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백색테러’ 현장을 가다…‘중국 배후설’과 ‘조폭’ 그리고 ‘검은경찰’

입력 2019.07.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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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시위를 한 것도 아닌데 쇠몽둥이를 마구 휘둘렀어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때렸어요. 경찰도 폭력배들과 한패였어요. 더는 옛날의 홍콩이 아닙니다."

"2만 건의 신고를 받고도 경찰은 현장에 39분 만에 도착했어요. '왜 늦게 왔냐?'고 기자들이 물어보니까 경찰은 '우리가 잘못한 건 39분 늦은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이른바, '백색테러'에 화가 난 홍콩인들의 말이다. 지난 21일 홍콩 원랑역에 흰옷 차림의 남성 100여 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의 무차별 폭력으로 수십 명이 다쳤다. 아무리 정국이 혼란하다고 해도 홍콩 같은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경찰의 대응이다. 뒤늦게 출동한 것도 모자라 흰옷 남성들을 한 명도 체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흰옷 남성들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거나 나란히 걷는 장면 등이 퍼지면서 '유착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홍콩인들은 이제 경찰을 믿지 않는다. 현지에서 폭력배를 뜻하는 '흑'자를 붙여 경찰을 '흑경', '검은 경찰'로 부른다. 백색테러 분노로 달아오른 홍콩 시위 현장을 다녀왔다.

“홍콩 상황 널리 알려주세요”…공항부터 마주친 시위 열기

홍콩 땅을 밟자마자 홍콩인들의 '간절함'을 봤다. 지난 26일, 홍콩국제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검은 옷차림의 수많은 홍콩인과 마주하게 됐다. 여러 가지 언어로 쓴 푯말을 들고 외국인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 '홍콩의 자유를 보장하라' … 그들이 외친 구호이기도 한 푯말 중에는 한국어로 쓴 문구도 보였다.

지난 7월 26일, 공항 입국장에서 홍콩 시위대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홍보하고 있다.지난 7월 26일, 공항 입국장에서 홍콩 시위대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홍보하고 있다.

"제발, 홍콩의 상황을 널리 알려주세요"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한 대학생이 건넨 말이다.

다음날(27일)로 예고된 백색테러 규탄 시위를 앞두고 홍콩 전역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전 시위와 달리 경찰이 시위를 원천 불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학 강사라고 소개한 라우렌차 안 씨는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공항에 모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찰은 (백색테러) 폭력배와 한편이라고 확신합니다. 경찰 진압 방식도 거칠어지고 있어요. 시위대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현지인들은 요즘은 특별한 주최 측이 있다기보다 온라인 포럼 'LIHKG'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네티즌들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수렴되는 방식으로 시위 방법과 일정의 윤곽들이 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백색테러’로 들끓은 민심…경찰, 같은 장소에서 시위대 폭행

백색테러 규탄 시위 당일인 27일. 시위 장소는 사건이 발생한 홍콩 외곽의 원랑역이었다. 원랑역 주변 세 곳에서 각각 집결한 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인 원랑공원으로 모이자는 게 SNS상에서 공유된 지침이었지만, 지휘부가 없어 시위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당시 SNS에는 "여럿이 모이거나 행진하면 불법이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산책하듯 걷자", "쇼핑을 하는 것처럼 걷자" 등등 많은 의견이 쏟아졌고 시위대 본진이 모이는 장소도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백색테러가 발생한 원랑역 기둥 상단에 ‘테러 피해자들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써있다.백색테러가 발생한 원랑역 기둥 상단에 ‘테러 피해자들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써있다.

SNS에 공유된 시간에 맞춰 원랑역에 도착하니 무장한 경찰관들이 보였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 역 주변 기둥과 벽에는 백색테러를 고발하는 사진과 글들이 빽빽이 붙어 있었다. 시위에 동참하지 못한 시민들이 두고 간 물과 음식들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10분 정도 뒤 원랑역에 모여든 인파가 행진하기 시작했다. 비좁은 출입구를 빠져나오니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찰 추산 10만 명. 놀라운 것은 이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구호도 거의 외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언제 또 경찰과 충돌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독면과 안전모를 든 젊은이들의 진지한 표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연관 기사]
‘백색테러’에 분노한 홍콩 민심…경찰-시위대 정면충돌
‘백색테러’에 분노한 홍콩, 수만명 시위…경찰과 정면 충돌

하지만, 분위기는 2시간 만에 확 바뀌었다. 경찰이 시위를 원천 금지했다는 이유로 조기에 강제 해산에 나선 것이다. 최루탄과 고무탄이 다시 등장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해산 불응자'로 간주해 폭행하기도 했다.

원랑역에서 벌어진 ‘21일 백색테러’와 ‘27일 경찰진압’ 유사성을 패러디한 이미지 (출처: 홍콩 SNS)원랑역에서 벌어진 ‘21일 백색테러’와 ‘27일 경찰진압’ 유사성을 패러디한 이미지 (출처: 홍콩 SNS)

무장 경찰관들이 백색테러 장소인 원랑역 역사 안까지 시위대를 쫓아가 곤봉으로 때린 사실이 전해지자 '백색테러 장소에서 오늘은 '경찰테러'가 일어났다' 등의 비난이 쇄도했고, '닮은꼴의 두 사건'을 패러디한 이미지가 SNS상에 쏟아졌다.

‘경찰’·‘친중 정치인’도 한편?…“백색테러 배후는 중국”

백색테러 이후흰옷 남성들과 경찰과의 유착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계기가 됐다. 늑장 출동해 뭇매를 맞은 경찰이 알고 보니 시위대를 폭행한 남성들과 몰래 만났고, 경찰 버스에 그들을 태워 귀가시켜준 광경까지 영상으로 잡혀 확산했다.

경찰 지휘관이 흰옷 남성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유포됐는데, 해당 영상에서는 한 흰옷 남성이 경찰 지휘관에게 "시위대가 쇼핑몰에 모여 있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프다. 경찰이 쫓아낼 수 없다면 우리가 대신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영상에는 경찰 지휘관이 남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경찰이 깡패와는 마음이 맞느냐'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열로 줄지어 걸어가는 무장 경찰관들 왼쪽 옆에 흰옷 차림의 남성들이 서있다 (출처: 홍콩 SNS)1열로 줄지어 걸어가는 무장 경찰관들 왼쪽 옆에 흰옷 차림의 남성들이 서있다 (출처: 홍콩 SNS)

여론이 악화하자 경찰은 뒤늦게 백색테러 용의자 6명을 체포했다. 그런데 홍콩 폭력조직 삼합회 일파인 14K와 WSW 등의 조직원이 포함된 걸로 전해져 충격을 줬다. 이런 가운데 친중 성향의 정치인도 흰옷 남성들을 몰래 만난 것으로 드러나 '친중 세력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확산하면서 홍콩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는 백색테러 배후에 중국이 있다고 의심한다. 지하철 안에서 중국 본토에서 쓰는 '보통어'와 어눌한 광둥어(홍콩어)로 "원랑역으로 간다"고 얘기하는 흰옷 남성들의 모습도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정황들은 홍콩 SNS상에 차고 넘친다. 홍콩인들은 지난달 초부터 '보통어를 쓰는 경찰관이 많다'는 이유 등을 들어 '중국 공안 개입설'도 제기해왔다.

로이터통신 등 일부 외신도 "중국 중앙 정부의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 소속 관리가 백색테러 일주일 전 현지 주민들에게 시위대를 몰아내라고 촉구했다"며 '백색테러 중국 배후설'을 제기했다.

“중국군 안 두려워”…‘자유 쟁취’ 몸 사리지 않는 홍콩인들

"경찰이 저렇게 나오는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죠. 백색테러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도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온다는 건 목숨을 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위 상황을 함께 지켜보던 교민이 건넨 말이다. '중국이 인민해방군 투입 가능성까지 내비쳤는데?'라고 묻자 그는 "홍콩인들은 중국 군대는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전반적으로 공포 분위기가 확산하는 건 맞다"고 했다.

지난 28일, 홍콩 차타화원에 모인 시위대. 분노는 높았지만 경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평화적인방법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였다.지난 28일, 홍콩 차타화원에 모인 시위대. 분노는 높았지만 경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평화적인방법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랑역에서 다시 도심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가 열린 28일, 유명 쇼핑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에 수만 명이 집결했다. 이날 시위는 불법은 아니었지만, 거리 행진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만난 고등학생 케이티 챈 양은 "홍콩인으로서 누려온 자유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나왔다"며 시위에 참여한 이유를 똑똑히 말했다.

[연관 기사] 홍콩 오늘도 대규모 반중 시위…유혈 사태 속 ‘긴장’

26일 공항에서 목격한 공항 점거 시위 참가자 중 상당수는 놀랍게도 공항 직원들이었다. 홍콩 지하철인 MTR 운전기사 300명도 '시위를 지지하고 휴업 투쟁으로 동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냈고, 홍콩 버스 노조도 서행 운전 등의 방식으로 시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의료기관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도 사업장별로 반중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을 위해서가 아닌 홍콩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콩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인 홍콩총상회도 어제(30일) "홍콩 정부가 송환법안을 철회하고,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분노’와 ‘공포’ 사이…치밀한 중국, 개입 명분 쌓나

인민해방군 투입설이 공식 제기된 이후, 홍콩인들 사이에서는 '자제론'이 급격히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이 최루탄을 쏴도 쇠파이프나 각목 등으로 과격하게 맞서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경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모여 군중을 이루면 경찰의 한계선을 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경찰이 시위를 불허했을때는 시위 행위 자체가 엄연한 불법이며, 경찰이 거리행진을 불허했을 때 걸으면 그 역시 불법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홍콩의 가치를 지키는 길이다.

지난 28일, 도심 행진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하고 있다.지난 28일, 도심 행진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이 과격해지자 흥분하는 시위 참가자들도 볼 수 있었다.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안전모를 벗어 던지는 정도였지만 이런 행동들이 중앙 정부 개입의 명분으로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백색테러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동시에 공포를 심어 줍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때려도 마찬가지죠.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시위대 규모는 점점 줄어들고 강경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나오게 돼 경찰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입니다."

28일 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가던 길에 택시 기사가 "시위대에 동의는 하지만… " 이라며 끝말을 흐리면서 한 말이다.

지난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中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양광(楊光) 대변인이 기자회견하고 있다.지난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中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양광(楊光) 대변인이 기자회견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의 경고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연일 미국을 비난하며 홍콩 사태를 미·중 문제로 이슈화하려는 의도도 뚜렷해지고 있다. 100만 명, 200만 명이 반중 시위에 나서자 화들짝 놀랐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전열을 가다듬은 중국은 지금 '공포'와 '분노'를 조장하며 홍콩인들을 흔들고 있다.

자유를 향한 순수한 열망 하나로 맞서기에는 너무나 치밀하고 막강한 중국이다. 택시기사의 말을 듣는 순간 홍콩 하늘 위로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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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돋보기] ‘백색테러’ 현장을 가다…‘중국 배후설’과 ‘조폭’ 그리고 ‘검은경찰’
    • 입력 2019-07-31 08: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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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시위를 한 것도 아닌데 쇠몽둥이를 마구 휘둘렀어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때렸어요. 경찰도 폭력배들과 한패였어요. 더는 옛날의 홍콩이 아닙니다."

"2만 건의 신고를 받고도 경찰은 현장에 39분 만에 도착했어요. '왜 늦게 왔냐?'고 기자들이 물어보니까 경찰은 '우리가 잘못한 건 39분 늦은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이른바, '백색테러'에 화가 난 홍콩인들의 말이다. 지난 21일 홍콩 원랑역에 흰옷 차림의 남성 100여 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의 무차별 폭력으로 수십 명이 다쳤다. 아무리 정국이 혼란하다고 해도 홍콩 같은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경찰의 대응이다. 뒤늦게 출동한 것도 모자라 흰옷 남성들을 한 명도 체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흰옷 남성들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거나 나란히 걷는 장면 등이 퍼지면서 '유착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홍콩인들은 이제 경찰을 믿지 않는다. 현지에서 폭력배를 뜻하는 '흑'자를 붙여 경찰을 '흑경', '검은 경찰'로 부른다. 백색테러 분노로 달아오른 홍콩 시위 현장을 다녀왔다.

“홍콩 상황 널리 알려주세요”…공항부터 마주친 시위 열기

홍콩 땅을 밟자마자 홍콩인들의 '간절함'을 봤다. 지난 26일, 홍콩국제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검은 옷차림의 수많은 홍콩인과 마주하게 됐다. 여러 가지 언어로 쓴 푯말을 들고 외국인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 '홍콩의 자유를 보장하라' … 그들이 외친 구호이기도 한 푯말 중에는 한국어로 쓴 문구도 보였다.

지난 7월 26일, 공항 입국장에서 홍콩 시위대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홍보하고 있다.
"제발, 홍콩의 상황을 널리 알려주세요"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한 대학생이 건넨 말이다.

다음날(27일)로 예고된 백색테러 규탄 시위를 앞두고 홍콩 전역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전 시위와 달리 경찰이 시위를 원천 불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학 강사라고 소개한 라우렌차 안 씨는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공항에 모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찰은 (백색테러) 폭력배와 한편이라고 확신합니다. 경찰 진압 방식도 거칠어지고 있어요. 시위대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현지인들은 요즘은 특별한 주최 측이 있다기보다 온라인 포럼 'LIHKG'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네티즌들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수렴되는 방식으로 시위 방법과 일정의 윤곽들이 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백색테러’로 들끓은 민심…경찰, 같은 장소에서 시위대 폭행

백색테러 규탄 시위 당일인 27일. 시위 장소는 사건이 발생한 홍콩 외곽의 원랑역이었다. 원랑역 주변 세 곳에서 각각 집결한 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인 원랑공원으로 모이자는 게 SNS상에서 공유된 지침이었지만, 지휘부가 없어 시위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당시 SNS에는 "여럿이 모이거나 행진하면 불법이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산책하듯 걷자", "쇼핑을 하는 것처럼 걷자" 등등 많은 의견이 쏟아졌고 시위대 본진이 모이는 장소도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백색테러가 발생한 원랑역 기둥 상단에 ‘테러 피해자들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써있다.
SNS에 공유된 시간에 맞춰 원랑역에 도착하니 무장한 경찰관들이 보였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 역 주변 기둥과 벽에는 백색테러를 고발하는 사진과 글들이 빽빽이 붙어 있었다. 시위에 동참하지 못한 시민들이 두고 간 물과 음식들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10분 정도 뒤 원랑역에 모여든 인파가 행진하기 시작했다. 비좁은 출입구를 빠져나오니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찰 추산 10만 명. 놀라운 것은 이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구호도 거의 외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언제 또 경찰과 충돌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독면과 안전모를 든 젊은이들의 진지한 표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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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위기는 2시간 만에 확 바뀌었다. 경찰이 시위를 원천 금지했다는 이유로 조기에 강제 해산에 나선 것이다. 최루탄과 고무탄이 다시 등장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해산 불응자'로 간주해 폭행하기도 했다.

원랑역에서 벌어진 ‘21일 백색테러’와 ‘27일 경찰진압’ 유사성을 패러디한 이미지 (출처: 홍콩 SNS)
무장 경찰관들이 백색테러 장소인 원랑역 역사 안까지 시위대를 쫓아가 곤봉으로 때린 사실이 전해지자 '백색테러 장소에서 오늘은 '경찰테러'가 일어났다' 등의 비난이 쇄도했고, '닮은꼴의 두 사건'을 패러디한 이미지가 SNS상에 쏟아졌다.

‘경찰’·‘친중 정치인’도 한편?…“백색테러 배후는 중국”

백색테러 이후흰옷 남성들과 경찰과의 유착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계기가 됐다. 늑장 출동해 뭇매를 맞은 경찰이 알고 보니 시위대를 폭행한 남성들과 몰래 만났고, 경찰 버스에 그들을 태워 귀가시켜준 광경까지 영상으로 잡혀 확산했다.

경찰 지휘관이 흰옷 남성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유포됐는데, 해당 영상에서는 한 흰옷 남성이 경찰 지휘관에게 "시위대가 쇼핑몰에 모여 있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프다. 경찰이 쫓아낼 수 없다면 우리가 대신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영상에는 경찰 지휘관이 남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경찰이 깡패와는 마음이 맞느냐'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열로 줄지어 걸어가는 무장 경찰관들 왼쪽 옆에 흰옷 차림의 남성들이 서있다 (출처: 홍콩 SNS)
여론이 악화하자 경찰은 뒤늦게 백색테러 용의자 6명을 체포했다. 그런데 홍콩 폭력조직 삼합회 일파인 14K와 WSW 등의 조직원이 포함된 걸로 전해져 충격을 줬다. 이런 가운데 친중 성향의 정치인도 흰옷 남성들을 몰래 만난 것으로 드러나 '친중 세력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확산하면서 홍콩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는 백색테러 배후에 중국이 있다고 의심한다. 지하철 안에서 중국 본토에서 쓰는 '보통어'와 어눌한 광둥어(홍콩어)로 "원랑역으로 간다"고 얘기하는 흰옷 남성들의 모습도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정황들은 홍콩 SNS상에 차고 넘친다. 홍콩인들은 지난달 초부터 '보통어를 쓰는 경찰관이 많다'는 이유 등을 들어 '중국 공안 개입설'도 제기해왔다.

로이터통신 등 일부 외신도 "중국 중앙 정부의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 소속 관리가 백색테러 일주일 전 현지 주민들에게 시위대를 몰아내라고 촉구했다"며 '백색테러 중국 배후설'을 제기했다.

“중국군 안 두려워”…‘자유 쟁취’ 몸 사리지 않는 홍콩인들

"경찰이 저렇게 나오는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죠. 백색테러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도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온다는 건 목숨을 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위 상황을 함께 지켜보던 교민이 건넨 말이다. '중국이 인민해방군 투입 가능성까지 내비쳤는데?'라고 묻자 그는 "홍콩인들은 중국 군대는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전반적으로 공포 분위기가 확산하는 건 맞다"고 했다.

지난 28일, 홍콩 차타화원에 모인 시위대. 분노는 높았지만 경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평화적인방법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랑역에서 다시 도심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가 열린 28일, 유명 쇼핑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에 수만 명이 집결했다. 이날 시위는 불법은 아니었지만, 거리 행진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만난 고등학생 케이티 챈 양은 "홍콩인으로서 누려온 자유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나왔다"며 시위에 참여한 이유를 똑똑히 말했다.

[연관 기사] 홍콩 오늘도 대규모 반중 시위…유혈 사태 속 ‘긴장’

26일 공항에서 목격한 공항 점거 시위 참가자 중 상당수는 놀랍게도 공항 직원들이었다. 홍콩 지하철인 MTR 운전기사 300명도 '시위를 지지하고 휴업 투쟁으로 동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냈고, 홍콩 버스 노조도 서행 운전 등의 방식으로 시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의료기관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도 사업장별로 반중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을 위해서가 아닌 홍콩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콩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인 홍콩총상회도 어제(30일) "홍콩 정부가 송환법안을 철회하고,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분노’와 ‘공포’ 사이…치밀한 중국, 개입 명분 쌓나

인민해방군 투입설이 공식 제기된 이후, 홍콩인들 사이에서는 '자제론'이 급격히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이 최루탄을 쏴도 쇠파이프나 각목 등으로 과격하게 맞서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경찰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모여 군중을 이루면 경찰의 한계선을 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경찰이 시위를 불허했을때는 시위 행위 자체가 엄연한 불법이며, 경찰이 거리행진을 불허했을 때 걸으면 그 역시 불법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홍콩의 가치를 지키는 길이다.

지난 28일, 도심 행진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이 과격해지자 흥분하는 시위 참가자들도 볼 수 있었다.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안전모를 벗어 던지는 정도였지만 이런 행동들이 중앙 정부 개입의 명분으로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백색테러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동시에 공포를 심어 줍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때려도 마찬가지죠.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시위대 규모는 점점 줄어들고 강경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나오게 돼 경찰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입니다."

28일 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가던 길에 택시 기사가 "시위대에 동의는 하지만… " 이라며 끝말을 흐리면서 한 말이다.

지난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中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양광(楊光) 대변인이 기자회견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의 경고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연일 미국을 비난하며 홍콩 사태를 미·중 문제로 이슈화하려는 의도도 뚜렷해지고 있다. 100만 명, 200만 명이 반중 시위에 나서자 화들짝 놀랐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전열을 가다듬은 중국은 지금 '공포'와 '분노'를 조장하며 홍콩인들을 흔들고 있다.

자유를 향한 순수한 열망 하나로 맞서기에는 너무나 치밀하고 막강한 중국이다. 택시기사의 말을 듣는 순간 홍콩 하늘 위로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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