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입력 2019.09.08 (07:00) 수정 2019.09.0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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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독도에서)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 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독도 문제의)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뤄야 합니다...."(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73페이지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 시리즈 마지막(5회)은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얘기로 시작합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대일(對日)강화조약이 정식 명칭입니다.

1945년 패망한 일본의 영토를 정할 때 독도는 분명 일본 영토에서 제외됐습니다.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SCAPIN) 제677호도 그랬고, 1950년 연합국이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로 마련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도 그랬습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에 넘겨줘야 하는 섬에 '독도'가 포함됩니다.

종전 후 연합국의 분위기는 일본의 영토 기준을 일본이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1894년 이후 새로 획득한 영토는 모두 돌려줘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1894년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해)

그런데 1951년 맺어진 대일강화조약은 2조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합니다. 조약 내용을 두고 한일 양국이 독도에 대해 서로 치열하게 영유권 주장을 하자 미국이 독도를 아예 빼버린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영훈 교수는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한 달 앞둔 1951년 8월 미국 국무부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보내온 회신을 소개합니다.

"독도와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 구절을 소개하며 이영훈 교수는 "읽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라고 평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국 국무부 회신 한 장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매우 균형을 잃은 시각입니다. 독도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지식이 얼마나 대단할까요.

국내 학자들의 연구 결과 미국 국무부가 언급한 '우리 정보'의 소스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1947년 6월에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라는 책자를 만듭니다. 여기에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 이름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습니다.

이 책자를 들고 일본은 워싱턴의 미국 국무부와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필사적인 로비를 벌입니다.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누락된 것도 이런 배경 하에서였을 것입니다.

조약에 독도 언급이 없더라도 독도가 일본 땅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승만의 강경책

독도에 대한 우리 측 요구가 관철이 안 되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를 눈앞에 둔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공포해 독도를 한국 수역으로 선언합니다. 일본은 열흘 뒤 구술서에서 "한국선언에서 한국은 죽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그 섬은 여지없이 일본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단 있게 독도를 지켰습니다. 그는 이승만 라인을 넘는 일본 어선을 제압하기 위해 해군을 동원합니다.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일본어선 326척이 나포되고, 3,094명의 일본인이 체포됨)

1965년 한일 협정 때 독도 문제는 다시 나옵니다. 이때도 양국은 영유권 주장을 하며 맞섭니다. 결국, 기본조약에는 독도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4개의 부속 조항에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대신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습니다. 우리의 영유권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이 협정으로 우리의 실효적 지배는 인정됩니다. 협정 이후 독도 문제는 30여 년간 큰 문제 없이 굴러왔습니다.

독도가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1998년 9월 맺어진 신(新)한일어업협정 때입니다.

UN 해양법협약에 따라 연안 200해리가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설정되면서 한일 양국 간 EEZ가 겹치게 됐습니다. 두 나라의 해역은 400해리가 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시작된 양국 간 어업협정 개정 협상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1998년 9월 타결됩니다. 이때 독도가 공동수역(일본명 잠정수역)으로 결정됩니다. 애국 단체들과 야당은 '굴욕 협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기점을 당연히 독도로 했어야지 왜 일본의 요구대로 울릉도로 했느냐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 어업협정의 문제일 뿐 영유권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실용적인 이유로 '굴욕 협상 주장'을 반박합니다. 독도를 기점으로 고집하지 않는 대신 동해의 황금어장으로 불리는 대화퇴(大和堆) 어장에 대한 양보를 얻어낸 것입니다.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도 다뤄졌는데 헌재는 2001년과 2009년 "신어업협정이 EEZ 경계 획정이나 영토 문제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독도 주변을 중간 수역으로 분류한 한일 어업협정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합니다.




한국의 강경 대응이 문제일까.

이영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책에서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역대 정부의 독도 정책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독도라는) 이 곤란한 문제를 두고 이승만 정부 이후의 역대 정부는 현명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방을 자극하는 공격적인 자세는 자제해 왔습니다. 그런 자세에서 1965년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우호적 관계를 증진해왔습니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있었던 한일 어업협정도 칭찬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개정하면서 독도를 포함한 바다를 양국의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의 민족주의자들은 어업협정의 개정을 비난했습니다만, 김대중 정부는 그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의 칭찬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 시작된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격적인 자세를 꾸짖고 있습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부터 달라졌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독도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독도에 여러 시설을 설치하고, 주민을 입주시키고, 민간의 관광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항의하고, 그것이 다시 한국 정부와 국민의 강경한 대응을 부르는 악순환이 증폭됐습니다....."

이 교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요.

그의 말대로 독도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때는 노무현 정부 때로 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 26일 한일 관계 특별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독도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문제를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 (2006년 4월 26일)

앞서 노무현 정부는 2005년 3월 24일부터 독도에 대한 민간인들 관광을 제한적으로 허용합니다. 독도 문제에 대한 이런 공세적인 태도는,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됩니다. 이명박 정부는 독도에 대한 전면적인 관광을 허용한 데 이어 2012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합니다.

이영훈 교수는 이런 정부의 공세적인 독도 정책을 비판합니다.

"김대중 정부까지 이어진 역대 정부의 냉정한 자세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1951년 미국국무부가 밝힌 대로 독도는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불과합니다......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 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차분한 대응을 강조한 취지이지만, 이 교수의 이런 논지는 뭔가 이상합니다. 균형을 잃은 느낌입니다.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독도는 조용할까요.

-2012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독도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6년 독도를 방문해 하루를 묵었던 문재인 대통령 -2012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독도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6년 독도를 방문해 하루를 묵었던 문재인 대통령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2005년 이후 매년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 즉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앞서 2004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망언을 했죠.

일본 시마네현은 2005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 조례를 만들고 매년 기념식도 합니다.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독도 관련 언급이 들어가더니 2014년 1월에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 중"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2014년 일본 시마네(島根)현 마쓰에(松江)시 소재 현민회관에서 열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기념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2014년 일본 시마네(島根)현 마쓰에(松江)시 소재 현민회관에서 열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기념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베 정부 들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의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진입하자 일본 관방장관이 자신들의 영토 침입을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죠.

독도의 분쟁 지역화를 노리는 일본의 의도에 휘말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독도에 대해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일본에 맞선 우리의 이런 대응은 '강경대응'아닌 '정상대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5회에 걸쳐 이어졌던 이 시리즈는 경제사학자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종족주의'책에 나오는 독도론을 반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장의 지도가 있습니다. 독도가 우리 땅임은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수토사 장한상의 일기로 시리즈는 마무리합니다. 시리즈 1회가 나간 뒤 수토사 장한상의 독도 관찰 기록(1694년)을 자세히 소개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다음 같은 내용입니다.

"비 개이고 구름 걷힌 날, 산에 들어가 중봉을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마주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삼봉(三峯)입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물빛과 하늘빛이 같았습니다......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장한상, 울릉도수토기, 1694년)

장한상은 울릉도 중봉에 올라 동해안의 대관령을 봤고, 동남쪽으로는 독도를 봤습니다.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일본 강역에는 섬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게 무슨 의미입니까.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강역에 있으며, 일본의 강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조선인도 독도를 분명히 조선의 강역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고유 영토임을 증명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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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 입력 2019-09-08 07:00:32
    • 수정2019-09-08 08:48:08
    취재K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독도에서)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 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독도 문제의)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뤄야 합니다...."(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73페이지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 시리즈 마지막(5회)은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얘기로 시작합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대일(對日)강화조약이 정식 명칭입니다.

1945년 패망한 일본의 영토를 정할 때 독도는 분명 일본 영토에서 제외됐습니다.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SCAPIN) 제677호도 그랬고, 1950년 연합국이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로 마련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도 그랬습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에 넘겨줘야 하는 섬에 '독도'가 포함됩니다.

종전 후 연합국의 분위기는 일본의 영토 기준을 일본이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1894년 이후 새로 획득한 영토는 모두 돌려줘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1894년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해)

그런데 1951년 맺어진 대일강화조약은 2조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합니다. 조약 내용을 두고 한일 양국이 독도에 대해 서로 치열하게 영유권 주장을 하자 미국이 독도를 아예 빼버린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영훈 교수는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한 달 앞둔 1951년 8월 미국 국무부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보내온 회신을 소개합니다.

"독도와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 구절을 소개하며 이영훈 교수는 "읽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라고 평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국 국무부 회신 한 장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매우 균형을 잃은 시각입니다. 독도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지식이 얼마나 대단할까요.

국내 학자들의 연구 결과 미국 국무부가 언급한 '우리 정보'의 소스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1947년 6월에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라는 책자를 만듭니다. 여기에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 이름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습니다.

이 책자를 들고 일본은 워싱턴의 미국 국무부와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필사적인 로비를 벌입니다.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누락된 것도 이런 배경 하에서였을 것입니다.

조약에 독도 언급이 없더라도 독도가 일본 땅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승만의 강경책

독도에 대한 우리 측 요구가 관철이 안 되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를 눈앞에 둔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공포해 독도를 한국 수역으로 선언합니다. 일본은 열흘 뒤 구술서에서 "한국선언에서 한국은 죽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그 섬은 여지없이 일본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단 있게 독도를 지켰습니다. 그는 이승만 라인을 넘는 일본 어선을 제압하기 위해 해군을 동원합니다.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일본어선 326척이 나포되고, 3,094명의 일본인이 체포됨)

1965년 한일 협정 때 독도 문제는 다시 나옵니다. 이때도 양국은 영유권 주장을 하며 맞섭니다. 결국, 기본조약에는 독도를 언급하지 않는 대신 4개의 부속 조항에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대신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습니다. 우리의 영유권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이 협정으로 우리의 실효적 지배는 인정됩니다. 협정 이후 독도 문제는 30여 년간 큰 문제 없이 굴러왔습니다.

독도가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1998년 9월 맺어진 신(新)한일어업협정 때입니다.

UN 해양법협약에 따라 연안 200해리가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설정되면서 한일 양국 간 EEZ가 겹치게 됐습니다. 두 나라의 해역은 400해리가 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시작된 양국 간 어업협정 개정 협상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1998년 9월 타결됩니다. 이때 독도가 공동수역(일본명 잠정수역)으로 결정됩니다. 애국 단체들과 야당은 '굴욕 협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기점을 당연히 독도로 했어야지 왜 일본의 요구대로 울릉도로 했느냐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 어업협정의 문제일 뿐 영유권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실용적인 이유로 '굴욕 협상 주장'을 반박합니다. 독도를 기점으로 고집하지 않는 대신 동해의 황금어장으로 불리는 대화퇴(大和堆) 어장에 대한 양보를 얻어낸 것입니다.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도 다뤄졌는데 헌재는 2001년과 2009년 "신어업협정이 EEZ 경계 획정이나 영토 문제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독도 주변을 중간 수역으로 분류한 한일 어업협정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합니다.




한국의 강경 대응이 문제일까.

이영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책에서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역대 정부의 독도 정책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독도라는) 이 곤란한 문제를 두고 이승만 정부 이후의 역대 정부는 현명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방을 자극하는 공격적인 자세는 자제해 왔습니다. 그런 자세에서 1965년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우호적 관계를 증진해왔습니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있었던 한일 어업협정도 칭찬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개정하면서 독도를 포함한 바다를 양국의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의 민족주의자들은 어업협정의 개정을 비난했습니다만, 김대중 정부는 그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의 칭찬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 시작된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격적인 자세를 꾸짖고 있습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부터 달라졌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독도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독도에 여러 시설을 설치하고, 주민을 입주시키고, 민간의 관광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항의하고, 그것이 다시 한국 정부와 국민의 강경한 대응을 부르는 악순환이 증폭됐습니다....."

이 교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요.

그의 말대로 독도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때는 노무현 정부 때로 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 26일 한일 관계 특별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독도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문제를 주권 수호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 (2006년 4월 26일)

앞서 노무현 정부는 2005년 3월 24일부터 독도에 대한 민간인들 관광을 제한적으로 허용합니다. 독도 문제에 대한 이런 공세적인 태도는,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됩니다. 이명박 정부는 독도에 대한 전면적인 관광을 허용한 데 이어 2012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합니다.

이영훈 교수는 이런 정부의 공세적인 독도 정책을 비판합니다.

"김대중 정부까지 이어진 역대 정부의 냉정한 자세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1951년 미국국무부가 밝힌 대로 독도는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불과합니다......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 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차분한 대응을 강조한 취지이지만, 이 교수의 이런 논지는 뭔가 이상합니다. 균형을 잃은 느낌입니다.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독도는 조용할까요.

-2012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독도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6년 독도를 방문해 하루를 묵었던 문재인 대통령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2005년 이후 매년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 즉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앞서 2004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망언을 했죠.

일본 시마네현은 2005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 조례를 만들고 매년 기념식도 합니다.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독도 관련 언급이 들어가더니 2014년 1월에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 중"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2014년 일본 시마네(島根)현 마쓰에(松江)시 소재 현민회관에서 열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기념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베 정부 들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의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진입하자 일본 관방장관이 자신들의 영토 침입을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죠.

독도의 분쟁 지역화를 노리는 일본의 의도에 휘말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독도에 대해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일본에 맞선 우리의 이런 대응은 '강경대응'아닌 '정상대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5회에 걸쳐 이어졌던 이 시리즈는 경제사학자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종족주의'책에 나오는 독도론을 반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장의 지도가 있습니다. 독도가 우리 땅임은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수토사 장한상의 일기로 시리즈는 마무리합니다. 시리즈 1회가 나간 뒤 수토사 장한상의 독도 관찰 기록(1694년)을 자세히 소개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다음 같은 내용입니다.

"비 개이고 구름 걷힌 날, 산에 들어가 중봉을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마주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삼봉(三峯)입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물빛과 하늘빛이 같았습니다......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장한상, 울릉도수토기, 1694년)

장한상은 울릉도 중봉에 올라 동해안의 대관령을 봤고, 동남쪽으로는 독도를 봤습니다.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일본 강역에는 섬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게 무슨 의미입니까.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강역에 있으며, 일본의 강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조선인도 독도를 분명히 조선의 강역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고유 영토임을 증명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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