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입력 2019.08.31 (07:00) 수정 2019.09.0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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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반일 종족주의'란 책에 나오는 독도에 관한 기술입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하 이 교수)가 대표 집필한 이 책이 최근 장안에 화제입니다. 예스24 8월 4주 종합 베스트셀러에서 이 책은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마디로 핫(hot) 합니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 경제사를 전공한 명망있는 경제사학자입니다. 그의 책을 보면 실증적인 자료를 통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주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있었던 토지 조사 사업이나 쌀 수탈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부분에서 학계에 자극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책 13절에 나오는 독도 관련 부분에서는 도저히 '정서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봤습니다. 그가 참고 문헌으로 적시한 논문들을 비롯해 그동안 독도에 관한 주요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영훈 교수의 독도관은 '보고 싶은 것만'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영훈 교수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가 누락한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독도 이야기를 앞으로 5회에 걸쳐 짚어보는 이유입니다. (기사 작성 과정에서 낙성대 연구소를 통해 이영훈 교수의 반론을 신청했지만 답이 오지 않아. 그의 유튜브 방송과 저술을 충실히 소개하는 것으로 반론을 대신합니다)

세종실록지리와 삼국사기

이 교수의 독도관은 조선은 독도를 알지 못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于山)'을 무조건 독도라고 단정하는 '폐습'을 저지르고 있다고도 합니다. (역사서에는 울릉도 인근 섬으로 우산도 외에 삼봉도, 가지도 등 다양한 명칭이 등장합니다)

땅도 없고 물도 없는 곳 독도. 이 교수는 "국제법에서는 그런 곳을 섬이라고 하지 않는다. 바다에 솟은 큰 바위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독도 한국 고유 영토설의 대표적인 근거 사서인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독도 연구자인 신용하 전 서울대 교수는 이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때부터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되었다고 해석했고,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 기사에 나오는 우산이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솔직히 심한 비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산이란 울릉에서 성립한 나라(國)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세종실록지리지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에서 나왔던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입니다.


우리 기대만큼 독도에 관한 명쾌한 기술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기록을 소개하며 이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우산은 원래 11세 초까지 존속하고 사라진 나라(國) 이름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즉 (많은 국내 학자들이 독도로 생각하는 역사 기록상의)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우산도

우리의 독도 고유 영토설의 유력한 근거가 된 것이 바로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팔도총도'라는 지도입니다. 여기도 우산도가 나옵니다. 울릉도의 절반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산도는 울릉도 서쪽의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 팔도총도에 나오는 우산도. 조선의 지도에는 17세기까지 우산도가 대부분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신증동국여지승 팔도총도에 나오는 우산도. 조선의 지도에는 17세기까지 우산도가 대부분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이 교수는 이 점을 지적합니다. (울릉도 서쪽에 그려진 우산도) 지도를 근거로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에게 동서남북을 혼동하도록 가르치는 폭거"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 그린 많은 지도들이 우산도를 그리고 있지만, 위치는 제각각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교수도 지적했듯이 이케우치 사토시라는 일본인 연구자가 조선시대 그려진 116장의 지도에 그려진 우산도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그 연구에 의하면 17세기까지 우산도의 위치는 대개 울릉도의 서쪽이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이고, 19세기에는 동쪽, 그리고 나아가 북동쪽으로 옮아가는 추세를 보입니다.

이렇게 우산도는 조선 시대에 걸쳐 떠도는 섬이었는데, 이는 우산도 자체가 환상의 섬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이 교수는 말합니다. "독도로 비정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그린 우산도 지도 한 장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그래서 조선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는 당연히 울릉도 동남쪽 87km에 위치한 독도는 아니었다고 결론 냅니다.

"19세기 후반에도 조선은 독도를 몰랐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1882년 고종의 명으로 울릉도를 탐사한 이규원 검찰사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고종은 이규원에게 "울릉도 근방에 송도, 죽도, 우산도가 있다는데, 거리가 얼마인지를 조사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송도, 죽도, 우산도를 합쳐 울릉도라고도 하니 자세히 살피라"고도 합니다.

나중에 돌아온 이규원은 우산도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합니다. 그가 그린 울릉도 지도에는 죽도라는 섬은 있어도 우산도는 없었답니다. 이 교수는 이를 근거로 조선은 울릉도 동남 87km 떨어진 바위섬을 알지 못했거나, 그것을 울릉도의 부속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의도적 의미 축소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영훈 교수의 이런 저술에 특별한 사실 왜곡을 찾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방적인 내용들만 열거됐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선 독도에 관한 주요 연구들과 달리 이 교수는 일본 사서 기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일본 사서를 보면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는 송도(松島·마츠시마)라 불렀습니다. 일본 사서에는 울릉도 왕래가 한 참 이뤄지던 1660년 사서에 독도를 송도라 부른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17~18세기에 양국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식해서 조선 땅으로 간주했다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몇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17세기에 이미 일본은 독도(그들은 송도라고 부름)가 울릉(그들은 죽도라고 부름)과 한 패키지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울릉도에서 대죽이 생산된다는 점 때문에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는데, 소나무가 자랄 수 없는 바위섬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부른 것은 죽도의 竹(죽)과 어조상 짝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일본 학자는 지적합니다. (塜本孝, '竹島領有權問題の經緯' 1994, 2쪽)

1660년 일본 고문서에 보이는 '竹島之內松島'(죽도지내송도)라는 표현은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가 하나의 묶음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허영란, 독도영유권 문제의 성격과 주요 쟁점, 222쪽)

자 그렇다면 일본은 독도를 알았는데 조선은 독도를 몰랐을까요.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공도(空島)정책을 취했습니다.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금(海禁)정책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독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치가 제각각인 우산도를 그린 지도도 그런 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도를 울릉과 무관하게 생각하는 이 교수의 생각은 역사를 올바르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수는 안용복 사건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 침입을 항의하러 1696년 2차 일본행을 감행한 '위대한 선각자' 안용복은 오늘날의 독도를 일본이 송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그것은 조선의 영토고, 이름은 우산도"라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강원도 지도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정부는 안용복의 그런 주장에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표하고, 관리를 파견해 섬을 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선왕조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러나 조선 왕조가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안용복, 즉 조선어부들의 독도 인식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울릉도 문제로 일본과 분쟁이 생기자 조선은 울릉도의 관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수토사를 보내기로 합니다. 1694년 9월에 삼척첨사 장한상을 파견했는데 장한상 일행은 울릉도 성인봉에 올라 동쪽으로 지금의 독도를 보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얘기는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비롯한 동해의 자국 소속 도서를 통할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허영란 교수는 평가합니다.

1808년에 간행된 만기요람(萬機要覽)도 있습니다. 만기요람은 與地志(여지지)를 인용하며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 우산은 왜(倭)가 말하는 송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왜 이 교수는 이런 기록은 언급하지 않을까요.

이 교수의 편향된 시각은 앞으로 소개될 내용들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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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 입력 2019-08-31 07:00:35
    • 수정2019-09-08 07:11:49
    취재K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반일 종족주의'란 책에 나오는 독도에 관한 기술입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하 이 교수)가 대표 집필한 이 책이 최근 장안에 화제입니다. 예스24 8월 4주 종합 베스트셀러에서 이 책은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마디로 핫(hot) 합니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 경제사를 전공한 명망있는 경제사학자입니다. 그의 책을 보면 실증적인 자료를 통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주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있었던 토지 조사 사업이나 쌀 수탈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부분에서 학계에 자극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책 13절에 나오는 독도 관련 부분에서는 도저히 '정서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봤습니다. 그가 참고 문헌으로 적시한 논문들을 비롯해 그동안 독도에 관한 주요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영훈 교수의 독도관은 '보고 싶은 것만'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영훈 교수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가 누락한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독도 이야기를 앞으로 5회에 걸쳐 짚어보는 이유입니다. (기사 작성 과정에서 낙성대 연구소를 통해 이영훈 교수의 반론을 신청했지만 답이 오지 않아. 그의 유튜브 방송과 저술을 충실히 소개하는 것으로 반론을 대신합니다)

세종실록지리와 삼국사기

이 교수의 독도관은 조선은 독도를 알지 못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于山)'을 무조건 독도라고 단정하는 '폐습'을 저지르고 있다고도 합니다. (역사서에는 울릉도 인근 섬으로 우산도 외에 삼봉도, 가지도 등 다양한 명칭이 등장합니다)

땅도 없고 물도 없는 곳 독도. 이 교수는 "국제법에서는 그런 곳을 섬이라고 하지 않는다. 바다에 솟은 큰 바위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독도 한국 고유 영토설의 대표적인 근거 사서인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대해 설명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독도 연구자인 신용하 전 서울대 교수는 이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때부터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되었다고 해석했고,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 기사에 나오는 우산이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솔직히 심한 비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산이란 울릉에서 성립한 나라(國)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세종실록지리지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에서 나왔던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입니다.


우리 기대만큼 독도에 관한 명쾌한 기술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기록을 소개하며 이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우산은 원래 11세 초까지 존속하고 사라진 나라(國) 이름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즉 (많은 국내 학자들이 독도로 생각하는 역사 기록상의)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우산도

우리의 독도 고유 영토설의 유력한 근거가 된 것이 바로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팔도총도'라는 지도입니다. 여기도 우산도가 나옵니다. 울릉도의 절반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산도는 울릉도 서쪽의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 팔도총도에 나오는 우산도. 조선의 지도에는 17세기까지 우산도가 대부분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이 교수는 이 점을 지적합니다. (울릉도 서쪽에 그려진 우산도) 지도를 근거로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에게 동서남북을 혼동하도록 가르치는 폭거"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 그린 많은 지도들이 우산도를 그리고 있지만, 위치는 제각각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교수도 지적했듯이 이케우치 사토시라는 일본인 연구자가 조선시대 그려진 116장의 지도에 그려진 우산도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그 연구에 의하면 17세기까지 우산도의 위치는 대개 울릉도의 서쪽이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이고, 19세기에는 동쪽, 그리고 나아가 북동쪽으로 옮아가는 추세를 보입니다.

이렇게 우산도는 조선 시대에 걸쳐 떠도는 섬이었는데, 이는 우산도 자체가 환상의 섬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이 교수는 말합니다. "독도로 비정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그린 우산도 지도 한 장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그래서 조선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는 당연히 울릉도 동남쪽 87km에 위치한 독도는 아니었다고 결론 냅니다.

"19세기 후반에도 조선은 독도를 몰랐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1882년 고종의 명으로 울릉도를 탐사한 이규원 검찰사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고종은 이규원에게 "울릉도 근방에 송도, 죽도, 우산도가 있다는데, 거리가 얼마인지를 조사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송도, 죽도, 우산도를 합쳐 울릉도라고도 하니 자세히 살피라"고도 합니다.

나중에 돌아온 이규원은 우산도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합니다. 그가 그린 울릉도 지도에는 죽도라는 섬은 있어도 우산도는 없었답니다. 이 교수는 이를 근거로 조선은 울릉도 동남 87km 떨어진 바위섬을 알지 못했거나, 그것을 울릉도의 부속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의도적 의미 축소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영훈 교수의 이런 저술에 특별한 사실 왜곡을 찾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방적인 내용들만 열거됐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선 독도에 관한 주요 연구들과 달리 이 교수는 일본 사서 기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일본 사서를 보면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는 송도(松島·마츠시마)라 불렀습니다. 일본 사서에는 울릉도 왕래가 한 참 이뤄지던 1660년 사서에 독도를 송도라 부른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17~18세기에 양국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식해서 조선 땅으로 간주했다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몇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17세기에 이미 일본은 독도(그들은 송도라고 부름)가 울릉(그들은 죽도라고 부름)과 한 패키지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울릉도에서 대죽이 생산된다는 점 때문에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는데, 소나무가 자랄 수 없는 바위섬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부른 것은 죽도의 竹(죽)과 어조상 짝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일본 학자는 지적합니다. (塜本孝, '竹島領有權問題の經緯' 1994, 2쪽)

1660년 일본 고문서에 보이는 '竹島之內松島'(죽도지내송도)라는 표현은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가 하나의 묶음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허영란, 독도영유권 문제의 성격과 주요 쟁점, 222쪽)

자 그렇다면 일본은 독도를 알았는데 조선은 독도를 몰랐을까요.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공도(空島)정책을 취했습니다.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금(海禁)정책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독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치가 제각각인 우산도를 그린 지도도 그런 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도를 울릉과 무관하게 생각하는 이 교수의 생각은 역사를 올바르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수는 안용복 사건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 침입을 항의하러 1696년 2차 일본행을 감행한 '위대한 선각자' 안용복은 오늘날의 독도를 일본이 송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그것은 조선의 영토고, 이름은 우산도"라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강원도 지도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정부는 안용복의 그런 주장에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표하고, 관리를 파견해 섬을 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선왕조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러나 조선 왕조가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안용복, 즉 조선어부들의 독도 인식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울릉도 문제로 일본과 분쟁이 생기자 조선은 울릉도의 관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수토사를 보내기로 합니다. 1694년 9월에 삼척첨사 장한상을 파견했는데 장한상 일행은 울릉도 성인봉에 올라 동쪽으로 지금의 독도를 보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얘기는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비롯한 동해의 자국 소속 도서를 통할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허영란 교수는 평가합니다.

1808년에 간행된 만기요람(萬機要覽)도 있습니다. 만기요람은 與地志(여지지)를 인용하며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 우산은 왜(倭)가 말하는 송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왜 이 교수는 이런 기록은 언급하지 않을까요.

이 교수의 편향된 시각은 앞으로 소개될 내용들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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