락사무소 대사로 도쿄에 부임한 바 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살다가 1985년 생을 마감했다.

“한국은 프라이팬 속 물고기, 일본은 요리사”Yoon, 일본 만행 널리 알려

한국의 상황을 프라이팬 속 살아있는 물고기에 비유한 글이 미국 신문에 실렸다. 7월 18일, 이스트 미시시피 타임스(East Mississippi times)에 이런 글을 기고한 사람은 P. K. Yoon, 독립운동가 윤병구 목사다.

윤 목사는 “한국은 우리의 자유와 조국을 되찾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심했다”며 “신이여 도와달라”고 말한다.

1903년 선교사 자격으로 하와이로 간 그는 하와이 거주 첫 한인 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한다. 1905년에는 포츠머스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이승만과 함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등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맡으며 대외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의 노력은 언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브닝 스타(Evening Star) 6월 19일 10면이브닝 스타(Evening Star) 6월 19일 10면

윤병구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알리고자 했다. 6월 19일 ‘이브닝 스타(Evening Star)’는 “한국의 소녀들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그의 발언을 보도했다.

윤병구는 한국에서 받은 전보를 전했다. 일본군에 붙잡힌 소녀들이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자행됐고, 일본의 간수와 경찰은 소녀들의 가슴에 낙인을 찍었다.

192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의 뒤를 이어 대한인국민회 회장에 취임한 그는 성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후 리들리와 뉴욕 등에서 목회 활동과 독립운동을 후원하다 1949년 2월 해방된 조국을 찾는다. 46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그는 그해 6월, 69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생을 마친다.

이승만, 안창호 외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글을 쓰고, 널리 전파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대한독립을 전세계에 타전한 백년 전 뉴스들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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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6 (16:04)
    • 수정 2019.02.16 (19:21)
    취재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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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한반도가 들끓고 있을 때 미국 땅에서도 독립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 미주 한인사회의 리더로 한인회를 이끌었던 안창호, 한국에서 독립신문을 만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활발한 활동을 보인 서재필 등은 미국 땅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 외에도 미국 신문 속에 등장해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3·1운동'과 '대한독립만세'를 알리기 위해 힘쓴 미주 한인 사회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이 있다.

'태극기' 대신 '펜' 든 독립투사…헨리정을 아시나요?

100여 년 전이던 1919년 3월, 3·1운동 초기 미국 신문 기사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늘 등장하는 이름이 'Henry Chung'(헨리 정·1920년 헨리 대영으로 개명·정한경)이다. 3·1운동이 미국에 처음 전해진 3월10일경 기사를 보면 한국인들이 3월1일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과 함께 헨리 정이 이 전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여권 발급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지역지 '오마하 데일리 비'(Omaha daily bee)는 1919년 3월 16일자 9면에 'PASSPORT TO PARIS DENIED TO DR CHUNG'(정 박사의 파리행 여권이 거절당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헨리 정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한 파리행이 좌절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마하 데일리 비 1919년 3월 16일자 9면오마하 데일리 비 1919년 3월 16일자 9면

기사는 헨리 정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본이 경찰과 군인들을 동원해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 의지가 없고 일본의 지배를 받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강제로 서명토록 하고 있다. 서명을 거절한 사람들은 체포돼 감옥에 갇힌다." 헨리 정이 인터뷰를 통해 3·1운동이 벌어지는 한국의 실상을 전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와 미국 신문 기사 등에 따르면 헨리 정은 1905년 14살의 나이에 미국에 도착해 1917년 네브래스카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18년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사회학‧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헨리 정은 갓 석사 학위를 취득한 28살의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당시 이승만이 윌슨에게 제출한 '위임통치안'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차 한인회의 개최를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주 독립운동은 외교 선전 활동이 주를 이뤘는데, 헨리 정은 책을 쓰는 저술활동 등을 통해 미국 언론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1919년 '미국의 동양 정책'과 '한국 조약 유취'를 뉴욕에서 발간했고, 1921년에는 '한국의 사정'(Case of Korea)을 출간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 1921년 7월27일자 4면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 1921년 7월27일자 4면

한국의 사정은 미국 신문에 광고를 내는가 하면 한 신문 신간소개 코너에 서평도 실렸다. 미주리주 콜롬비아 지역지 '콜롬비아 이브닝 미주리안'(Columbia evening Missourian)의 1921년 7월 27일자 4면의 새 책 코너에 헨리 정의 저서 '한국의 사정' 소개 기사가 실린 것이다.

책 소개 기사에는 "만약 이 책에 나온 한국의 상황이 사실이라면 일본인들은 가장 야만적인 정부 중 하나일 것이다. 인류를 위해 강대국들이 단결해 벨기에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끔찍한 일본의 활동을 중단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책 소개 기사만으로 일본이 한국을 야만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상을 고발한 독립활동이 된 셈이다.

헨리 정은 광복 이후인 1948년 미 육군 군무원 신분으로 44년 만에 한국에 귀국해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감독했다. 이듬해인 1949년 4월에는 초대 주일 한국 연락사무소 대사로 도쿄에 부임한 바 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살다가 1985년 생을 마감했다.

“한국은 프라이팬 속 물고기, 일본은 요리사”Yoon, 일본 만행 널리 알려

한국의 상황을 프라이팬 속 살아있는 물고기에 비유한 글이 미국 신문에 실렸다. 7월 18일, 이스트 미시시피 타임스(East Mississippi times)에 이런 글을 기고한 사람은 P. K. Yoon, 독립운동가 윤병구 목사다.

윤 목사는 “한국은 우리의 자유와 조국을 되찾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심했다”며 “신이여 도와달라”고 말한다.

1903년 선교사 자격으로 하와이로 간 그는 하와이 거주 첫 한인 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한다. 1905년에는 포츠머스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이승만과 함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등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맡으며 대외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의 노력은 언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브닝 스타(Evening Star) 6월 19일 10면이브닝 스타(Evening Star) 6월 19일 10면

윤병구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알리고자 했다. 6월 19일 ‘이브닝 스타(Evening Star)’는 “한국의 소녀들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그의 발언을 보도했다.

윤병구는 한국에서 받은 전보를 전했다. 일본군에 붙잡힌 소녀들이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자행됐고, 일본의 간수와 경찰은 소녀들의 가슴에 낙인을 찍었다.

192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의 뒤를 이어 대한인국민회 회장에 취임한 그는 성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후 리들리와 뉴욕 등에서 목회 활동과 독립운동을 후원하다 1949년 2월 해방된 조국을 찾는다. 46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그는 그해 6월, 69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생을 마친다.

이승만, 안창호 외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글을 쓰고, 널리 전파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대한독립을 전세계에 타전한 백년 전 뉴스들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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