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임시정부④] “권총을 보여주시오”…자금 확보 고군분투기

입력 2019.04.27 (07:07) 수정 2019.04.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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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
-「대한민국 임시헌장」


일종의 망명 신세였지만, 임시정부는 엄연한 정부를 표방했습니다. '헌법'격인 임시헌장은 현행 헌법에 견줘도 될 만큼 내용이 알찬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중 제6조는 국민의 납세 의무를 규정했습니다. 국민에게 세금을 걷어 재정을 충당할 목표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 임시정부 살림살이 들여다보니…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사실 중국에 있는 정부에게 온전한 과세는 달성하기 힘든 목표였습니다. 임정의 재정난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1938년 임시정부의 세입세출 예산서를 볼까요. 안타깝지만, 중국의 원조가 없으면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중국에 재원을 의존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정부 조직에 재무과를 만들고, 전국 8도에 원격 행정망인 '연통제'를 설치해 모금 형태의 과세로 국고를 채우려 했습니다. 지금의 주민세와 비슷한 인구세를 걷고, 그래도 부족한 재정은 국채와 흡사한 공채(公債)를 발행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국내로 파견원을 지속해서 보냅니다.

■ "권총을 보여주면 돈을 내주겠다"

파견원의 최대 임무는 운영자금을 걷어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초기, 자금을 확보하려는 파견원들의 고군분투는 뜨거웠습니다. 허나 돈이 나올 '구멍'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독립자금을 내줄 형편이 될 부호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난관에 부닥칩니다. 일제 침탈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구한말 이후, 소수의 민족자본가나 부호들은 지속해서 갹출을 요구받았습니다. 의병 거사를 시작으로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임시정부까지…돈을 내달라는 요구가 잇따랐던 겁니다.

협조할 생각이 없던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항일자금을 제공할 생각이 있는 경우라도 그냥 돈을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 임정 파견원인 걸 믿게 해달라'와 같은 증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부호들로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고국의 동포들에게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용도를 증명해야 했다. 파견원들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증표를 제시했다. [출처 : 한글박물관·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고국의 동포들에게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용도를 증명해야 했다. 파견원들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증표를 제시했다. [출처 : 한글박물관·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다양한 증표가 있었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증표는 권총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권총과 달리 서류는 얼마든지 위조나 변조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교수(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기꾼이 얼마든지 임시정부나 독립군을 사칭해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죠. 그때 중요한 증거가 됐던 것이 권총입니다. 그 시절 권총은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거나 독립자금을 구하러 임시정부 등에서 들어온 요원이라는 상징적인 증거였습니다."

■ 일제, 임정의 돈줄을 틀어막다

임시정부의 각종 증표나 임명장, 때로는 권총을 제시하면서 자금을 모으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일제는 이를 지속해서 단속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검거를 피한 경우는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체포된 이들은 일제 판결문에 행적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판결문에 남은 한 사례로 1919년 9월 전남 강진군에서 검거된 장치훈(張致勳)이 있습니다. 장치훈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담배 소매상을 하던 24살 청년이었습니다.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치훈은 임시정부가 파견원으로 보낸 나기호(羅基瑚)를 만나게 됩니다.

나기호는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명의의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라는 증표를 들고 있었습니다. 신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국 회복을 위해 필요한 외교 군사비 징모를 위해 나기호를 경기도 애국금수합원으로 파송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기호는 장치훈에게 임시정부로 보낼 자금을 함께 모으자고 부탁합니다. 나기호와 장치훈은 함께 전남 목포까지 동행한 뒤, 나기호는 제주, 장치훈은 강진으로 갔습니다. 장치훈은 강진면 남성리와 서산리의 교회당에서 증표를 제시하며 독립자금을 걷다 체포되고 맙니다. 장치훈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이 공훈 근거로 인정돼 지난 2016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됩니다.

애초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장치훈을 기소했으나, 대구복심법원은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총독부 제령 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해 징역 8월을 선고한다.애초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장치훈을 기소했으나, 대구복심법원은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총독부 제령 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해 징역 8월을 선고한다.

임시정부의 자금을 확보하려다 체포된 사례는 판결문에 장치훈 외에도 다수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임정 파견원도 있었고, 국내에서 자생한 임정 조력자들도 있었습니다. 송금까지 성공한 경우와 모금 도중에 체포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1921년을 기점으로 임시정부의 모금 기반이 됐던 '연통제' 조직이 사실상 와해한 것은 분명합니다. 일제가 임정의 돈줄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겁니다. 고국으로부터의 돈줄이 끊기면서 청사 임대료와 통역관 월급 내기도 빠듯했다는 임정의 재정난은 본격화됩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⑤] 1920년 독립전쟁 선포를 아십니까?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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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 임시정부④] “권총을 보여주시오”…자금 확보 고군분투기
    • 입력 2019-04-27 07:07:17
    • 수정2019-04-27 13:47:44
    취재K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
-「대한민국 임시헌장」


일종의 망명 신세였지만, 임시정부는 엄연한 정부를 표방했습니다. '헌법'격인 임시헌장은 현행 헌법에 견줘도 될 만큼 내용이 알찬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중 제6조는 국민의 납세 의무를 규정했습니다. 국민에게 세금을 걷어 재정을 충당할 목표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 임시정부 살림살이 들여다보니…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사실 중국에 있는 정부에게 온전한 과세는 달성하기 힘든 목표였습니다. 임정의 재정난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1938년 임시정부의 세입세출 예산서를 볼까요. 안타깝지만, 중국의 원조가 없으면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중국에 재원을 의존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정부 조직에 재무과를 만들고, 전국 8도에 원격 행정망인 '연통제'를 설치해 모금 형태의 과세로 국고를 채우려 했습니다. 지금의 주민세와 비슷한 인구세를 걷고, 그래도 부족한 재정은 국채와 흡사한 공채(公債)를 발행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국내로 파견원을 지속해서 보냅니다.

■ "권총을 보여주면 돈을 내주겠다"

파견원의 최대 임무는 운영자금을 걷어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초기, 자금을 확보하려는 파견원들의 고군분투는 뜨거웠습니다. 허나 돈이 나올 '구멍'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독립자금을 내줄 형편이 될 부호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난관에 부닥칩니다. 일제 침탈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구한말 이후, 소수의 민족자본가나 부호들은 지속해서 갹출을 요구받았습니다. 의병 거사를 시작으로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임시정부까지…돈을 내달라는 요구가 잇따랐던 겁니다.

협조할 생각이 없던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항일자금을 제공할 생각이 있는 경우라도 그냥 돈을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 임정 파견원인 걸 믿게 해달라'와 같은 증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부호들로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고국의 동포들에게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용도를 증명해야 했다. 파견원들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증표를 제시했다. [출처 : 한글박물관·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다양한 증표가 있었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증표는 권총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권총과 달리 서류는 얼마든지 위조나 변조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교수(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기꾼이 얼마든지 임시정부나 독립군을 사칭해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죠. 그때 중요한 증거가 됐던 것이 권총입니다. 그 시절 권총은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거나 독립자금을 구하러 임시정부 등에서 들어온 요원이라는 상징적인 증거였습니다."

■ 일제, 임정의 돈줄을 틀어막다

임시정부의 각종 증표나 임명장, 때로는 권총을 제시하면서 자금을 모으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일제는 이를 지속해서 단속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검거를 피한 경우는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체포된 이들은 일제 판결문에 행적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판결문에 남은 한 사례로 1919년 9월 전남 강진군에서 검거된 장치훈(張致勳)이 있습니다. 장치훈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담배 소매상을 하던 24살 청년이었습니다.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치훈은 임시정부가 파견원으로 보낸 나기호(羅基瑚)를 만나게 됩니다.

나기호는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명의의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라는 증표를 들고 있었습니다. 신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국 회복을 위해 필요한 외교 군사비 징모를 위해 나기호를 경기도 애국금수합원으로 파송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기호는 장치훈에게 임시정부로 보낼 자금을 함께 모으자고 부탁합니다. 나기호와 장치훈은 함께 전남 목포까지 동행한 뒤, 나기호는 제주, 장치훈은 강진으로 갔습니다. 장치훈은 강진면 남성리와 서산리의 교회당에서 증표를 제시하며 독립자금을 걷다 체포되고 맙니다. 장치훈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이 공훈 근거로 인정돼 지난 2016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됩니다.

애초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장치훈을 기소했으나, 대구복심법원은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총독부 제령 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해 징역 8월을 선고한다.
임시정부의 자금을 확보하려다 체포된 사례는 판결문에 장치훈 외에도 다수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임정 파견원도 있었고, 국내에서 자생한 임정 조력자들도 있었습니다. 송금까지 성공한 경우와 모금 도중에 체포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1921년을 기점으로 임시정부의 모금 기반이 됐던 '연통제' 조직이 사실상 와해한 것은 분명합니다. 일제가 임정의 돈줄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겁니다. 고국으로부터의 돈줄이 끊기면서 청사 임대료와 통역관 월급 내기도 빠듯했다는 임정의 재정난은 본격화됩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⑤] 1920년 독립전쟁 선포를 아십니까?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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