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외신엔] ④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미국 신문에 235건 언급

입력 2019.02.16 (16:04) 수정 2019.02.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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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Rhee(닥터 리), 100년 전 미국 신문에 실린 한국 독립운동 기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미국 내에서 입지를 키운 이승만은, 해외에서 한국의 참상을 알리는 데 힘썼다.

이승만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열강에 지지를 호소한다. 스스로 취재원을 자처하며 독립운동의 외교적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 신문 기사들에서는 "리 박사에 따르면" 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1910년~1945년 미국 신문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사는 총 235건이다. 그중 절반이 넘는 131건이 1919년에 집중돼 있다. 3·1 운동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이승만의 활동도 활발해졌음을 알 수 있다.


좌절된 파리행…편지로 고발한 ‘일본의 만행’
조국에서는 ‘대한독립 만세’가 울리던 1919년 3월,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헨리 정(정한경) 박사와 함께 파리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3월 10일, 미국 캔자스주의 지역신문 ‘토피카 스테이트 저널(The Topeka state journal)’은 한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1면 기사로 전한다. 기사는 “한국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 인정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승만 박사와 헨리 정(정한경) 박사가 워싱턴에서 파리행 여권을 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추대된 이승만과 헨리 정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기대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여권 발급을 허락하지 않아 결구 파리행은 좌절됐다.

‘이브닝 퍼블릭 리거’ 3월 13일 1면‘이브닝 퍼블릭 리거’ 3월 13일 1면

파리행이 좌절된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낸다.

3월 13일, 이브닝 퍼블릭 리거(Evening public ledger)는 “한국을 도와주세요" 미국에 호소(Appeals to US to aid Koreans)라는 1면 기사를 통해 이 내용을 전한다. 이승만은 “조국에서 일본에 반기를 든 동포 수천 명이 살해당하고 잔인하게 고문당했다”며 이런 ‘일본의 만행’에 항의하고 있다.

"한국이 지지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독립활동에서 논란이 된 것 중 하나가 ‘위임통치’ 문제다. 당시 이승만과 헨리 정은 “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애리조나 리퍼블리칸’ 3월 17일 1면‘애리조나 리퍼블리칸’ 3월 17일 1면

당시 언론은 이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룬다. 3월 17일 애리조나 리퍼블리칸(The Arizona Republican)은 1면에서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논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국제연맹이 한국이 완전한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결정할 때까지 위임통치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앨버커키 모닝 저널(Albuquerque morning journal)’은 “한국이 자유를 위해 윌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파리강화회담에 보내진 편지에는 "한국이 일본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임시정부 ‘국무장관’ 이승만

‘엘파소 헤럴드’4월 4일 1면‘엘파소 헤럴드’4월 4일 1면

4월에는 만주와 한성 등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이에 대한 소식이 이어진다. 4월 4일, ‘엘파소 헤럴드’는 “한국 혁명군(rebels), 정부 수립”(Korean Rebels set up government)이라는 1면 기사로 만주 임시정부 수립을 알린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장관 이승만, 내무장관 안창호 등 내각 구성과 함께 “600명의 한인 결사대가 만주부터 두만강을 건너 진격해 가고 있으며, 한국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약했다”고 전했다.

이후 언론에서 이승만의 호칭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불린다. 4월 5일, ‘이브닝 퍼블릭 리거(Evening public ledger)’ “기독교인이 한국을 통치한다”Christians rule Korean republic”며 ‘국무총리’ 이승만의 발언을 전한다. 기사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각 구성원 8명 중 7명이 기독교인”이라며 자연스럽게 미국식 정부를 따를 것(our government will naturally follow the American form of government)이라고 말한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

‘채터누가 뉴스’ 6월 16일‘채터누가 뉴스’ 6월 16일

6월에는 대통령 당선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 테네시주 지역신문‘채터누가 뉴스(The Chattanooga news)’는 6월 16일 ‘대한 공화국’ (The Korean Republic)이라는 칼럼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7년의 투옥과 고문 끝에 이승만 박사가 한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칼럼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는 한국의 참상을 말한다. “한국인들은 무기도 없이, 오로지 그들의 목소리와 죽을 용기로 혁명을 위해 싸웠다”고 “그들은 자신의 새 공화국 선언문을 비밀리에 제작해야 했고, 대통령을 선출하고도 소식을 전해줄 수조차 없었다”고 설명한다. 같은 칼럼은 이틀 뒤 그레잇팔스트리뷴에도 실린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의 임시 대통령(provisional president of Korea)’,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등으로 불렸다.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 호칭은 임시정부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로 임명했다.
해외에서 이승만은 자신을‘대통령’으로 소개했지만, 이는 국무총리 제도인 임시정부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런 갈등은 당시 안창호와 주고받은 전보에도 담겨있다.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된다. 임시정부는 9월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로 바꾸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3·1 운동 이후 집중됐던 한국 독립운동 보도는 해가 바뀌며 급격히 줄어든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활동 역시 1922년 9월 8일 '마우이 뉴스(The Maui news) 기사가 마지막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탄핵을 당한 후에도 ‘전 대통령’, ‘첫 번째 대통령’ 등으로 미국 언론에 소개됐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언제로 봐야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다. 임시정부가 생긴 1919년과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1948년에 대한 이견이다. 과연 이승만 스스로는 건국의 시점을 언제로 생각하고 있을까? 100년 전 이승만은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소개하고 있다.
3·1만세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에 대한 염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이미 시작된 것 아니었을까.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의 행보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연함이 어떻게 먼 미국까지 자세히 전해질 수 있었는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관기사]
[100년전 외신엔] ① 미국 땅에 기록된 대한독립만세...어떻게 알려졌을까?
[100년전 외신엔] ② "독립선언 든 소녀의 손목을 잘랐다" 삼일절 목격담
[100년전 외신엔] ③ ‘무력한 한국’ 이미지, 3·1운동이 바꿨다
[100년전 외신엔] ④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미국 신문에 235건 언급
[100년전 외신엔] ⑤ 한인사회 박지성? 대한독립 알린 '언성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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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 외신엔] ④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미국 신문에 235건 언급
    • 입력 2019-02-16 16:04:39
    • 수정2019-02-19 11:34:46
    취재K
Dr. Rhee(닥터 리), 100년 전 미국 신문에 실린 한국 독립운동 기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미국 내에서 입지를 키운 이승만은, 해외에서 한국의 참상을 알리는 데 힘썼다.

이승만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열강에 지지를 호소한다. 스스로 취재원을 자처하며 독립운동의 외교적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 신문 기사들에서는 "리 박사에 따르면" 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1910년~1945년 미국 신문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사는 총 235건이다. 그중 절반이 넘는 131건이 1919년에 집중돼 있다. 3·1 운동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이승만의 활동도 활발해졌음을 알 수 있다.


좌절된 파리행…편지로 고발한 ‘일본의 만행’
조국에서는 ‘대한독립 만세’가 울리던 1919년 3월,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헨리 정(정한경) 박사와 함께 파리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3월 10일, 미국 캔자스주의 지역신문 ‘토피카 스테이트 저널(The Topeka state journal)’은 한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1면 기사로 전한다. 기사는 “한국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 인정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승만 박사와 헨리 정(정한경) 박사가 워싱턴에서 파리행 여권을 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추대된 이승만과 헨리 정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기대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여권 발급을 허락하지 않아 결구 파리행은 좌절됐다.

‘이브닝 퍼블릭 리거’ 3월 13일 1면
파리행이 좌절된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낸다.

3월 13일, 이브닝 퍼블릭 리거(Evening public ledger)는 “한국을 도와주세요" 미국에 호소(Appeals to US to aid Koreans)라는 1면 기사를 통해 이 내용을 전한다. 이승만은 “조국에서 일본에 반기를 든 동포 수천 명이 살해당하고 잔인하게 고문당했다”며 이런 ‘일본의 만행’에 항의하고 있다.

"한국이 지지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독립활동에서 논란이 된 것 중 하나가 ‘위임통치’ 문제다. 당시 이승만과 헨리 정은 “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애리조나 리퍼블리칸’ 3월 17일 1면
당시 언론은 이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룬다. 3월 17일 애리조나 리퍼블리칸(The Arizona Republican)은 1면에서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논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국제연맹이 한국이 완전한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결정할 때까지 위임통치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앨버커키 모닝 저널(Albuquerque morning journal)’은 “한국이 자유를 위해 윌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파리강화회담에 보내진 편지에는 "한국이 일본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임시정부 ‘국무장관’ 이승만

‘엘파소 헤럴드’4월 4일 1면
4월에는 만주와 한성 등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이에 대한 소식이 이어진다. 4월 4일, ‘엘파소 헤럴드’는 “한국 혁명군(rebels), 정부 수립”(Korean Rebels set up government)이라는 1면 기사로 만주 임시정부 수립을 알린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장관 이승만, 내무장관 안창호 등 내각 구성과 함께 “600명의 한인 결사대가 만주부터 두만강을 건너 진격해 가고 있으며, 한국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약했다”고 전했다.

이후 언론에서 이승만의 호칭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불린다. 4월 5일, ‘이브닝 퍼블릭 리거(Evening public ledger)’ “기독교인이 한국을 통치한다”Christians rule Korean republic”며 ‘국무총리’ 이승만의 발언을 전한다. 기사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각 구성원 8명 중 7명이 기독교인”이라며 자연스럽게 미국식 정부를 따를 것(our government will naturally follow the American form of government)이라고 말한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

‘채터누가 뉴스’ 6월 16일
6월에는 대통령 당선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 테네시주 지역신문‘채터누가 뉴스(The Chattanooga news)’는 6월 16일 ‘대한 공화국’ (The Korean Republic)이라는 칼럼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7년의 투옥과 고문 끝에 이승만 박사가 한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칼럼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는 한국의 참상을 말한다. “한국인들은 무기도 없이, 오로지 그들의 목소리와 죽을 용기로 혁명을 위해 싸웠다”고 “그들은 자신의 새 공화국 선언문을 비밀리에 제작해야 했고, 대통령을 선출하고도 소식을 전해줄 수조차 없었다”고 설명한다. 같은 칼럼은 이틀 뒤 그레잇팔스트리뷴에도 실린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의 임시 대통령(provisional president of Korea)’,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등으로 불렸다.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 호칭은 임시정부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로 임명했다.
해외에서 이승만은 자신을‘대통령’으로 소개했지만, 이는 국무총리 제도인 임시정부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런 갈등은 당시 안창호와 주고받은 전보에도 담겨있다.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된다. 임시정부는 9월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로 바꾸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3·1 운동 이후 집중됐던 한국 독립운동 보도는 해가 바뀌며 급격히 줄어든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활동 역시 1922년 9월 8일 '마우이 뉴스(The Maui news) 기사가 마지막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탄핵을 당한 후에도 ‘전 대통령’, ‘첫 번째 대통령’ 등으로 미국 언론에 소개됐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언제로 봐야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다. 임시정부가 생긴 1919년과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1948년에 대한 이견이다. 과연 이승만 스스로는 건국의 시점을 언제로 생각하고 있을까? 100년 전 이승만은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소개하고 있다.
3·1만세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에 대한 염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이미 시작된 것 아니었을까.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의 행보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연함이 어떻게 먼 미국까지 자세히 전해질 수 있었는지, KBS [100년 전 외신엔] 연속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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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외신엔] ① 미국 땅에 기록된 대한독립만세...어떻게 알려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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