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임시정부⑤] 1920년 독립전쟁 선포를 아십니까?

입력 2019.04.28 (07:05) 수정 2019.04.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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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3천만 한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쳐서 물리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중략)
1941.12.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를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 만이었습니다. 임정이 공인된 형태의 선전포고를 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석 달 전인 1941년 9월, 정규군인 광복군이 창설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대일 선전포고 21년 전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다

주지하다시피 임시정부는 여러모로 곤궁했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정책은 별것이 없었을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임정은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뒀고, 군사정책의 목표도 분명히 했습니다. 자체 군사력을 동원해 어떤 형태로든 독립에 이바지한다는 목표였습니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 2년 차인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합니다. 공식 기관지인 「독립신문」 1면에 독립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대외에 밝힙니다. '1920년에 독립전쟁? 무슨 수로?'라는 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을 무력으로 상대하겠다는 건 어찌 보면 과감하면서도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1920년 1월 17일 발행된 독립신문 38호. 국민개병의 원칙을 밝히면서, 1920년 한해를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뜻을 공표했다.1920년 1월 17일 발행된 독립신문 38호. 국민개병의 원칙을 밝히면서, 1920년 한해를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 밖에서는 독립군, 안에서는 군사주비단

이때 임정에게 이른바 '비빌 언덕'이 돼줬던 건 당시 만주와 간도 일대에 터 잡은 '독립군'이었습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잇단 대승을 거둘 정도로 독립군 조직은 잘 정비돼 있었습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의 활약도 이때 일입니다.

'군대가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임정에 공유된 걸로 보입니다. 대표적 일화가 안창호와 이상룡이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1920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맡고 있던 안창호는 독립군 지도자 중 최연장자격인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에게 임정이 갈 길을 자문합니다.


이상룡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군사력을 강조했고, 이는 임시정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결과 임정은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합니다. 재정난 탓에 비록 2회 졸업생까지 배출 못 했지만, 당시 임정이 군사정책을 내실 있게 끌고 가려 했던 흔적입니다.

이렇게 나라 밖에서는 독립군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나라 안에서 이를 도울 조직도 구축합니다. 독립전쟁이 본격화하면 독립군에 호응할 일종의 지하 군사조직이 필요했던 겁니다. 군무부령 제1호로 「임시군사주비단제」라는 직제 규칙을 발표하고, '군사주비단'을 만듭니다.

■ 판결문에 남은 군사주비단의 고군분투

군사주비단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황해도와 경성(서울)이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조직이었기에, 군사주비단은 조직 체계도 군대식이었습니다. 황해도주비단은 10명이 분단을 꾸리고, 10개 분단이 소단을, 10개 소단이 1개 연단을 구성했습니다. 지금의 군 편제와 대동소이합니다.

주비단의 활동은 크게 두 방향이었습니다. 의열 투쟁(무력)과 군자금 모집(돈)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총기와 폭탄 등을 국내로 밀반입해 주비단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비록 병력과 무기가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주비단의 게릴라식 활동을 계속 전개합니다.

황해도주비단원이었던 유상열(柳相烈), 조창선(趙昌善), 서의배(徐義培) 3인이 대표적입니다. 1921년 이들은 평산군 일대에서 열성적으로 군자금 모금에 나섭니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팔아 5천여 원을 걷어 임시정부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군자금 내주기를 거부한 한 부호에게는 관통상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들의 꼬리를 밟은 일제 밀정을 살해합니다. 일제 경찰과의 교전 끝에 붙잡혀,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경성주비단은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김좌진 측과 활발히 연계했습니다. 김좌진의 동생인 김동진, 조카인 김성진, 김준한 등이 활동했습니다. 군정서 총사령관 직인을 내보이며 군자금 모금에 나섰습니다. 역시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군자금 모금에 나섰고, 그러다 주역 17명이 모조리 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임시정부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알려집니다.

경성주비단 주역 17명에 대한 판결문. 경성지방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는 등 중형을 내린다. / 출처 : 국가기록원경성주비단 주역 17명에 대한 판결문. 경성지방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는 등 중형을 내린다. / 출처 : 국가기록원

주비단은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못 견디고 결국 일망타진 수준에 이릅니다. 일제는 군사조직이라는 점을 고려해 임시정부의 다른 조직, 연통제와 교통국 요원들보다 더 무겁게 처벌합니다. 부족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이행하려 고군분투했던 군사주비단의 활약상은 일제 판결문에 잘 남아있습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⑥] 고종 비자금이 임시정부로?…켜켜이 쌓인 오해를 풀려면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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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 임시정부⑤] 1920년 독립전쟁 선포를 아십니까?
    • 입력 2019-04-28 07:05:12
    • 수정2019-04-29 15:40:25
    취재K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3천만 한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쳐서 물리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중략)
1941.12.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를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 만이었습니다. 임정이 공인된 형태의 선전포고를 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석 달 전인 1941년 9월, 정규군인 광복군이 창설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대일 선전포고 21년 전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다

주지하다시피 임시정부는 여러모로 곤궁했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정책은 별것이 없었을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임정은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뒀고, 군사정책의 목표도 분명히 했습니다. 자체 군사력을 동원해 어떤 형태로든 독립에 이바지한다는 목표였습니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 2년 차인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합니다. 공식 기관지인 「독립신문」 1면에 독립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대외에 밝힙니다. '1920년에 독립전쟁? 무슨 수로?'라는 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을 무력으로 상대하겠다는 건 어찌 보면 과감하면서도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1920년 1월 17일 발행된 독립신문 38호. 국민개병의 원칙을 밝히면서, 1920년 한해를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 밖에서는 독립군, 안에서는 군사주비단

이때 임정에게 이른바 '비빌 언덕'이 돼줬던 건 당시 만주와 간도 일대에 터 잡은 '독립군'이었습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잇단 대승을 거둘 정도로 독립군 조직은 잘 정비돼 있었습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의 활약도 이때 일입니다.

'군대가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임정에 공유된 걸로 보입니다. 대표적 일화가 안창호와 이상룡이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1920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맡고 있던 안창호는 독립군 지도자 중 최연장자격인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에게 임정이 갈 길을 자문합니다.


이상룡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군사력을 강조했고, 이는 임시정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결과 임정은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합니다. 재정난 탓에 비록 2회 졸업생까지 배출 못 했지만, 당시 임정이 군사정책을 내실 있게 끌고 가려 했던 흔적입니다.

이렇게 나라 밖에서는 독립군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나라 안에서 이를 도울 조직도 구축합니다. 독립전쟁이 본격화하면 독립군에 호응할 일종의 지하 군사조직이 필요했던 겁니다. 군무부령 제1호로 「임시군사주비단제」라는 직제 규칙을 발표하고, '군사주비단'을 만듭니다.

■ 판결문에 남은 군사주비단의 고군분투

군사주비단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황해도와 경성(서울)이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조직이었기에, 군사주비단은 조직 체계도 군대식이었습니다. 황해도주비단은 10명이 분단을 꾸리고, 10개 분단이 소단을, 10개 소단이 1개 연단을 구성했습니다. 지금의 군 편제와 대동소이합니다.

주비단의 활동은 크게 두 방향이었습니다. 의열 투쟁(무력)과 군자금 모집(돈)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총기와 폭탄 등을 국내로 밀반입해 주비단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비록 병력과 무기가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주비단의 게릴라식 활동을 계속 전개합니다.

황해도주비단원이었던 유상열(柳相烈), 조창선(趙昌善), 서의배(徐義培) 3인이 대표적입니다. 1921년 이들은 평산군 일대에서 열성적으로 군자금 모금에 나섭니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팔아 5천여 원을 걷어 임시정부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군자금 내주기를 거부한 한 부호에게는 관통상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들의 꼬리를 밟은 일제 밀정을 살해합니다. 일제 경찰과의 교전 끝에 붙잡혀,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경성주비단은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김좌진 측과 활발히 연계했습니다. 김좌진의 동생인 김동진, 조카인 김성진, 김준한 등이 활동했습니다. 군정서 총사령관 직인을 내보이며 군자금 모금에 나섰습니다. 역시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군자금 모금에 나섰고, 그러다 주역 17명이 모조리 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임시정부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알려집니다.

경성주비단 주역 17명에 대한 판결문. 경성지방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는 등 중형을 내린다. / 출처 : 국가기록원
주비단은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못 견디고 결국 일망타진 수준에 이릅니다. 일제는 군사조직이라는 점을 고려해 임시정부의 다른 조직, 연통제와 교통국 요원들보다 더 무겁게 처벌합니다. 부족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이행하려 고군분투했던 군사주비단의 활약상은 일제 판결문에 잘 남아있습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⑥] 고종 비자금이 임시정부로?…켜켜이 쌓인 오해를 풀려면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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