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한때 ‘브로맨스’ 마크롱-트럼프…‘존슨’ 등장하면 완전 결별?

입력 2019.07.1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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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인 현지시각 14일,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영국, 스페인 공군 전투기까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하늘을 수놓으며 동맹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군인 4,300명과 차량·전차 200여 대, 항공기 100여 대가 동원됐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큰 규모로 치러진 올해 열병식의 화두는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 9개국이 추진하는 '유럽 개입 이니셔티브(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약칭 E2I)'였다. E2I는 미국이 이끄는 유럽 안보의 근간인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별도로 유럽의 군사력을 한데 묶어 안보위기에 대처한다는 '유럽 신속 대응군' 개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해온 이 구상을 조롱하듯 비판해왔다. 하지만 마크롱의 어깨를 짓누른 것은 가장 든든한 우군들이 곧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메르켈은 '2021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건강이상설까지 제기되면서 리더십이 원만치 않은 상황이고, 메이는 이달 말이면 총리직을 떠나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의 경우 이번 열병식에 불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연합(EU)의 핵심국인 영국은 곧 EU를 떠나고 '트럼프의 친구'로 불리는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외무장관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런 정세 변화는 마크롱에게 '미국의 입김은 더 강해지고 유럽연합(EU) 체제는 더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계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위용을 뽐낸 이번 군사 퍼레이드는 위기의 발로였을까.

美 "보복" 경고에도…마크롱, 대규모 열병식 통해 '유럽군 창설' 의지 불태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올해 5월 EU에 보낸 서신에서 "EU가 미국을 제외하고 자체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서신은 미국의 엘렌 로드 국방부 차관과 안드레아 톰슨 국무부 차관이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에게 보낸 것이다.

미국은 서신에서 "EU 회원국 간 군사협력 강화는 지난 30년 동안 지속한 대서양 동맹을 뒤집는 일"이라며 "EU의 독자적인 국방사업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나토-EU 간 협력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 정상들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린 프랑스대혁명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고 있다. (14일)유럽 정상들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린 프랑스대혁명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고 있다. (14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EU를 향해 나토군에 대한 방위비 지출 증액을 압박하자 EU 측은 분담금은 늘려주고, 대신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추진해왔다. 특히, EU가 공동 무기 개발 등을 추진하는 유럽 안보·국방협력체제(PESCO)를 출범시키고 방위기금(EDF)까지 조성해 미국을 배제하자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유럽 개입 이니셔티브(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약칭 E2I)'를 주창하며 유럽 공동군 창설 움직임을 이끌어온 사람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브로맨스(bromance)'를 보여준 사이였지만 지금은 유럽 내 '반(反)트럼프' 전선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브로맨스'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EU 자체에 대한 신념부터 '난민 문제' 같은 EU의 가치에 대한 두 사람 간 인식 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EU 반대론자이고, 난민이나 이민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국경에 장벽을 세울 정도로 마크롱과는 생각이 다르다.

국내 정치 궁지 몰린 마크롱…'트럼프 세계전략, EU 위협' 위기감 느꼈나

EU의 필요성에 대한 개인 신념이 아니더라도 마크롱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 'EU의 가치'를 역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금융산업으로 먹고사는 영국과 달리, 농업이나 첨단산업 분야 등에서 역내 관세 혜택 등 EU의 장점을 누려온 프랑스는 EU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마크롱 대통령은 취임 초반 국영철도 개혁을 밀어붙였고 쉬운 해고가 가능하도록 노동법도 개정했다. 또 친기업적이고 부자 감세를 추진해 경제정책 기조 면에서는 트럼프와 어느 정도 죽이 맞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이어져 한때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번진 '노란조끼' 시위에 화들짝 놀란 그는 유류세 인상 철회와 최저임금 인상, 소득세 인하 등을 약속하며 시위대에 사실상 투항했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도 파리 도심에서는 대규모 노란조끼 시위가 열려 불법시위 혐의로 150여 명이 체포됐다. (14일)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도 파리 도심에서는 대규모 노란조끼 시위가 열려 불법시위 혐의로 150여 명이 체포됐다. (14일)

그렇다고 해도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 것은 마크롱이 EU를 챙기는 부수적인 의도에 불과하다. 지난 십수 년간 EU를 호령하던 메르켈의 퇴장과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라는 산을 만난 그에게 트럼프 행정부 들어 완전히 달라진 미국의 세계 전략은 EU의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지진 해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셰일 혁명' 이후 주요 산유국이 된 미국은 더는 중동 국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오히려 이란이 주도해온 석유수출국기구(OPEC)까지 와해시키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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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을 통해 에너지 안보 자립에 성공한 미국은 '미국 VS 러시아'라는 오랜 구도를 깨고, 미국에 도전한 중국을 제압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랜 기간 미국을 향해 할 말은 해온 유럽에 대해서는 '무시'나 '길들이기' 전략을 썼다. 유럽의 반발을 무릅쓰고 과거 유럽 방위를 위해 옛 소련과 맺었던 INF 조약(중거리 핵무기 폐기에 관한 조약)을 탈퇴하고 툭하면 유럽에 나토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EU산 자동차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는 등 '관세'를 무기로 유럽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트럼프 친구' 존슨의 등장…'미·영' 밀월, EU 흔들까

유럽 공동군이 필요하다고 마크롱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유럽에 대한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은 미국을 더는 안보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미국이라는 큰 '우산'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위한 첫 도전 과제로 군사 분야를 택한 것이다.

[연관 기사] [글로벌 돋보기] ‘공작’ 냄새 풀풀 나는 문건 파문…‘브렉시트’에 득일까 실일까

마크롱 같은 친(親)EU 진영을 더욱 다급하게 만든 것은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의 상황이다. 최근 터진 킴 대럭 미국 주재 영국대사의 문건 유출 파문으로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한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이다. 그는 몇 차례 연기 끝에 10월 말로 미뤄져 있는 브렉시트를 EU와의 협상 없이도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밝힌 대표적인 브렉시트 강경파다.

90년대 언론인 시절부터 EU 체제를 비판했던 그는 여러 모로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 '트럼프가 기다리는 총리', '트럼프의 친구'로 불리는 존슨 전 장관이 이달 말 차기 총리로 선출되면 미국과 어느 때보다 강한 밀월 관계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EU와 각을 세우는 미국과 영국이 가까워지면 영국-EU 관계는 더욱 삐걱댈 수밖에 없다.

스티브 배넌 前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마린 르펜 RN 대표 (2018년 3월). 배넌은 2017년 대선 때부터 르펜을 지지해왔다.스티브 배넌 前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마린 르펜 RN 대표 (2018년 3월). 배넌은 2017년 대선 때부터 르펜을 지지해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친(親)EU 진영을 충격으로 몰아넣을 만했다. 극우와 포퓰리스트 등 EU에 회의적인 세력의 약진이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반(反)EU 진영의 약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눈에 띄었는데 특히,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연합(RN)'은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성향 '전진하는 공화국(LREM)'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선거 당시 트럼프의 대선 책사였던 스티프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파리에 머물며 르펜을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에서 '반 EU'·'반 난민'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지도자가 된 사례들은 이미 있지만, '트럼프 스타일'의 정치인이 영국의 정상이 된다면 그 무게감은 다르다. 존슨이 집권하면 당장 미국은 '화웨이 제재' 동참 등 중국 때리기와 이란 문제 등을 놓고 영국의 확실한 역할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고마움'·'씁쓸함' 교차한 노르망디 75주년

지난달 6일, 75년 전 2차 세계대전의 분기점이 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열렸다. 기념식은 매년 그래왔듯 노르망디 상륙으로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 대통령이 주재했다.

트럼프 대통령 부부와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뒤 미군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지난달 7일)트럼프 대통령 부부와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뒤 미군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지난달 7일)

마크롱은 영국군 2만여 명이 잠들어 있는 베르쉬르메르 묘지에 헌화한 데 이어 미군이 상륙했던 콜빌쉬르메르로 자리를 옮겨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기념식을 했다. 하지만 70여 년 전 프랑스를 지켜준 강대국 미국과 영국은 지금 마크롱에게는 'EU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됐을 것이다. 고마움과 씁쓸함이 교차했을 것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가진 기념식에서도 마크롱 대통령은 유엔과 나토, EU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마크롱은 "국가 간 고립주의 확산", "국경을 닫고 벽을 세우고 다원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느냐"며 트럼프를 겨냥해 일주일 전 참았던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노르망디 상륙 기념식 이후 마크롱·EU와 미국 간 갈등이 눈에 띄게 심화하고 있다. EU에도 철강·알루미늄 등에 관세를 부과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노르망디 상륙 기념식 직후 프랑스산 와인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자 마크롱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거센 반발에도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국의 글로벌 IT 기업에 디지털세(Tech tax)를 부과하는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브로맨스'에서 감정 싸움까지…결별 수순?

이런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은 그동안 거리를 뒀던 이란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며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핵 합의 당사자인 영국·프랑스와 함께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을 우려한다"며 미국과 이란에 긴장 고조 행위 중단과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는데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관 기사] [글로벌 돋보기] ‘국가주의자’ 트럼프 勝?…급변하는 세계질서

전쟁의 참화에서 자국을 지켜준 미국과 각을 세우고, 적이었던 독일의 손을 꼭 잡은 채 곧 미국 편에 설지도 모를 동맹 영국을 부여잡은 마크롱의 고군분투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군도 없다'는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트럼프와의 브로맨스가 진짜였든 탐색전 성격의 가짜였든, 젊은 지도자 마크롱이 선택한 길은 트럼프의 미국이 재편하려는 세계 질서와는 같은 방향으로 나있지 않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백악관 뜰에 ‘승리의 묘목’을 심고 있다. (2018년 4월)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백악관 뜰에 ‘승리의 묘목’을 심고 있다. (2018년 4월)

지난해 4월, 마크롱과 트럼프는 백악관 뜰에 파리에서 가져온 참나무 묘목 한그루를 심었다. 양국 동맹을 상징한다는 거창한 홍보 문구보다는 이미 멀어진 두 사람의 화해 제스처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은 지 불과 5일 만에 나무는 사라졌고 이런 상황은 1년 넘게 '백악관 나무 실종 미스테리'로 불려 왔다. 최근 이에 대해 마크롱 대통령 측이 숨겨진 일화를 공개했다. "검역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식수 행사를 하자고 요구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 간 감정의 골도 깊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사람의 갈등. 지금은 '백악관 식수 나무 에피소드' 정도로 회자되고 있지만,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에는 현재 얼굴을 붉히며 고집하는 각자의 길이 자국과 세계의 운명을 이미 정해놨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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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6 0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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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인 현지시각 14일,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영국, 스페인 공군 전투기까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하늘을 수놓으며 동맹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군인 4,300명과 차량·전차 200여 대, 항공기 100여 대가 동원됐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큰 규모로 치러진 올해 열병식의 화두는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 9개국이 추진하는 '유럽 개입 이니셔티브(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약칭 E2I)'였다. E2I는 미국이 이끄는 유럽 안보의 근간인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별도로 유럽의 군사력을 한데 묶어 안보위기에 대처한다는 '유럽 신속 대응군' 개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해온 이 구상을 조롱하듯 비판해왔다. 하지만 마크롱의 어깨를 짓누른 것은 가장 든든한 우군들이 곧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메르켈은 '2021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건강이상설까지 제기되면서 리더십이 원만치 않은 상황이고, 메이는 이달 말이면 총리직을 떠나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의 경우 이번 열병식에 불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연합(EU)의 핵심국인 영국은 곧 EU를 떠나고 '트럼프의 친구'로 불리는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외무장관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런 정세 변화는 마크롱에게 '미국의 입김은 더 강해지고 유럽연합(EU) 체제는 더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계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위용을 뽐낸 이번 군사 퍼레이드는 위기의 발로였을까.

美 "보복" 경고에도…마크롱, 대규모 열병식 통해 '유럽군 창설' 의지 불태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올해 5월 EU에 보낸 서신에서 "EU가 미국을 제외하고 자체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서신은 미국의 엘렌 로드 국방부 차관과 안드레아 톰슨 국무부 차관이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에게 보낸 것이다.

미국은 서신에서 "EU 회원국 간 군사협력 강화는 지난 30년 동안 지속한 대서양 동맹을 뒤집는 일"이라며 "EU의 독자적인 국방사업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나토-EU 간 협력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 정상들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린 프랑스대혁명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고 있다. (14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EU를 향해 나토군에 대한 방위비 지출 증액을 압박하자 EU 측은 분담금은 늘려주고, 대신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추진해왔다. 특히, EU가 공동 무기 개발 등을 추진하는 유럽 안보·국방협력체제(PESCO)를 출범시키고 방위기금(EDF)까지 조성해 미국을 배제하자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유럽 개입 이니셔티브(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약칭 E2I)'를 주창하며 유럽 공동군 창설 움직임을 이끌어온 사람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브로맨스(bromance)'를 보여준 사이였지만 지금은 유럽 내 '반(反)트럼프' 전선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브로맨스'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EU 자체에 대한 신념부터 '난민 문제' 같은 EU의 가치에 대한 두 사람 간 인식 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EU 반대론자이고, 난민이나 이민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국경에 장벽을 세울 정도로 마크롱과는 생각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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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필요성에 대한 개인 신념이 아니더라도 마크롱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 'EU의 가치'를 역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금융산업으로 먹고사는 영국과 달리, 농업이나 첨단산업 분야 등에서 역내 관세 혜택 등 EU의 장점을 누려온 프랑스는 EU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마크롱 대통령은 취임 초반 국영철도 개혁을 밀어붙였고 쉬운 해고가 가능하도록 노동법도 개정했다. 또 친기업적이고 부자 감세를 추진해 경제정책 기조 면에서는 트럼프와 어느 정도 죽이 맞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이어져 한때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번진 '노란조끼' 시위에 화들짝 놀란 그는 유류세 인상 철회와 최저임금 인상, 소득세 인하 등을 약속하며 시위대에 사실상 투항했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도 파리 도심에서는 대규모 노란조끼 시위가 열려 불법시위 혐의로 150여 명이 체포됐다. (14일)
그렇다고 해도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 것은 마크롱이 EU를 챙기는 부수적인 의도에 불과하다. 지난 십수 년간 EU를 호령하던 메르켈의 퇴장과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라는 산을 만난 그에게 트럼프 행정부 들어 완전히 달라진 미국의 세계 전략은 EU의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지진 해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셰일 혁명' 이후 주요 산유국이 된 미국은 더는 중동 국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오히려 이란이 주도해온 석유수출국기구(OPEC)까지 와해시키려 하고 있다.

[연관 기사]
[글로벌 돋보기] ‘오일파워’ 장착한 트럼프, ‘진정한 패권’ 추구하나?
[글로벌 돋보기] ‘냉전’의 산물 INF조약, ‘신(新)냉전’으로 사라지나?


셰일을 통해 에너지 안보 자립에 성공한 미국은 '미국 VS 러시아'라는 오랜 구도를 깨고, 미국에 도전한 중국을 제압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랜 기간 미국을 향해 할 말은 해온 유럽에 대해서는 '무시'나 '길들이기' 전략을 썼다. 유럽의 반발을 무릅쓰고 과거 유럽 방위를 위해 옛 소련과 맺었던 INF 조약(중거리 핵무기 폐기에 관한 조약)을 탈퇴하고 툭하면 유럽에 나토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EU산 자동차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는 등 '관세'를 무기로 유럽에 대한 압박을 지속해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트럼프 친구' 존슨의 등장…'미·영' 밀월, EU 흔들까

유럽 공동군이 필요하다고 마크롱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유럽에 대한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은 미국을 더는 안보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미국이라는 큰 '우산'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위한 첫 도전 과제로 군사 분야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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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같은 친(親)EU 진영을 더욱 다급하게 만든 것은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의 상황이다. 최근 터진 킴 대럭 미국 주재 영국대사의 문건 유출 파문으로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한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이다. 그는 몇 차례 연기 끝에 10월 말로 미뤄져 있는 브렉시트를 EU와의 협상 없이도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밝힌 대표적인 브렉시트 강경파다.

90년대 언론인 시절부터 EU 체제를 비판했던 그는 여러 모로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 '트럼프가 기다리는 총리', '트럼프의 친구'로 불리는 존슨 전 장관이 이달 말 차기 총리로 선출되면 미국과 어느 때보다 강한 밀월 관계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EU와 각을 세우는 미국과 영국이 가까워지면 영국-EU 관계는 더욱 삐걱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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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친(親)EU 진영을 충격으로 몰아넣을 만했다. 극우와 포퓰리스트 등 EU에 회의적인 세력의 약진이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반(反)EU 진영의 약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눈에 띄었는데 특히,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연합(RN)'은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성향 '전진하는 공화국(LREM)'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선거 당시 트럼프의 대선 책사였던 스티프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파리에 머물며 르펜을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에서 '반 EU'·'반 난민'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지도자가 된 사례들은 이미 있지만, '트럼프 스타일'의 정치인이 영국의 정상이 된다면 그 무게감은 다르다. 존슨이 집권하면 당장 미국은 '화웨이 제재' 동참 등 중국 때리기와 이란 문제 등을 놓고 영국의 확실한 역할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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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75년 전 2차 세계대전의 분기점이 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열렸다. 기념식은 매년 그래왔듯 노르망디 상륙으로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 대통령이 주재했다.

트럼프 대통령 부부와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뒤 미군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지난달 7일)
마크롱은 영국군 2만여 명이 잠들어 있는 베르쉬르메르 묘지에 헌화한 데 이어 미군이 상륙했던 콜빌쉬르메르로 자리를 옮겨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기념식을 했다. 하지만 70여 년 전 프랑스를 지켜준 강대국 미국과 영국은 지금 마크롱에게는 'EU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됐을 것이다. 고마움과 씁쓸함이 교차했을 것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가진 기념식에서도 마크롱 대통령은 유엔과 나토, EU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마크롱은 "국가 간 고립주의 확산", "국경을 닫고 벽을 세우고 다원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느냐"며 트럼프를 겨냥해 일주일 전 참았던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노르망디 상륙 기념식 이후 마크롱·EU와 미국 간 갈등이 눈에 띄게 심화하고 있다. EU에도 철강·알루미늄 등에 관세를 부과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노르망디 상륙 기념식 직후 프랑스산 와인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자 마크롱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거센 반발에도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국의 글로벌 IT 기업에 디지털세(Tech tax)를 부과하는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브로맨스'에서 감정 싸움까지…결별 수순?

이런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은 그동안 거리를 뒀던 이란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며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핵 합의 당사자인 영국·프랑스와 함께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을 우려한다"며 미국과 이란에 긴장 고조 행위 중단과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는데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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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에서 자국을 지켜준 미국과 각을 세우고, 적이었던 독일의 손을 꼭 잡은 채 곧 미국 편에 설지도 모를 동맹 영국을 부여잡은 마크롱의 고군분투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군도 없다'는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트럼프와의 브로맨스가 진짜였든 탐색전 성격의 가짜였든, 젊은 지도자 마크롱이 선택한 길은 트럼프의 미국이 재편하려는 세계 질서와는 같은 방향으로 나있지 않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백악관 뜰에 ‘승리의 묘목’을 심고 있다. (2018년 4월)
지난해 4월, 마크롱과 트럼프는 백악관 뜰에 파리에서 가져온 참나무 묘목 한그루를 심었다. 양국 동맹을 상징한다는 거창한 홍보 문구보다는 이미 멀어진 두 사람의 화해 제스처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은 지 불과 5일 만에 나무는 사라졌고 이런 상황은 1년 넘게 '백악관 나무 실종 미스테리'로 불려 왔다. 최근 이에 대해 마크롱 대통령 측이 숨겨진 일화를 공개했다. "검역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식수 행사를 하자고 요구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 간 감정의 골도 깊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사람의 갈등. 지금은 '백악관 식수 나무 에피소드' 정도로 회자되고 있지만,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에는 현재 얼굴을 붉히며 고집하는 각자의 길이 자국과 세계의 운명을 이미 정해놨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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